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수용이 거름 돼 1000년 제국 꽃피웠던 로마
BC 390년 켈트족 침략 '위기'
철저한 교훈 삼아 발전 거듭
에트루리안 기술도 받아들여
목욕탕 문화 '개방'드러내

열망이 열병이 되는 상태라면 이런 것이리라. 무엇인가 그렇게 갈구하는 게 있다면 그 결과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좋으리라. 베네치아에서 의식의 자각을 다시 세운 괴테에게 로마라는 곳은 그 의식 위에 로마의 영혼을 이식시킨 장소였다. 로마의 그림자라 할 수 있는 베네치아에서 팔라디오라는 '진정한 로마인'을 통해 그 자신을 일깨웠다. 하지만, 로마는 베네치아가 거울로 삼았던 바로 그 원본이자 원음인 곳이다.

이곳에서는 "왜"와 "어떻게"라는 질문은 필요 없는, 그냥 있는 그대로 보고 들을 뿐이었다. 내가 마치 스폴레토 수도교 앞에서 그랬듯이 질문이 필요 없었다. 그냥 그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의 해답을 얻은 기쁨이었으니. 판테온이나 벨베테레의 아폴론상, 베드로대성당 그리고 콜로세움과 같은 것들은 모든 측량의 기준을 없애버릴 것들로 여겼다. 아무리 상상했더라도 로마는 그 상상을 넘어서 괴테 앞에 나타나곤 했다. 절망감이라고 할까. 황홀한 절망감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상상 이상의 현실에 그 자신조차 왜소하게 보였다.

▲ 로마 최고의 건축물이라 불리는 판테온.

숙소는 버스나 트램을 타더라도 중심부까지는 40~50분 걸리는 거리다. 컨디션 회복을 기다릴 여유도 없이 달려나왔다. 콜로세움과 전차 경기장, 테베레 강변을 밤이 깊도록 걷고 또 걸으면서 모든 감각을 동원해 로마를 느꼈다. 둘째 날부터는 로마의 일곱 언덕을 중심으로 걸었다. 첼리오 언덕은 첼리오 관문이 없었다면 언덕이 있었던 자리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낮고 작았다. 팔라티노 언덕은 로마라는 나라가 탄생한 곳이지만 이런 곳에서 나라가 시작되었나 싶을 정도로 언덕만 보자면 너무 평범했다. 포로 로마노와 비슷한 유적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역사 현장 정도로 비쳤을 뿐이다.

◇로마의 건국 신화 = 다른 나라의 건국 신화는 신비한 부분이 많지만 로마 건국 신화는 겨우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 이야기 정도일 뿐만 아니라 그 건국 신화 장소도 겨우 10분 정도만 걸으면 끝에서 끝까지 갈 수 있는 작은 언덕이니 건국 신화치고는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캄피돌리오 언덕은 시청사와 비교적 잘 조성된 광장과 건물 탓에 언덕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타운처럼 형성돼 있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했다는 광장과 그 광장 중심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이 있어서 장중함과 웅장함을 더해 주었다. 퀴리날레 언덕에도 퀴리날레 궁전과 현대적 광장이 조성돼 있어서 산뜻했지만 신비감은 없었다.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화석처럼 말라 비틀어져 버린 수많은 유적만이 당시 로마를 대변해 주고 있을 뿐이었다. 이 정도의 위대한 제국을 만들었다면 그 출발점은 높은 산이나 계곡 즈음에 튼튼한 산성 정도는 쌓여 있어야 했지만 로마는 테베레 강변 낮은 언덕이 전부였다. 역사의 시작도 BC 753년부터였으니 3000년이 채 안 된다. 이집트나 그리스, 바벨론과 유대 역사와 비교하면 역사라 할 것도 없이 일천하다.

그래서인지는 모르나 우리나라 역사는 신화라는 느낌이 짙지만 로마 건국 신화는 신화가 아닌 객관적인 역사로 들리니 이것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 모르겠다. BC 753년이 역사의 출발이라면 굳이 신화라 할 것까지도 없지만 그래도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얘기는 신화에 가깝다.

허접한 건국 신화, 나라가 탄생했던 장소라고 생각되지 않은 언덕, 화석처럼 굳어져 버린 역사의 흔적과 현장을 제외한다면 로마라는 도시가 1000년을 지켜 낸 제국 수도였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찾아볼 수 있을까? 헐거운 도시, 아무 곳이나 실례를 해도 전혀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은 편안함이 왜 이 도시에서는 느껴질까?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다.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족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안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못하고', 이 '못하고'만 가졌던 로마인에게 '잘하고'라는 말을 붙일 수 있었던 것은 과연 하나도 없었을까?

BC 390년에 로마는 켈트족에 의해 수도 로마까지 침범당하는 치명적인 위험과 절망에 빠지기도 했다. 에트루리아인들의 손재주는 감히 누구도 따라갈 수 없어서 아레초에서 내가 살펴본 에트루리아인들의 금속 기술, 도자기와 건축 기술 등은 로마로서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한때 에트루리아 왕이 로마 왕을 겸직했었다고 하니 로마가 사실적으로는 에트루리아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꽃을 피우기까지… = 그리스 민주주의는 너무 완벽하고 청결해 인간미가 떨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 선진국인 그리스로 시찰을 갔던 세 명의 사절들은 돌아와 그리스 민주주의에 대해 본받아야 할 것으로 보고하지 않았다. 로마는 켈트족 침입의 충격을 충격으로만 끝내지 않고 철저한 교훈으로 삼았으며 에트루리아인 기술을 부끄럼 없이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다.

주변 국가들보다 1등을 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 로마인들은 스스로 겸허해졌을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경쟁국인 그리스에서 교사를 초빙하기까지 했으며 그 초빙된 교사가 노예라고 하더라도 스승으로 모셨다. 카라칼라 목욕장은 팔라티노 언덕에서 불과 1㎞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매일 8000명의 노동자가 5년 동안 투입돼 건립되었다. 하루에 8000명이 목욕을 했다는 곳인데, 규모로 보자면 콜로세움보다 더 크고 웅장했다. 위대한 신전보다 더 신전 같았으며 그 어느 성보다 더 강성했을 것으로 보였다. 아직도 바닥에는 대리석으로 새긴 모자이크가 그대로 있었고 현대의 올림픽 공식 경기장 정도의 풀장도 있었다.

▲ 카라칼라 목욕장. 매일 8000명의 노동자가 5년 동안 투입돼 건립됐다. 이곳에서는 왕, 신하, 평민, 노예도 모두 같은 입장이 된다.

그곳에서는 왕도, 신하도, 평민도, 노예도 모두 같은 입장이 된다. 수증기 가득한 곳에서 누가 누구인지 분별하기 어려우니. 카라칼라 목욕장에서도 평민이나 신하들이 집정관이나 황제의 뒷담화에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상전에 대한 험담은 예나 지금이나 즐거운 일일 테니. 이발소나 목욕탕은 잡다한 최근 소식들이 가장 왕성하게 나뒹구는 곳이다. 로마는 이런 잡다한 뉴스를 접하고자 전략적으로 초현대식의 거대한 육식 공룡 같은 유흥 위락 업소를 만들었을 수 있다. 일찍이 이런 것들의 효용성을 로마를 지배했던 지배자들 머리에는 지도처럼 자리를 잡고 있었을 테니까.

내가 로마에서 느꼈던 그 느슨함, 마치 짬뽕이나 비빔밥 같은 잡탕의 로마가 2000년 전에 이미 시작된 것은 아닐까? 덜 민주적이고, 덜 과학적이고, 덜 상술적인 그들이 자신을 알고 그들보다 더 잘하는 이웃나라를 배우고 그들을 품었을 테니까.

'장미라면 언젠가는 꽃을 피운다'라는 로마 속담이 있다. 순간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그들만의 속성이 있었다고 하면 너무 큰 칭찬일까? 언젠가는 붉은 장미 한 송이가 피어날 것이라는 믿음이 주변 사람들을 포용하고 품은 것은 아닐까? 그것이 실제로 장미가 되고 그 장미 한 송이들이 장미 꽃다발을 만들고, 장미 정원과 장미 들판을 만들어 온통 세상을 붉게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닐까? 괴테 앞에 드레스 입고 나타난 로마처럼, 피그말리온 앞에 '저예요' 하고 나타난 갈라테이아처럼. /글·사진 시민기자 조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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