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날 정적을 깨고 아버지가 말을 건다. 열에 아홉은 스마트폰 관련 주제다. 분명 지난주에 알려준 기능인데, 도통 모르겠다는 눈치다. 멀쩡한 애플리케이션이 지워졌다며, 다시 깔아달라는 부탁도 여러 번이다. 사용자가 지우지 않으면 그럴 리 없다고 몇 번을 말해도 수긍하지 않는다.

최대한 쉽게 설명을 해보지만 이해를 돕는 일이 녹록지 않다. 결국, 나는 짜증 섞인 말투로 목소리를 높인다. 매번 같은 결말이다.

처음에는 아버지도 버럭 했지만 몇 번 반복되니 적응이라도 된 것인지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반응이다.

사실 아버지 마음을 잘 알고 있다. 속상하시리라. 아들의 신경질적인 반응도, 도통 이해되지 않는 기술도 답답하긴 매한가지겠다.

가끔 아버지는 "네가 어릴 때 몇 번이나 반복해서 무엇을 묻더라도 나는 짜증 내지 않았다"고 말한다.

맞다. 나는 어릴 때 뭐든 궁금하면 물어보고, 또 물어봤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친절하게 같은 설명을 반복했다. 손수 시연을 해보이거나,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냈다.

아버지에게 질문을 하지 않았던 시점은, 아마 컴퓨터가 등장했을 때다. 아버지도, 나도 처음 보는 기술. 그것은 내가 세상에 한발 가까워지게 하는 것과 동시에 아버지와 나의 거리를 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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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버지에게 짜증을 내는 까닭은, 답답해서가 아니다. 눈 비비면 달라지는 세상의 변화를 30대인 나조차 감당하기 어렵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완벽한 디지털 세대도, 그렇다고 아날로그 세대도 아닌 나는 인구절벽, 빈곤세대 같은 것보다 기술의 발전에 뒤처지는 것이 더 무섭다. 누구나 쉽게 '느리게 걷기'를 주문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서 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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