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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도 제승당 이순신 영정.

<이충무공전서>와 <난중일기> 국역주해(國譯註解)를 위해 노력

노산은 4·19 직후인 1960년 5월에 당대 최고의 한학자들과 함께 작업한 <國譯註解 이충무공전서>(상, 하권)를 충무공기념사업회에서 출간하였다. 그러나 기존의 사료 수집이 미진하고, 교정 과정의 오류 등이 많아서 노산이 직접 새로운 사료를 수집하고 현지답사 등을 통해 확인, 보완하였으며 또다시 재집필하던 중에 타계하였다고 한다. 이충무공전서를 발간한 후에 노산은 <國譯註解 난중일기>(1968년), 학생 대중을 위한 <성웅 이순신>(1969년 4월)을 썼다. 난중일기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7년 동안인 1592년 1월 1일부터 1598년 11월 17일, 노량해전에서 돌아가시기 이틀 전까지 진중내외(陣中內外)의 일을 적어 놓은 일기이다. 충무공은 임진, 정유재란의 7년 전쟁 중에 모두 7차례 출동하여 17개의 해전을 지휘하였다. 난중일기라는 이름은 충무공이 전사한 지 198년이 지나서 1795년(정조 19년) 정조는 정부문서간행소에 해당하는 교서관(敎書館)에 전담부서를 두어 어명에 의해 3년간 이순신의 유고를 모아서 <李忠武公全書>를 편찬할 때 편찬자의 편의에 따라 붙인 것에서 유래되었다. 이충무공전서는 충무공의 모든 행적을 밝혀낸 것으로 충무공 자신의 기록뿐만 아니라 공에 대한 예찬, 숭모하는 시문(詩文), 비명(碑銘) 및 다른 문헌에 실려 있는 기록까지 집대성하여 모두 14권 8책으로 만들어졌다. 난중일기는 모두 3종류가 있다. 현재 충남 아산 현충사에 소장되어 있는 <친필 초고본(草稿本)>과 정조 때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의 5~8권에 수록되어 있는 일기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이 표제를 쓴 <재조번방지훈> 속의 일부 일기 등이다. 난중일기는 2013년에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2년에 이미 국보 76호로 지정되었다.

1951년 설의식이 번역한 난중일기가 있고, 1955년 북한에서 월북 문인 벽초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이 <리순신장군전집>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평양 소재 국립출판사에서 간행하였다. 설의식과 홍기문의 난중일기 한글 번역본은 모두 저본이 <친필 초고본>이 아니고 <이충무공전서> 속의 난중일기였다. 일제시대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인하여 노산과 같이 근무했던 동아일보 편집국장직을 물러난 설의식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난중일기를 한글로 번역했다. 1951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충무공기념사업회가 주관해서 펴낸 <민족의 태양>에 실린 '난중일기' 국역 부분이다. 당시 기념사업회 회장은 조병옥이었다. <민족의 태양>은 298페이지의 단행본인데 1부 서록(序錄), 2부 수록(首錄), 3부 본록(本錄), 4부 별록(別錄), 5부 부록에는 난중일기와 충무공 세보(世譜)가 포함되어 있다. 설의식은 그 후 1953년에는 발췌 국역본인 <난중일기초>를 별도로 저술하였다. 설의식은 <난중일기초>에서 2년 전에 출판된 <민족의 태양> 속의 '난중일기' 부분을 자신이 국역했다고 기록해놓았다. 이 책은 수도문화사에서 간행하였다.

1960년, 이은상이 각고의 노력 끝에 완역한 <이충무공전서>에도 '난중일기'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친필 초고본>이 아니고 1935년 조선사편수회가 펴낸 <난중일기초>였다. 이은상은 1960년 난중일기 간행본에서 "공의 초고와 전서 중의 채택되어 있는 난중일기의 내용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10월 7일까지만 남아 있던 무술일기의 빠진 부분을 장예초본 별책(<충무공유사> 일기초)에서 10월 7일부터 11월 7일까지의 친필 일기초 2면을 찾아내 수록했고, "공의 친필초고를 완전 채록했다"고 자부하였다. 다만 이은상은 장예초본 별책이 <충무공유사> 일기초와 동일한 것임은 몰랐던 것 같다. 당시 조선사편수회는 <이충무공전서> 속의 '난중일기'에서 <난중일기초>를 만들었었다. 그 뒤에 나온 번역자들도 대부분 이 책을 저본으로 삼았다. 결국 이은상 번역본을 포함해 그간 나온 번역서는 충무공이 손수 쓴 <친필 초고본>에 대한 고찰 없이 난중일기초에 의존했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한계와 오류가 반복되었다.

이를 아쉽게 생각한 이은상은 8년 후인 1968년 3월, 드디어 <친필 초고본>을 저본으로 충무공전서의 내용을 보충해 최초로 한글로 옮기고 주석을 달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번역본에는 <친필 초고본>에 들어있는 각종 메모와 편지, 장계 초안 등은 누락되어있다. 이은상이 번역한, 친필본과 전서본이 합본된 1068년 <난중일기>는 현암사에서 크라운판(版)으로 간행되었다.

노산이 1968년에 펴낸 <충무공 친필 초고본 완역 난중일기>를 <초서 난중일기>와 대조해 본 해군대학 최두환 교수는 9곳 62장이 누락되었음을 발견했고 6년여에 걸친 노력 끝에 1997년에 원문을 영인하고 진짜 완역판인 <새 번역 초서체 난중일기>를 펴냈다. 결국 <친필 초고본>의 완전한 한글 번역은 노산으로부터 30년이 흐른 1999년에야 비로소 해군사관학교 교수 최두환에 의해 <충무공 이순신 전집 1~6권>이란 이름으로 완역되었다. 그리고 그는 노산의 번역에서 지명도 착오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예를들어 합포해전의 합포는 웅천 합포(현재의 진해구 풍호동 행암 학개마을 앞바다)인데 노산은 난중일기를 국역하면서 마산 합포라고 오역했다고 한다. 진해문인협회 회장 최두환은 자신의 저서인 완역 난중일기에서 웅천 합포라고 번역해 놓았다.그 후 2004년, 초서연구가 노승석이 다시 충무공의 <친필 초고본>을 저본으로 삼아 문제점을 일일이 수정하여 <완역본 난중일기>를 출간하였다.

하여튼 노산의 충무공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였다. 난중일기 외에도 노산은 1971년 <민족사의 불기둥>(횃불사), 1973년 <태양이 비치는 길로>(삼중당), 1975년 <충무공의 생애와 사상>(삼성문화재단) 등의 저서가 있다. 시인이며 산악인인 오정방에 의하면 '이 충무공에 대한 강연에서는 난중일기의 하루하루 날짜까지 줄줄 꿰고 계신 데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기념사업회의 충무공 영정제작을 위한 활동

1948년 12월 8일에 윤보선, 조병옥 등이 참여한 충무공 이순신기념사업회 창립 발기인 모임이 있었으며 초대 회장은 유석(維石) 조병옥(趙炳玉)이었다. 기념사업회의 본격적인 활동은 영정제작이었다. 충무공기념사업회는 이순신 장군의 정확한 영정제작을 위해 충무공영정심사위원회를 조직하고 김은호 화백에게 의뢰하여 영정을 완성했다. 심사위원은 이중화, 이병도, 이선근, 이은상, 손진태, 박종화, 이상백, 최두선, 정인보, 설의식, 안재홍, 백낙준, 안호상, 신석호 등이었다. 이 영정을 1950년 4월, 문교부가 공인했으나 고증이 잘못되었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다.동아일보 1950년 4월 16일 자 1952년 봄, 조병옥, 장면 등이 이끄는 기념사업회는 미국 록펠러재단이 지원한 돈으로 서울 수유리에 이순신 기념공원을 만들 계획을 수립하고 기초조사까지 했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1953년 조병옥이 회장일 때의 사무국장은 일제(逸齊) 권승하(權承夏)였다. 조병옥(1894~1960년)은 1950년 내무부장관으로 재임 중에 1951년 거창사건 책임으로 사직하였다. 1952년에는 대한체육회회장, 1953년에는 다시 내무부장관에 임명되었으며, 1954년에는 대구에서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었고 1955년 민주당이 창당될 때 참여하였다가 1960년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발병하여 도미 치료 중에 사망한 정치인이었다.

한편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노산 이은상은 1955년 10월 사단법인 이충무공기념사업회가 창립하고부터 초대 회장으로 취임하여 1961년 3월까지 재임하는 가운데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 하는데 유석에 이은 두 번째 회장이었던 것 같다. 이당 김은호, 월전 장우성 등이 그린 충무공의 영정에 관한 기념사업회의 활동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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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전 장우성의 현충사 이순신 영전.

순천 충무사의 영정

이당 김은호는 서울로 찾아온 김양수와 순천 유지들이 새로 지은 충무사에 봉안할 이순신 영정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본격적인 제작은 1950년 봄, 이충무공기념사업회가 정식으로 발족하면서 시작하였다. 기념사업회는 순천의 충무사뿐만 아니라 한산도 제승당에도 영정을 모시기로 결정하였다. 이당은 기념사업회의 편찬위원회가 문헌에서 뽑아준 고증자료에 입각하여 그렸다. 당시 고증위원은 변영만, 정인보, 이중화, 황의돈, 이은상, 이병도, 박종화 등이었다.

 

한산도 제승당의 영정

한산도 제승당의 영정은 1950년에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의 갑주복 영정으로 교체되었다. 이 영정은 이충무공기념사업회의 고증을 받아 제작되었으며 이순신 탄신 405주년이 되던 1950년 4월 24일 중앙국립극장(전 태평로 국회의사당) 3층 강당에서 영정 제막식을 하였다. 이 자리에는 국회의장 신익희를 비롯하여 조병옥, 안재룡, 유동열, 정인보, 설의식 등이 참석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기념사업회를 대표한 이은상은 이 영정이 공인본(共認本)으로 결정되었다고 보고했다.

 

아산 현충사의 영정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은 6·25전쟁 중에 피난 수도 부산에서 현충사의 이순신 영정을 그렸다. 1953년 초에 월전은 부산 송도 뒷산의 가교사로 피난 와있던 서울대 미술대학에 재직하고 있었다. 이때 이충무공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고 있던 유석(維石) 조병옥(趙炳玉)이 아산 현충사에 모실 영정을 그려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류성룡의 징비록과 이은상의 이충무공전서를 잘 읽어보고 장군의 참모습을 찾으라"고 당부하였다. 월전은 육당을 만나고 사무국장 권승하와 함께 이순신의 종손 이응렬의 집에 3일간 머물기도 하면서 참모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6개월 동안의 작업 끝에 1953년 10월 7일 영전 봉안식을 했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의 영정

현재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는 이당이 그린 것이 분명한 이순신 갑주복 영정 1점이 보존되어있다. 제승당에 봉안되었던 갑주복 영정과 형상은 비슷하나 세부적인 면에서는 약간 다르다. 박물관 유물카드에 의하면 해군참모총장 황정연 대장(1974년 2월~1979년 4월)이 노산 이은상에게서 선물로 받은 것을 박물관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해사박물관 정진술 기획실장은 이당이 제승당에 봉안한 작품 외에 또 한 점을 제작하여 노산에게 기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70년에 정부는 여러 명의 화가들이 그린 이순신의 영정들 가운데 어느 것을 정본으로 인정할 것인가에 대하여 활발한 논의를 하였다. 문화공보부는 8월 27일 이충무공영정통일자문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자문위원은 현충사 성역화 고증위원이었던 이은상, 조윤복, 김용국, 최영희, 최순우, 조성도, 강만길 등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1973년 10월 30일에 월전의 현충사 작품이 표준 영정으로 결정되었다.

 

전국의 충무공 기념비와 동상 건립에도 참여

이은상은 영정뿐만 아니라 충무공 관련 비문과 동상에 대해서도 큰 역할을 하였다. 몇 가지를 소개하면 전남 고흥군 도화면 내발리에 있는 '이 충무공 머무신 곳'이라는 기념탑은 1955년 고흥군 교육청이 세웠는데 노산이 글을 지어 탑에 새겼다. 전남 진도 벽파진(碧波津)에 명량대첩을 기념하는 벽파진대첩비가 있는데 1955년에 세웠는데 비문은 노산이 썼다. 여수 남산공원에 박정희 대통령 성금기념비와 함께 충무공 동상이 있는데 이곳에도 노산이 쓴 '거북선 찬가'가 새겨져 있다. 현재 여수 이순신광장에는 충무공 동상이 있다. 이곳에 세워져 있는 동상건립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에 전라좌수영이 있어서 이순신 장군이 좌수사로 와서 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훈련을 하고 거북선을 만든 곳이다'라고 한다. 1967년에 세운 이 동상의 고증위원은 이은상, 이병도, 김상기 등 6명이었고 글씨는 손재형이 썼다. 건립기가 적혀있는 둥근 돌의 뒷면에는 이은상이 쓴 <충무공 찬가>가 손재형 글씨로 새겨져 있다.

충무공 오- 충무공/ 영원히 꺼지지 않는/ 민족의 태양이여// 지금 우리 눈 앞에/ 나타나는 그의 모습/ 거북선 거느리고/ 호령하는 그의 위풍/ 일생을 정의에 살던 그이시다/ 내 동포 살리려고/ 피를 뿌리신 그이시다// 그날/ 땅과 하늘을/ 울리시던 그의 맹서/ 저 산 저 바다가/ 그대로 실려 있다/ 외치는 저 목소리를 따라가자/ 살 길은 오직 하나/ 저기 우리를 이끄신다// 충무공 오- 충무공/ 영원히 꺼지지 않는/ 민족의 태양이여

여천군의 돌산도(突山島)에 지방민들의 성금으로 세운 충무공 유적기념비가 있는데 글은 노산이 썼다. 거제에 1956년에 세운 옥포 대승첩기념탑이 있는데 역시 글은 노산이 썼다. 충무시 남망산공원에 충무공 동상과 함께 충무공 한산대첩비가 있는데 비문은 노산이 썼다. 해군본부가 1980년에 제작해 해군사관학교 앞바다에 띄워 일반인에게 공개해왔던 거북선은 노산과 학계 전문가 16명의 철저한 고증으로 만들어졌다. 1999년 남해군에 무상 양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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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 이순신 동상.

노산이 이충무공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있을 때인 1958년 충무공 유적지 답사를 하였다. 해군본부의 지원으로 LST810 함정으로 인천에서 부산까지 7박 8일 일정으로 5월 29일 인천항을 출발하였다. 810함은 해군에서는 두 번째로 큰 군함이었다. 참석자는 대학교수, 역사학자 등 충무공 연구자 30여 명이었다. 청구대 최해청 학장과 충무공 종손 이응렬 선생, 화가 김기창도 참여하였다.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김용태(전 국회의원)였다. 노산은 유적답사를 통해 사료와 현장을 일일이 대비하여 검증하였다. 김봉천은 이 자료를 바탕으로 1971년에 충무공의 전적과 전공을 집대성한 <태양이 비치는 길로> 상, 하권을 썼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1973년이다. 이 책은 충무공 연구의 교과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전국에 있는 충무공 유적의 현판을 직접 썼다.


<태양이 비치는 길로>, 충무공의 길은 우리가 살길

1972년, 조선일보 지상에 '충무공 유적답사기'를 연재하였다. 노산은 자타가 인정하는 이순신 전문가였다. 충무공에 관하여 여러 측면에서 이루어진 다양한 연구를 종합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중 1972년 4월 28일 충무공의 탄신일을 기하여 조선일보사로부터 충무공 유적답사기의 집필을 의뢰받았다.

오랫동안 모아 두었던 충무공 관련 문헌을 들고 충무공이 탄생하신 서울에서부터 마지막 순국하신 남해 노량에 이르기까지 샅샅이 답사한 기록을 4월에 기고하여 12월에 마칠 때까지 10개월 동안 신문연재를 하였다. 기행문 형식으로 작성한 것은 유적지를 실제 답사함으로써 각종 문헌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해전 기록을 새로 정리하기 위해서 였다. 충무공과 함께 생사를 같이했던 부하들의 유적, 충무공이 머물렀던 동네의 후손들까지 만나보는 귀한 시간을 가졌다. 거의 모든 자료와 현장을 총망라하여 집대성한 기록이다. 모든 소주제는 제목과 부제로 구성되어 있고 충무공의 나이와 전쟁 년도가 함께 표시되어 있다.

노산은 책의 첫째 장에서 현충사에 참배하는 것은 "공과 내가 하나됨이다 / 공의 정신과 사상 속에 들어가고 / 내 속에 공의 정신이 / 그대로 배어드는 것을 이름이다 / 아침 해 눈부신 사당 / 예가 어디옵니까 / 사랑과 은혜 꽃피는 여기 / 뜻과 정성 샘솟는 여기 / 그 품에 내가 안겼고 / 내 가슴 속에 님이 계시네"라고 하였다.

노산은 조국을 노래할 때에도 하나였으며 휴전선을 종주할 때에도 하나였다. 충무공과도 그는 하나였다. 이 글을 읽으면 노산이 자신과 대상과의 거리를 없애고 일체가 된 상태에서 풍부한 감정을 주입하여 글을 쓴 것임을 느낄 수 있다.

이 기행문은 방대한 사진과 해전도를 포함하여 탄생으로 시작하여 순국하기까지 160개의 소주제로 나누어 구성되어 있는데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의 공식 후원을 받아 <태양이 비치는 길로> 상, 하권(삼중당)으로 출간되었다. 목차를 보면 '1. 태양이 비치는 길로 - 빛은 받아들이는 이의 가슴에'로 시작하여 마지막 '160. 충무공의 길(붓을 놓으며) - 부활과 영생의 태양이 비치는 길로'로 마치고 있다. 노산은 이 책을 통해 처음부처 끝까지 태양이 비치는 길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는 것이다. '1. 태양이 비치는 길로'에서 '충무공은 국토와 민족과 역사를 살려놓은 분이요 또 그가 숨지던 바로 그 시각에 아침 해가 떠올랐던 것이라. 분명히 태양으로 화한 것임에 틀림이 없으리라'고 했다. 그런데 그 빛은 받아들이는 곳에만 비치는 것이지 가로 막으면 비치지 않는다. 그래서 노산은 가슴을 열고 그 빛을 받아들이려고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려고 한다고 답사의 처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노산은 '내 생각을 그가 진작 생각했었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그가 미리 말했고, 내가 하려는 일을 그가 먼저 행한 것이라고 놀란 듯 깨닫는 거기에, 그와 나의 동화가 있고 합일이 있는 것이다'고 함으로써 합일을 강조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이미 조국과 하나가 된 노산에게 충무공, 조국은 모두 하나가 되어 있었다. 이 합일은 조국 근대화를 이끄는 지도자의 길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노산이 쓴 많은 시조의 특징은 대상과의 합일을 통하여 자신을 시조 속에 투신시킴으로써 감동을 일으킨다. 조국뿐만 아니라 국토와 자신, 역사적 우인과 자신, 자연과 자신을 일원시키기도 했다. 그의 시조 '압록강'은 '굽이쳐 흐르는 물 / 여보 이게 압록강이요 / 물은 연방 흐르는데 발은 붙어 안 떨어진다 / 이 강아 작기나 하렴 / 한번 안아라도 보게'라고 하면서 의인화하여 자신과 합일시키고 있다. 시조 '보현사'에서는 '받들자 관음전에 구슬픈 예불소리 / 그 소리 끊긴 뒤엔 중도 부처도 잠이 들고 / 깊은 밤 나와 달과 산접동 셋이 잠을 못든다'고 하면서 자신과 자연의 합일이 불심으로 승화함을 적고 있다. 우리는 달, 산접동새와 자아의 3자가 일체화된 동화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2. 충무공 발자국 따라'의 글은 한국적 민주주의임을 강조하는 유신체제를 연상토록 한다. 이 글이 쓰여진 1972년은 선포된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이 격렬하던 때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만이 살길이고, 구국의 길임을 강조하는 식이었다. 노산은 "우리 민족의 병을 희랍 철학이나 유럽의 윤리나 중국의 교훈이라야만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병을 고칠 약방문과 약재는 이미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충무공의 발자국 마다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우리 철학이 있고, 우리 윤리가 있고, 우리 교훈이 있다. 우리 방문이 있고, 우리 약재가 있다", "충무공의 사상과 움직임과 지도력 속에서 강렬한 민족의식의 고취를 들을 수 있고 또 모든 국민들의 공통적인 자각과 유대에 의한 응결체 형성의 눈부신 작용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159. 충무공 가신 뒤'에서는 "역대를 통하여 전국 각지에 모신 공의 사당과 비석과 동상들이 한갓 공의 유적을 기념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공의 노선으로써 우리 갈 길을 삼으려 함에서 이거니와 오늘에 와서는 더욱더 우리가 가야 할 새 역사의 방향과 방법과 힘을 스스로 찾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충무공의 길이다. 그 길만이 한국 민족의 살길이다. 또 동양의 평화, 인류의 평화를 지향하는 거룩한 길이기도 하다"고 하였다.

마지막 글인 '160. 충무공의 길'에서는 "물이 배를 띄우는 것이지만 물이 배를 엎지르기도 한다(荀子·君舟民水, 水則載舟 水則覆舟)고 하면서 물은 국민을 이름이다. 국민이 받들어주는 지도자라야 한다. 그가 바로 충무공이다. 그는 국민의 동반자였다. 그러므로 국민과 같이 가는 길! 그 길이 충무공의 길이다. 우리가 가는 길도 바로 그 길이어야 한다. …… 충무공의 길은 제 한 몸 위하는 작은 길이 아니요, 나라와 겨레를 위한 큰 길이다. 구국 노선이다. …… 오늘 우리들이 가고 있는 통일의 길! 그리고 민족의 내일을 내다보고 가는 자주 번영의 길! 이것이 바로 충무공의 길이다. 실패한 역사를 딛고 일어선 민족 부활의 길이요, 민족 영생의 길이다. 우리가 살길은 오직 이 길 뿐이다"고 하였다. 노산은 이 길을 찾기 위해 충무공의 발자취를 따라 유적답사를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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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중일기 원본.

노산은 이 책에서 당시에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정권이 대국민 홍보를 하고 있던 '자주 번영의 길'이 곧 충무공의 길이고 태양이 비치는 길이라고 강조하였다. <태양이 비치는 길로> 상권 465쪽, 하권 447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결론이 유신만이 살길이라는 것이다.

이 책의 상권 표지 뒷면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인 '민족의 태양'이 실려 있다. 하권 표지 뒷면에는 한산도 제승당에 모셔진 이순신의 영정이 있고 그다음 면에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쓴 친서가 '거북선'이라는 제목으로 '남들은 무심할 제 님은 나라 걱정했고 / 남들은 못미친 생각 님은 능히 생각했소 / 거북선 민드신 뜻을 이어 받드옵니다'는 휘호가 실려 있다. 박정희 대통령 자신이 추진하고 있는 유신체제야말로 충무공의 거북선 만드신 뜻을 이어받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유적답사를 위해서는 해군에서 함정을 동원해 주는 등의 협조를 해주었고 현장 조사와 고증에는 행정기관이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이은상은 충무공의 거북선을 찬양하여 특별히 작시까지 헌사해준 박정희 대통령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다. 박정희가 이은상에게 준 이 친서는 이은상과 박정희 사이의 심리적 공감대를 입증하는 척도이다. 충무공을 매개로 하여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일체화한다.

그런데 이은상은 자기보다 먼저 이순신 장군을 연구하고 책을 펴낸 선배 학자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민족주의자인 신채호, 신규식, 장도빈, 이윤재 등은 열거하면서 1930년대 동아일보의 이순신 추모사업과 이광수의 소설 <이순신>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심지어 1931년, 동아일보에 열네 차례에 걸쳐 연재한 춘원의 기행문은 이은상이 쓴 <태양이 비치는 길로>의 선배격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언급이 없다. 여기에는 친일이라는 뜨거운 화두가 놓여있었던 것이 아닐까라고 공임순은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동아일보라는 공식 매체의 후원으로 쓰인 이광수의 기행문과 조선일보와 함께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출간된 이은상의 기행문은 서로 닮은 점이 많다. 역사 속의 인물을 대상으로 특정 이데올로기의 틀에 맞는 신화 만들기 작업을 하였던 것이다.


2017년의 사자성어,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다

매년 년말이 되면 교수신문은 올해의 사자성어를 선정, 발표해오고 있다. 2016년 12월, 교수신문이 택한 올해의 사자성어는 '군주민수(君舟民水)'였다. '순자(荀子)'에 나오는 말이다. 원문은 '군자주야 서인자수야(君者舟也 庶人者水也), 수즉재주 수즉복주(水則載舟 水則覆舟)'다. 풀어보면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전복시킬 수도 있다"는 의미다.

말할 것도 없이 대한민국호의 선장인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을 비롯해 국정 농단자들과 함께 나라를 온전히 이끌지 못하고 어지럽힌 데 대한 책임을 묻고 있는 경고성의 사자성어다.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이 말했다.

"짐은 구중궁궐 깊은 곳에 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일일이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경들을 짐의 눈과 귀로 삼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사해(四海)가 무사하다고 해서 기강을 누그러트려서는 안 된다. '백성을 사랑하면 백성 또한 군주를 경애한다. 군주가 무도하면 백성은 그를 배반한다'라는 말이 있다. 천자가 훌륭한 생각을 갖고 있으면 따르지만 무도하면 버리고 뒤돌아보지 않는다. 정말로 두려운 일이다."

듣고 있던 간의대부(諫議大夫) 위징(魏徵)이 간했다.

"이제 폐하는 천하의 부(富)를 모두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상이 태평스러우며 또한 정치에 마음을 쏟고 있어, 마치 깊은 연못의 엷은 얼음 위를 걷는 듯합니다. 이러하면 나라는 역수(歷數)가 길어질 것입니다. 옛말에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며 또한 배를 뒤집기도 한다(君舟也 人水也 水能載舟 亦能覆舟 군주야 인수야 수능재주 역능복주)'고 했습니다. 폐하께서 두려워할 것은 성의를 다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대로 행하여 주십시오."

노산 이은상이 충무공의 발자취를 걸으면서도 이 생각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현실에서는 독재를 마음대로 하다가 결국 배가 뒤집힌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두 분 모두와 친하였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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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상, <태양이 비치는 길로>(하권), 삼중당(1973년), 4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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