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12일 대한민국 언론에 '격세지감'을 떠올리게 하는 뉴스가 실렸다. 이젠 너무 입에 익어 당연하게 여기던 '헌병(憲兵)'이란 단어가 공식 퇴출된다는 소식이었다. 국방부는 일제 강점기 '헌병대' 이미지를 없앤다는 차원에서 창설 70년 만에 헌병 병과 이름을 '군사경찰'로 바꾼다고 밝혔다.

일제(日帝)는 조선을 36년간 무단통치하는 과정에서 현역 군인인 헌병을 적극 활용했다. 군 내부 질서 유지와 범죄 진압을 주 임무로 하는 헌병을 일상적인 행정, 경찰 분야에 투입해 폭압적인 정치 도구로 쓴 것이다. 때문에 조선 민중에게 국민 생활 전반을 감시하고 억압한 헌병은 이름 그 자체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국방부가 병과 명을 바꾸기로 했다는 건 바로 이런 역사를 고려한 조치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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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세계대전 당시 벌어진 난징대학살. 일본군에 의해 죽은 중국인들.

일제 헌병은 왜 그렇게 무서웠을까? 아니 일본군은 왜 그리 다들 잔학했을까? 비슷한 시기에 근대 군대를 만든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도 일본군은 유달리 모질고 잔인했다. 혹 사무라이 국가 후손이라서 그랬을까?

20세기 초 일본인 니토베 이나조가 영문으로 <무사도>를 발간하자, 서구 사회는 일본인들이 예외 없이 칼을 휘두르고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는 줄 알았다고 한다. 일본 사무라이 문화를 찬양하는 책 내용에 흠뻑 빠진 데다, 동양에 대한 무지와 환상이 얽힌 탓이었다.

몰락한 사족(士族·무사계급) 후손도 더러 있었지만, 근대 일본군은 대부분 전국에서 징집된 농민병으로 구성됐다. 농어촌에서 생업에 몰두하던 장삼이사 아들들이 칼을 휘두르며 사무라이 심성을 체화하고 있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입대 후 '천황의 군대'로 거듭나자 이들 농민병은 마치 몸 안에 원래 악마가 숨어 있었던 듯 행동했다. 현대사에서 가장 악명높은 사건인 '난징 대학살'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영국기자 팀펄리는 "인류가 생겨난 이래 처음으로 보게 된 살아있는 지옥", "그 야만의 정도는 유럽 중세 암흑시대의 야만행위를 능가한 사건"이란 표현을 썼다. 기자가 현장을 묘사할 더 심한 어휘를 찾기 어려웠으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시작은 이보다 40여 년 전에 발발한 청일전쟁이다. 주 전장인 뤼순을 함락한 일본군은 시내를 도륙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런던 타임스>에 이어 뉴욕 신문 <월드>에 학살 기사가 실리자 전 문명 세계가 경악했다.

"일본 군대는 11월 21일(1894년) 포트 아서(뤼순의 별칭)에 들어가 냉혹하게도 거의 모든 시민을 학살했다. 아무런 방비가 없던 시민들이 집집마다 학살당했다. 그 시체들은 말로 내뱉기도 끔찍하지만 팔다리가 잘려 있었다. 무제한의 살인행위가 3일간 계속되었으며 온 시가지가 몸서리를 칠 정도였다. 그것은 일본 문명에 새겨진 최초의 오점이었다. 여기서 일본군은 완전히 야만으로 돌아갔다. 잔학 행위를 정당화하는 사정이 있었다는 변명은 모조리 거짓말이다. 문명사회는 그 상세한 이야기를 알게 되면 전율할 것이 틀림없다. 외국 종군기자들은 참상을 눈 뜨고 볼 수 없어, 한 덩어리가 되어 일본군과 작별했다."

현장 목격자들에 따르면 구체적 행위는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자비를 구하는 노인을 총검으로 찔러 죽이고 머리를 베었다. 언덕을 향해 도망친 부녀자는 쫓긴 끝에 총에 맞아 죽었다. 개, 고양이, 길 잃은 당나귀 등 움직이는 물체는 모조리 쏘고 베어 죽였다. 시가지는 시체로 가득 찼고, 피가 강물이 되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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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인 참수 경쟁’을 보도한 일본 니치니치 신문 1937년 12월 13일 자. 전쟁포로와 민간인을 상대로 한 이 엽기적인 행각은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전쟁범죄다.

당시 메이지 천황은 승리 소식을 듣고 단카(短歌) 두 수를 읊었다고 한다.

"헤아릴 수 없는 적들이 쌓은 성채를 / 용감하게 공격하는 총소리 / 세상에 이름난 쑹수(松樹)산을 / 함락시키는 승리의 함성이여!"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 국가로 변신한 일본은 첫 국제전인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은 잔학하기 이를 데 없는 군대'라는 사실을 전 세계에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이런 기조는 조선 독립군 토벌 등에 이어 난징대학살에서 만개(?)한다.

중일전쟁 기간인 1937년 일본군은 중국 국민당군과 교전 끝에 난징을 점령하자 중국인 포로와 일반 시민을 무차별 학살했다. 극동국제재판 판결에 따르면 비전투원 1만 2000명, 패잔병 2만 명, 포로 3만 명이 시내에서 살해되었고, 근교에 피난 가 있던 시민 5만 7000명 등 총 12만 9000명이 살해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기록에 남은 최소한의 숫자로, 실제로는 3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행태와 규모는 뤼순 학살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난징 진입 후 두 달 동안 약탈, 방화, 부녀자 겁탈, 윤간, 고문, 살해, 매장이 저질러졌다. 누가 더 많이 아녀자를 겁탈하느냐, 누가 더 많이 군도로 목을 베느냐 하는 겁탈 경쟁, 살인 경쟁이 벌어졌다. 영국기자 팀펄리의 말대로 그건 확실히 지옥이었다.

대다수 역사가들이 이 지점에서 품는 의문이 있다. 아무리 군국주의 군대라지만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럴 수 있었을까? 일본군이 펼쳐 보인 '지옥도(地獄圖)'는 정상적인 심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이라는 특수한 체제를 이해하고, 그들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 국가로 줄달음친 여정을 잘 살펴보면 어렴풋이 해답이 보인다.

첫째는 일본군이 단순히 국가에 대한 충성을 요구한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상명하복 체제로 이뤄져 있었다는 점이다. 1882년 공표된 이래 줄곧 일본군에게 주입된 군인칙유(軍人勅諭)나 전진훈(戰陣訓) 등은 "상관의 명령은 곧 짐(천황)의 명령이라고 명심하라"라고 요구하고 있다. 근대 일본군은 외견상 천황과 하나 된 군대였으며, 천황의 분신들(각급 지휘관)이 수직으로 늘어선 체제였다.

반면 당시 징집병들은 봉건적 질서 속에 속박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징병은 부역과 다름없는 말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군사적 질서를 부과하기 위해서는-즉 강제동원에 대한 불만이나 반발을 누르기 위해-엄격한 군기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불합리한 억압이 생기고, 거기서 싹튼 불만이 '천황의 명령을 이행한다'는 이름으로 무차별적 폭력과 잔학행위로 표출됐다.

통수권을 쥔 천황에게만 책임을 진다며 문민통제를 받으려 하지 않았던 일본군 지휘부도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내부 불만을 외부로 돌리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난징 대학살 시기에 최고 지휘관들은 국민당군에게 본때를 보여준다며 병사들에게 "살아있는 것은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했다.

일본 촌락공동체에 뿌리내린 '무라하찌부(村八分)' 문화가 병사들을 수동적으로 만들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이다. 무라하찌부란 농어촌 지역사회에서 유력자나 마을 전체의 의사에 반하는 일탈행위를 하는 자에게 장례, 화재진화, 성인식, 결혼식, 출산, 발병, 주택 신개축, 수해, 불교법회, 여행 등 일상에서 중요한 열 가지 일 가운데 장례와 화재진화를 제외한 나머지 8가지를 도와주지 않고 따돌리는 문화를 말한다.

아직도 '이지메'라는 따돌림 문화로 남아있는 무라하찌부는 개인이 능동적인 사고와 행위를 하는 것을 원초적으로 차단한다. 대다수 젊은이들은 그래서 모난 돌이 되지 않기 위해 집단에 뛰어드는 정서를 어려서부터 발전시킨다.

조직 속에 자신을 매몰시키고 몰개성적으로 살아가는 이런 문화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청년들이 군대에서 딴 목소리를 낼 것으로 기대하기란 어렵다. 황군(皇軍)이란 옷을 입고 동료들과 함께 침략전쟁에서 승리했다면, 그 과정에서 발생한 온갖 잔학행위에 대해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다.

세 번째 요인은 동양에서 최초로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국민적 자부심이 자신들보다 뒤처진 중국과 조선을 우습게 보고, 잔학행위를 부추겼다는 사실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조센징'(원래 조선인을 가리키는 가치중립적인 고유명사이지만 이 말에는 조선인을 무시하는 의미가 있음), 중국인을 '짱꼬로'(중국인을 무시하는 별명인 짱꼴라를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로 부르며 멸시했다. 일본 지도층에서 비롯된 이 풍조는 청일전쟁, 한국강점 등을 통해 전 국민에게 전파되고 강화됐다. 당시 일본인들 심정을 요약하자면 바로 이런 것이리라! "그것 봐라! 역시 조센징과 짱꼬로는 이류 국민이야! 유신을 통해 근대국가로 우뚝 선 우리하곤 비교할 수 없어!"

이러니 일본군은 피점령지에서 물 만난 고기떼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 "낯선 타지에선 무슨 짓을 하든 개의치 말고 부끄러워 말라"는 일본 속담이 말해주듯 그들은 극악무도하고 파렴치한 행동에 전혀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넷째는 어쩌면 앞선 세 가지 원인보다 더 본질적일지 모른다. 그것은 바로 일본군이 해외침략에 나서는 과정에서 부족한 보급을 메꾸기 위해 현지 조달을 묵시적 군대 방침으로 정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본은 19세기 후반 메이지 유신을 통해 재빨리 근대 국가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토대가 약하고 근대화를 진행할 시간이 짧다 보니 서구 열강과 경쟁하거나 오랜 침략전쟁을 지탱할 국부를 쌓지 못했다. 러일전쟁만 하더라도 전비(戰費)를 조달하지 못해 미국의 유대인 사업가 시프에게 전시채권 구입을 구걸하다시피 할 정도였다. 원래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많은 국가들이 러시아가 이길 것이라 보고 일본의 전시채권을 사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유대인 탄압 때문에 반러 감정이 높았던 유대인 시프가 대량으로 채권을 구매해줬고, 이에 힘입어 일본은 간신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사정이 이랬기 때문에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보급을 현지에서 조달해야 한다는 건 상하 모두가 체득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말이 좋아 현지 조달이지, 이 말이 원래 뜻하는 바는 바로 약탈이다. 그리고 약탈에 나선 군대가 현지 주민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리 없다. 아니 잔학한 면모를 띠는 게 정상이다.

황군으로 자처한 일본군에게 당시 중국인들이 붙인 별명은 이런 정황을 극명하게 입증한다. 그 별명은 다름 아닌 '황군(蝗軍)'이다. 임금 황 자 대신 메뚜기 황 자를 써서 일본군이 거쳐 간 자리엔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고 했다.

또 보급이 약하다 보니 일본군 지휘부는 병사들에게 유달리 '정신력'을 강조했다. 천황으로 대표되는 일본혼을 극대화하자는 구호였으나, 정신력 강화는 무기와 물품 부족에 시달리는 현실을 호도하려는 기만책에 지나지 않았다. 약탈을 강요받는 상황에서 정신력만 강조하니 병사들의 눈이 뒤집히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

2차 대전 패전 후 한국에 살던 일본인들이 미군과 조우한 기록이 있다. <조선을 떠나며>라는 책에는 당시 상황이 이렇게 적혀 있다.

대략 500~600명의 미군이 진주했는데, 일본인들은 이들이 가져온 장비와 물품을 보고서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이 이러한 나라를 상대로 4년 동안이나 전쟁을 벌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언뜻 보아도 미군은 모두 최신식 무기를 갖추었을 뿐 아니라, 이 오지에 주둔하면서도 침구와 식량, 심지어는 개인이 마실 물까지 휴대하고 있었다. 얼마 전 소련군에게 쫓겨 군복조차 벗어 던지고 내려온 초췌한 일본군의 행색이 자꾸만 떠올라 더욱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초췌한 일본군'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치르는 내내 현실이었다. 부족한 국력을 '일본정신'으로 메우겠다는 사고가 부른 필연적 귀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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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9월 2일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가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모습.

잔인한 일본군 시대는 1945년 일본이 패전하면서 막을 내린다. 창군 이래 민간정부를 따돌리고 오로지 전쟁에만 몰두했던 군부는 완전히 몰락하고, 도조 히데끼를 비롯한 군 수뇌부는 전범 재판에 회부됐다.

그러나 1945년 항복 선언을 받아낸 후 일본에 진주한 미군은 매우 신중했다. 전쟁 막바지에 일본군이 본토 결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혹 그 여파로 미군이 상륙할 경우 예상치 못한 소요가 발생할까봐 극도로 조심스러워했다.

그런 미군이 맞닥뜨린 실제 분위기는 어땠을까? 일본 내지에 들어온 미군은 한마디로 놀라고 말았다. 잔학했던 일본군과 그들과 한통속이었을 일본인들은 온데간데없고, 비굴한 몸짓과 웃음으로 점령군을 맞이하는 초라한 일본인들만 가득한 것이었다.

시산혈해와 메이지 천황의 단카, 그리고 초췌한 일본군과 패전 후 모습은 몇 가지 원인분석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난감함을 안겨준다. 온갖 것이 뒤섞여 무엇이 참인지,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헷갈리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요시다 유타카가 <일본의 군대 : 병사의 눈으로 본 근대일본>에서 한 말을 들어보자. 그는 비교적 명료한 어조로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한다.

"쇼와(昭和)의 육해군은 일본 사회가 낳은 이물(異物)도 귀신의 아들(부모를 닮지 않은 아들)도 아니며 일본 근대화가 만든 하나의 귀결이다. 우리는 군대에서 근대화를 경과하면서 만들어진 우리 자신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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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난징 서남쪽에 있는 난징대학살 기념관 앞에 있는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동상.


참고자료

♣ 도널드 킨 지음/김유동 옮김, <메이지라는 시대>, 서커스

♣ 요시다 유타카 지음/최혜주 옮김, <일본의 군대 : 병사의 눈으로 본 근대 일본>, 논형

♣ 고케츠 아츠시 지음/박인식 박현주 옮김, <침략전쟁>, 범우

♣ 이연식 지음, <조선을 떠나며>, 역사비평사

♣ 서상문 글 오마이뉴스 기사, '일본군은 원래부터 잔인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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