"주민등록번호를 새롭게 바꿔 줄 수 있나?" 이른바 공문서 위조로 형법상 10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을 수 있는 범죄를 의뢰한 자, 다름 아닌 나의 엄마다. 얼마 전, 남해읍사무소에 갔을 때였다. 내가 필요한 서류를 떼고 있는 동안 엄마가 슬그머니 옆 창구 직원에게 다가갔다.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하는 엄마와 난감한 표정을 짓는 직원,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며 재빠르게 엄마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시죠?" 다급하게 직원에게 상황을 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직원이 쪽지 하나를 건넸다. '440210'이라는 숫자가 적힌 쪽지였다. "이게 무슨 숫자인가요?" "어머니가 주민번호를 새롭게 하나 만들어달라고 해서…." 여전히 상황 판단이 안 되는 나에게 직원이 앞뒤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39년생으로 올해 나이 80세인 엄마가 당신의 나이가 75살이 되려면 주민번호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물었다는 것이다. 물음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주민번호를 하나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앞뒤 상황을 종합하면 '440210'은 엄마의 원래 주민번호 '390210'에서 앞자리만 5살 낮춰 만든 주민번호였다. 어이없어하는 나와는 달리 엄마의 표정은 무척 밝았다.

'80세인 엄마는 왜, 75세가 되고 싶었던 걸까?' 그 이유는 '할매'라는 소리를 듣기가 싫어서였다. "아니, 80살 할매가 할매 소리를 듣기 싫어하면, 이 세상에 누가 할매라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까?" 엄마에게 짓궂게 따져 묻자, 엄마가 진지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누님이라고 부르는데, 나에게만 할매라고 부르잖아!" 아니,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엄마를 75살 누님으로 살고 싶게 만든 걸까? 엄마의 욕망을 부추긴 전후사정은 이러했다.

엄마의 오래된 취미는 춤추기다. 일명, 콜라텍에서 지르박과 같은 사교댄스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남해에서 진주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다니는 수고로움을 열정으로 커버하신다. 최근, 단골 콜라텍에 문제가 생겨서 새로운 콜라텍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쪽에서 노는 이들 대부분이 젊은 70대 초반이라고 한다. 처음 그들과 뒤풀이를 하는 날, 누군가 엄마의 나이를 물었다고 한다. 문제는 그날부터였다. 분위기에 휩쓸려서인지, 아니면 동안 외모라고 자신해서인지, 자기도 모르게 엄마가 그만 "75살입니다"라고 나이를 속인 것이다. 순간 아차 싶었지만 '내 나이가 80살이오!'라고 솔직하게 말하면 늙은이 취급을 받을 것 같아서 그 자리에서 정정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그 이후로 70대 초반들과 또래인 듯, 또래 같은, 또래 아닌 또래로 잘 지내왔는데 얼마 전에 일이 생겼다. 엄마와 파트너인 71살 남자가 당돌하게 물었다고 한다. "누님! 나이가 75살이 맞습니까? 아무래도 아닌 것 같은데…. 맞다면 민증 한 번 까보이소!" 물론, 엄마는 주민등록증을 깔 수가 없었다. 당황해하는 엄마에게 그날 이후 눈썰미 좋은 71살 파트너는 '누님'이라는 호칭 대신 '할매'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엄마는 누님이라는 호칭을 되찾기 위해 읍사무소에서 75세 민증 번호를 의뢰한 것이다.

할매라는 말 대신 누님이라는 호칭이 듣고 싶은 엄마의 욕망! 노인들의 욕망을 주책으로 인식하는 우리 사회에서 엄마의 욕망은 크게 환영받지 못한다. 젊음이 잘해서 받는 상이 아니듯, 늙음 또한 잘못된 벌이 아님에도 우리는 늙음을 모욕한다. 노인이 사랑과 성을 논하는 순간, 우리는 그 욕망을 노욕으로 폄하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부터 엄마의 욕망을 이해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늘도 '구르프'를 감고 자신을 가꾸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엄마의 욕망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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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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