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있게 자기 목소리 낼 줄 아는 어린이들

해마다 가을 끝자락의 하루는 온전히 '경남 어린이 글쓰기 큰잔치'에 보내온 어린이 글을 읽으며 어린이들 삶을 만납니다. 글쓰기 회원들이 수북이 쌓인 원고 더미 앞에 앉아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어린이 글을 읽는데요, 올해는 유난히 어른으로서 부끄러운 해입니다. 어린이들 글 속에 나타난 어른들 모습 하나하나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중에도 우리 어린이들은 힘 있게, 자기 목소리로, 하고 싶은 말을 똑바로 해내고 있습니다. 어린이의 건강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기쁘고 고맙습니다.

1000편이 넘는 글 중에 자기 삶, 자기 모습을 진솔하게 잘 드러내며 쓴 글을 중심으로 읽고 또 읽으며 수상작을 뽑았습니다. 소중하고 좋은 글이 많았으나 으뜸·버금상에 뽑힌 글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강경찬 어린이가 쓴 '작은 오미자'는 덜 익은 오미자를 골라내는 일을 하고 쓴 글입니다. 손으로 떼어내기 힘들 만큼 작은 오미자 둘이 껴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같이 몸 부대끼며 키워졌을 과정을 생각한 게지요. 덜 익은 오미자를 몰래 빨간 오미자 상자에 넣어두는 어린이 마음이 참 예쁩니다. 그 뒤에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상상이 일어나는 글입니다.

박승현 어린이가 쓴 '바퀴벌레가 낫겠다!'는 "나는 오늘도 힘들다"로 시작하는데, 그것은 해야 할 것이 많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힘들다는 말입니다. 이 어린이가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원해서 하는 것이라면 괜찮을 텐데" 그렇지 못하니 힘들고 "내 마음대로 하는 건 없"으니 힘들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이 들면 바퀴벌레가 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을까요? 막연하게 바퀴벌레를 떠올린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바퀴벌레의 모습을 말하는데, 그것이 모두 자기 생활과 반대입니다. 이 어린이는 글로라도 이렇게 자기 목소리를 힘 있게 낼 수 있었으니 분명 건강하게 성장할 것입니다. 그게 글쓰기의 힘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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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미끄럼틀'을 쓴 정서윤 어린이는 아마 비가 오는 날 미끄럼틀을 타보았을 것입니다. 바지가 젖고 조금 춥기도 했겠지요. 그러나 상관없습니다. 미끄럼틀이 젖으면 물미끄럼틀이 되어 더 재미있으니까요. 아이의 즐거운 마음이 그대로 전해옵니다. 김하연 어린이가 쓴 '언니~ 미안해'에도 거짓 없는 아이 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언니 생일선물로 지우개와 새콤짱을 샀으나 배가 고파 언니 생일도 잊고 까먹어버렸지요. 지우개만 받은 언니가 화를 내니까 자기도 같이 화를 냈지만, 가만히 생각하니 미안했던 게지요. 아이 마음이 솔직하게 잘 드러나 있어서 그대로 좋습니다.

홍성윤 어린이가 쓴 '왕재수 없는 날'은 선생님이 오해를 해서 혼을 내는 바람에 자기는 "말을 하고 싶어도 벙어리가 된 것 같"은 날의 일을 일기로 쓴 글입니다. 그날은 "해도 화가 난 날"이군요. 따옴표를 잘 살려 써서 일이 일어난 까닭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린이 스스로 얼마나 답답했을지 느껴질 만큼 과정도 자세히 밝혀 써주니 공감이 되는 글입니다.

김서연 어린이가 쓴 '싸우지 마세요'에서도 소통을 하지 못하는 어른들 모습이 그대로 어린이 눈에 비쳐 있습니다. 아파트 재건축을 두고 서로 싸우는 어른들의 말이 귀에 콕콕 박히는데, 그 이유는 엄마가 아파트 재건축 추진위원회 회원이기 때문이지요. 이 글이 뽑힌 이유는 막연하게 동네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이 중심에 있는 글을 썼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그 일로 회의를 가면 10시가 넘어서 들어오고, 자기 방에는 가끔 물도 새고 "태풍 치는 날은 '찌저적' 하는 소리"도 나지요. "최근에 학교에서 건물붕괴의 조짐에 대해" 배웠는데 비슷하니 무섭기도 합니다. 제발 큰 갈등이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어린이 마음이 전해오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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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예진 어린이는 죄인도 아닌데 죄인처럼 슬슬 눈치만 보게 만드는 아빠를 글감으로 '강력계 형사'라는 제목을 붙여 글을 썼습니다. "경찰서에서만 볼 수 있는/ 죄를 지어야만 볼 수 있는/ 강력계 형사가/ 우리 집에 산다"는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그 강력계 형사는 뒷모습만 봐도 닭살이 돋을 정도니 얼마나 무서울까요. "잘못을 하면/ 언제든지 달려와" 형사처럼 혼을 내는 "아빠는 죄인만 잡으면 되는데/ 우리도 잡는다"고 항변합니다. 역시 자기 목소리를 분명히 낼 수 있으니 이 어린이에게 믿음이 갑니다. 표현할 수 있을 때 이겨낼 힘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올해 응모된 글에서도 어딘가에서 가져온 듯한 글이 많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른 손을 댄 것이 확실해 보이는 글은 심사에서 제외하였다는 사실도 밝혀둡니다. 버금상에 뽑힌 글 중에 한 편은 남의 글을 그대로 옮겨 써낸 글임이 뒤늦게 밝혀져 수상을 취소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삶을 중심으로 쓰지 않고 머리로 지어낸 글, 남의 글을 흉내 낸 글, 순간을 잘 붙잡아 쓰지 못하고 여러 사실을 나열한 글은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자기 삶을 잘 붙잡아서 자세하고 진솔하게 쓴 글이 가장 좋은 글이라는 사실을 어린이들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린이는 스스로 소중한 존재입니다. 어른의 간섭으로 병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힘 있게 자기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어린이로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랍니다. /박종순(아동문학평론가)

◇제19회 경남어린이글쓰기 큰잔치 심사위원 명단

△심사위원장 아동문학평론가 박종순 △심사위원 통영사량초 교사 강우성·김해봉황초 교사 오세연·김해봉황초 교사 정혜린·김해봉황초 교사 백기열·경남도교육청 초등교육과 장학사 최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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