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착취의 대상으로 변질되는 농촌
땅의 소리에 소홀한 적 없나 돌아봐야

밭에서 풀을 매다 흙을 가만히 본다. 색깔도 다르고 흙 알갱이 하나하나의 모양도 제각각이다. 밭을 거닐다 보면 10년 전, 수십 년 전, 백 년 전 이 자리에 서 있었던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지 궁금해진다.

어떤 모양으로 밭을 만들고 어떻게 농사를 지었을지, 이곳에서 울고 웃으며 어떤 이야기들을 했을지 궁금하다.

밭마다 농부들의 사연이 있고 한이 있어 그러한 시간은 개인과 시대의 역사가 되고 노래가 되고 시가 되었다. 오래전부터 누군가의 손에 의해 농사를 지어온 그 땅에 내가 농사를 짓고 있다는 생각에서 거슬러 좇아가다 보면 아득한 느낌에 빠져든다. 알 수 없는 기운이 모이고 흩어지고 다시 모이기를 반복한다.

나와 인연을 맺은 땅들에도 나의 삶과 시간이 보태어졌다. 모종을 옮겨 심을 때, 잘 자라라며 흙을 토닥였던 일과 비가 오지 않아 축 처진 작물을 보면서 애를 태우던 일, 하늘에 비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보면서 가족들이 하늘을 올려보며 손뼉을 치며 밭에서 뛰던 일, 감자 꽃이 예뻐서 사진을 찍으며 흰 꽃은 흰 감자, 자주 꽃은 자색감자 노래를 부르고, 호미로 땅을 뒤집다가 잠에서 덜 깬 개구리를 들어 올려 사과하고 다시 흙을 덮어 주었던 일. 어찌 그뿐이랴. 숱한 이야기들이 예슬이의 시가 되고 수연이의 노래가 되었다.

해 질 녘, 괭이로 밭을 갈고 있던 나를, 식사하자며 부르러 나온 아내는 노을빛에 혼자 밭을 가는 나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지금까지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성직자라며 칭찬을 해 주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괭이질할 때면 가끔 아내의 칭찬이 생각나 기분이 좋다.

올해 생강을 70㎏ 심었는데 뜨거운 태양에 타죽고 31㎏을 수확했다. 이웃 농부들은 종자를 잘 보관했다가 내어놓는 것이 이득이라고 우스갯소리들을 한다. 여덟 가정이 생강 농사를 지어서 수확량을 합하여 생강차를 만드는데 올해는 작황이 좋지 않아 생강차가 턱없이 부족했다. 하늘에 기대어서 하는 농사라 쉽지 않을뿐더러 이상기후에 대비해서도 좀 더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예측할 수 없는 변화에 적응할 수밖에 없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은 나를 다시 겸손하게 한다. 그런들 어찌하랴 한 해 동안 그 밭을 거닐고 풀을 매고 거름을 주었으니 좀 더 땅이 건강해진 것으로 위로를 삼는다. 서로가 받아들여야 할 변화에 순응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방법이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다. 순리를 따라 자연스럽게 산다는 것에 자족하고 터득하는 삶을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어느 날, 마을 할머님이 오셔서 당신이 이제 건강이 여의치 못해 농사를 못 짓게 되었으니 밭을 좀 부쳐 먹지 않겠느냐고 하신다. 밭을 아무에게나 내어놓지 않는 분들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제 마을 분들이 나를 농부로 인정하시는구나 싶어 감동되었다. 이처럼 땅과 사람 사이에 수많은 이야기가 이어지고 만들어진다.

도시에서 귀촌하겠다며 몰리는 사람들로 자꾸 땅값이 오른다. 자연으로 삶의 자리를 옮기는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땅이 투기의 대상이 되고 착취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은 늘 아쉽다. 생각해 보면, 인간의 오만으로 사라진 존재들이 얼마나 많은가! 땅이 사라져가고 있다. 땅과 사람의 이야기가 끊어지고 있다. 그다음은 무엇이 사라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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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면서 나도 땅의 소리에 소홀한 적은 없었는지 돌아본다. 아직 배움과 경험이 필요한 내가 평생 농사지어온 할아버지 할머니의 삶을 따라갈 수는 없다. 하지만 저분들의 이른 발걸음과 요란한 경운기 소리에 잠을 깨며, 더 잘해야지 마음먹는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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