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장수 논개 생가지공원
충북 단양 소선암유원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고 휴일이었다.

전북 무주에서 경기도 성남에 사는 형님 한 분과 대전 신탄진에 살고 있는 형님 한 분을 뵙기로 했다. 두 분 모두 모터사이클을 타면서 알게 된 분들이다. 대전에 살고 계시는 형님을 뵌 지 오래됐는데 마침 250cc 모터사이클을 새로 장만하셨다고 해서 무주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약속 장소는 무주IC 앞 휴게소였다.

무주로 가는 길은 단순하다. 산청으로 가서 3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한참 달리기만 하면 된다. 함양을 거쳐 거창에 닿는다. 거창 위천면을 지나 신풍령을 넘으면 무주 땅이다. 거기서도 북쪽으로 계속 달리면 구천동 입구와 스키장 입구를 지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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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선암유원지 어느 모토캠퍼의 모터사이클과 텐트. 무주에서 만났던 형님의 새 모터사이클과 같은 기종이다. 중국 스즈키 V스트롬250. /조재영 기자

 

우리나라 앞지른 중국 모터사이클 산업

 

점심 때쯤 무주IC 앞 휴게소에 도착했는데 두 분이 벌써 와 있었다. 오랜만에 형님들을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다. 두 분이 형님이고 내가 동생인 입장이라서 체면을 차릴 것도 없고 마음도 편하다. 그간의 살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대전 형님의 새 애마를 시승했다. 중국 업체가 일본 스즈키와 합작해 내놓은 모터사이클인데 완성도가 높았다. 250cc이면 보통 사람들이 타는 125cc에 비하면 배기량이 두 배 정도지만 내가 타는 1200cc에 비하면 아주 작은 배기량이다. 그럼에도 이 모터사이클은 출력이 그리 부족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시속 30~100km 구간은 막힘이 없었다. 다만 최고속이 시속 130km 이내로 제한적이었다. 그것은 배기량의 한계일 수밖에 없다. 여러모로 뜯어봐도 디자인도 잘 빠졌다. 달리기 성능도 좋고 ABS가 장착되어 있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하지만 가격은 700만 원 정도여서 결코 싼 편은 아니다. 이 기종을 보면 이제 모터사이클은 중국 제품이 국산을 완전히 앞질렀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모터사이클이 고속도로는 물론이고 자동차전용도로조차 달릴 수 없는 우리나라의 제도와 모터사이클은 위험한 물건이며 무시해도 되는 대상이라는 국민 인식 속에서 모터사이클 산업이 발전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 모터사이클 산업의 몰락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지금이라도 정부는 모터사이클을 온전한 교통수단으로 인정하고 그에 걸맞게 제도를 고치고 국민 인식 전환을 위한 조치도 해나가야 한다. 물론 국민 인식을 바꾸는 데는 라이더들이 먼저 앞장을 서야 할 것이다. 자신들은 불법운행을 일삼으면서 국민들에게 좋은 인식을 가져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대전 형님이 점심을 사겠다고 해서 나섰다. 성남 형님이 앞장을 섰다. 원래 무주IC 휴게소 안에 맛집으로 알려진 짬뽕집이 있었는데 장사가 잘되어서인지 수 km 떨어진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에도 많은 차가 짬뽕집 앞 대로변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도 도로변에 나란히 주차를 하고 식당으로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탕수육과 쟁반짜장이 맛있었다. 대전 형님은 점심을 사고 커피까지 내셨다. 오랜만에 만난 셋은 사는 이야기, 세상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작별 인사를 하고 두 분은 김천 쪽을 둘러보기로 하시고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고 나는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논개는 기생이 아니었다

무주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 장수군이다. 장수에서 육십령을 넘어 집에 가기로 했다. 장계면에서 육십령으로 향하다가 오른쪽으로 빠지면 대곡리로 들어간다. 대곡리에 '의기 논개'의 생가지가 있다. 장수군에서 조성한 논개 생가지는 골짜기 하나 전체를 다듬어서 둘러볼 만한 관광지로 만들어놓았다. 생가를 복원해놓았고 기념관과 동상이 세워져 있다. 야산에는 전망대와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고 정자와 연못도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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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장수군 논개생가지 공원에 있는 논개 동상.

논개는 일반적으로 '의기'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논개는 기생이 아니다.

논개는 1574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에서 태어났다. 1576년 아버지 주달문의 죽음으로 어머니 박씨 부인과 둘만 남게 되었다. 1578년 작은아버지 주달무의 권유로 두 집 살림을 합쳤다. 주달무가 어린 조카 논개를 김풍헌의 민며노리로 보내기로 비밀 계약을 하고 금품을 받아 도망갔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가 논개를 데리고 친정으로 도망갔다. 박씨 부인이 논개를 데리고 도망갔다는 소문을 들은 김풍헌이 작은아버지 주달무를 찾았지만 그의 행방을 찾지 못하자 장수 현감인 최경회에게 박씨 부인을 처벌해달라고 고소장을 냈다. 논개는 어머니와 함께 체포되어 관아에 갇혔다. 최경회가 재판을 했다. 이 재판에서 박씨 부인과 논개는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갈 곳이 마땅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논개는 관비가 되기를 자청해 관아의 노비로 살게 되었다. 논개는 최경회의 부인 나주 김씨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하게 된다.

1579년 여섯 살 때 어머니가 최경회에게 간청해 최경회를 따라 무장현 관비로 따라가게 된다. 1582년 최경회가 영암군수로 전직되자 다시 영암군 관비로 따라간다. 1587년 최경회가 사도시정으로 갈 때에도 같이 수행하게 된다. 1590년 열일곱 살 때 최경회의 소실부인이 된다. 최경회가 모친상을 당해 사직하고 고향 화순으로 돌아갈 때, 논개는 고향 장수로 돌아가 최경회를 기다린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최경회가 전라우도 의병장으로 장수에서 의병을 모집해 훈련을 시킨다. 이때 논개를 최경회를 만나 훈련 의병들 뒷바라지를 하게 된다. 1593년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제2차 진주성 전투를 할 때 성안의 다른 여성들과 함께 전투에 참가한다. 최경회는 성이 왜군에서 함락자되자 자결한다. 논개는 기생으로 위장해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의암으로 유인해 그를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다. 스무 살이었다. 논개가 기생이 아니라 최경회의 소실부인이었다는 것은 해주최씨 가문의 족보에도 기록되어 있다.

시인 변영로는 논개를 노래했다.

종교보다도 깊고 / 불붙는 정열은 / 사랑보다도 강하다 / 아! 강낭콩꽃보다 더 푸른 / 그 물결 위에 /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 그 마음 흘러라 / 아리땁던 그 아미 / 높게 흔들리우며 /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 죽음을 입맞추었네! / 아! 강낭콩꽃보다 더 푸른 / 그 물결 위에 /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 그 마음 흘러라 / 흐르는 강물은 / 길이길이 푸르리니 / 그대의 꽃다운 혼 / 어이 아니 붉으랴 / 아! 강낭콩꽃보다 더 푸른 / 그 물결 위에 /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 그 마음 흘러라

장수 쪽으로 육십령으로 오르는 길은 구비가 급하다. 너무 깊게 누우면 자칫 미끄러질 수도 있어 조심해야 한다. 반면 함양 쪽 구비는 상대적으로 완만하다. 그래서 좀더 느긋하게 코너를 즐길 수 있다. 육심령을 넘으면 함양군 서상면이다. 서상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들어가면 논개묘가 있다. 정확하게는 최경회의 묘가 있고 그 앞에 논개 묘가 있다. 그곳에도 잠시 들렀다. 그곳에서 바라본 하늘이 맑고 맑았다.

 

젊은 부부가 부러웠다

네이버 '이륜차타고세계여행' 카페에 11월 정기 캠핑 모임 공지가 떴다. 11월 3일 충북 단양 소선암유원지 야영장이었다. 올해 마지막 정기 캠핑 모임이다. 12월부터 2월까지 동계에는 전국 모임이 열리지 않는다.

올해 정기 캠핑에는 제대로 참석을 하지 못했다. 바쁘기도 했고, 몇몇 친한 지인들과 하는 모토캠핑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10월 정기모임에는 꼭 참석하려 했는데 태풍 때문에 취소되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꼭 참석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왠지 모터사이클을 타고 가고 싶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막연히 그래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럴 때는 그냥 느낌을 따르는 것이 상책이다. 이런 느낌을 무시해도 상관없기는 하지만 어떤 때는 뭔가 께름칙하고, 그것이 여행 내내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불편하기도 하다.

카페 공지글에 참석 댓글을 달고, 이쪽에서 함께 갈 지인들에게도 알리렷다. 차를 타고 갈 테니 무거운 짐이 있으면 내가 싣고 가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후배가 "11월 3일쯤이면 밤에는 기온이 많이 떨어지는 시기이니 난로가 필요하겠다"라며 내게 자신의 난로를 싣고 가자고 했다. 나는 어차피 싣고 가는 것이니 다른 짐도 있으면 붙이라고 했다. 그러자 후배는 그날 서울에서 결혼식이 있으니 전날 서울로 모터사이클을 타고 출발할 테니 나머지 짐도 함께 실어다 달라고 했다. 나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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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 단양군 단성면 소재지의 풍경이다. 온천지가 단풍으로 물든 풍경이 길손의 발길을 붙잡았다.

당일 아침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떠날 준비를 했다. 차에 캠핑 장비를 싣고 후배의 집으로 갔다. 후배가 미리 잠금장치를 열어놓은 창고에서 난로와 야전침대 등 캠핑 장비를 실었다. 차는 고속도로로 진입해 북쪽으로 달렸다. 현풍휴게소에서 쉰 다음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대구, 군위, 의성, 안동, 영주를 지나 단양IC로 빠져나왔다. 단양IC에서 소선암유원지까지는 20분이면 도착한다.

단성면사무소 소재지에서 차를 세웠다. 호수를 가운데 두고 울긋불긋 물든 산이 아름다웠다.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몇 장 찍은 뒤 다시 출발했다.

소선암유원지에 도착했을 때 우리신문에 <아들과 함께 오토바이 타고 유라시아 횡단> 글을 연재하고 있는 '아빠고래' 최정환 씨가 먼저 와 있었다. 정환 씨 먼저 자리를 잡은 텐트 옆에 짐을 정리했다. 정환 씨가 인근에 자리 잡은 젊은 부부를 소개해줬다. 같은 직장에 다니던 30대 초반 부부인데 내년에 유라시아 횡단에 도전하려고 둘 다 직장을 그만뒀다고 했다. 1200cc 대형 모터사이클을 장만했고, 2종소형면허도 땄다고 했다. 그렇지만 여행이나 모토캠핑은 완전 초보여서 많은 정보가 필요해서 카페 활동을 시작했다고 했다.

'유라시아 횡단'이나 '세계여행'을 생각만 하고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다니던 직장까지 정리하고 여행 준비를 한다는 것은 이미 반쯤은 실제 여행을 출발한 것이나 다름없음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부디 그 젊은 부부의 여행이 실현되고 성공하기를 바랐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런저런 사정과 이런저런 걱정에 묶여서 생각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나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한편으로는 한심하고 한편으로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국내파' 모터사이클 여행자들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소선암유원지의 붉게 물든 단풍나무 아래서 나는 나를 위해 기도했다. "부디 나도 내년에는, 혹은 후내년에는 꼭 떠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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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단풍잎 아래서 하룻 밤을 지낸 뒤 둘러본 충북 단양 소선암유원지의 아침은 밝게 빛나고, 모터사이클 여행자들은 여유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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