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그 골목에 갔다] (18) 진해 여좌동
옛 여명골·좌천골 합친 동네
소방도로 구획 속 작은 골목들
여좌천·내수면 생태공원으로 알려져
퇴역군인 "이제 군인 보기도 어려워"

'진해의 옛 관문 여좌동'

12년 전 기사(2006년 9월 11일 자)에는 그렇게 썼다.

관문? 요즘 같은 사통팔달 시대에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다.

진해만 하더라도 장복산 옛길에다 새 도로, 안민터널, 부산~진해 국도로 입구가 툭툭 틔어 따로 관문이랄 곳이 없다.

하지만, 장복산 고갯길이 유일한 육로였을 때 고개 넘으면 마주하는 동네가 여좌동이었다. 구태여 관문이란 말을 끄집어낸 이유다.

10년 전 진해 골목을 다시 찾는 첫 여정이라는 의미도 있다.

◇여좌천이라 하지 마세요

여좌동 골목산책의 시작점은 진해중학교다.

여기서부터 장복로 건너편으로 여좌천에 이르기까지 군데군데 옛 골목이 남아있다.

우연히 만난 '여좌로 89번길', '여좌로 83번길'이 그랬다.

고요하고 정갈한 골목이다.

▲ 여좌천 근처 여좌로 골목. /이일균 기자

일제 이전 옛 마을이름이 '좌천'이었던 이곳에는 주변에 포장된 소방도로와 어울리지 않는 골목길이 숨었다.

곧 만날 여좌천 건너편 동네 옛 이름이 '여명'이었고, 여좌동은 두 마을 머리글자를 붙인 것이라고 지금은 고인이 된 진해 사학자 황정덕(1927∼2015) 선생이 말했었다.

골목길에서는 느끼는 편안함이란….

여좌천 직전에 만난 '여명로' 샛골목 끄트머리에 파란 하늘이 걸렸다.

...

그리고 만난 여좌천.

벚꽃 필 때 여좌천은 여좌동의 상징이고, 나아가 진해의 명물이 됐다. 유명한 '로망스다리'가 이곳에 있다.

지금 벚꽃이 없어도 여기는 그만이다. 쾌적한 공기, 걸을 때 덱에서 느껴지는 촉감, 산들산들 부는 바람이 어우러진다.

여좌천7교 '달비치다리'에서 한명우(85) 어르신을 만났다.

60년 넘게 여좌동에 산다는 그는 "공기가 좋아서 하루에 몇 번씩 나온다"고 했다. 자칭 '여좌천 광팬'이다.

60년 전 여좌천은 어땠냐는 질문에 어르신은 "그때가 더 좋았지" 했다. 지금처럼 나무덱이 없어도, 하천정비가 되지 않았어도 그때가 좋았다는 것이다.

가만히 들어보니 어르신이 좋았다고 하시는 건 여좌천이 아니다. 진해라는 도시 그 자체였다.

"그때가 좋았지. 군인이 얼마나 많았는데. 지금은 하루에 한 명 찾기도 어려운데 그때는 군인들 천지였지."

"그때가 좋았지. 군인들 많으니까 돈도 많이 풀리고. 그때 진해가 진짜 진해였지."

10년 전 황정덕 선생은 여좌천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었다.

"진짜 지 이름을 불러야지 여좌천이 뭐야? 한내(큰 냇물)가 지 이름이야. 여좌천은 진해중·고교 앞에 흐르던 천이야!"

▲ 진해내수면 환경생태공원의 아줌마들은 가을을 닮았다. /이일균 기자

여좌동 또 하나의 명물이 '진해내수면 환경생태공원'이다.

여좌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정문과 만난다. 10년 전 내수면연구소 시절에는 아침에만 잠깐 개방하던 것을 지금은 아예 공원으로 만들어 계절별로 오후 5∼7시까지 개방한다.

저수지를 포함해 4만9700여 평, 1∼2시간 호젓하게 산책할만한 숲속 길이 펼쳐졌다.

내수면양식연구센터라는 기능에 맞게 양식·고유·멸종위기 어종 등 40여 종의 물고기가 저수지를 노닌다.

거기서 나는 진짜 '가을'과 만났다.

계절도 가을이지만, 인생의 가을을 말하는 50∼60대 아줌마들 수다를 들을 수 있었다. 정겨운 장면이었다.

◇'체리힐가든'

여좌천 너머 환경생태공원 쪽 동네는 옛 지명이 '여명'이었다.

날이 밝아올 때의 희미한 빛.

동네 분위기가 그 말처럼 고요하고, 정갈하다.

여명1길에 있던 '체리힐가든'에는 10년 전 미국인이 산다고 했었다. 맞은편 군사시설인 '미군고문단'에 근무하는 미국인들.

"지금은 한국사람이 살아요. 그래서 '조선빌라'라 카지."

60대? 아니, 70대?

자신을 '퇴역군인'으로 소개한 분이 그렇게 설명했다.

"미군들도 많이 줄었지예. 거의 다 관사 안에 살고. 예전에는 부대 앞에 미군 상대 옷가게들도 많았는데 지금은 없어요."

이분도 여좌천 어르신처럼 진해의 군사기능 약화에 대해 말했다.

"예전 함대사령부가 여기 있었지예. 지금은 평택, 묵호, 부산으로 분산됐고, 진해에는 아무도 없지예. 작전사령부도 부산으로 가고…"

그렇게 말하는 어감은 앞서 여좌천 어르신과 달리 쓸쓸하지 않았다.

담담했다.

햇볕이 남은 오후 집 앞 벤치에 앉아 손톱 손질을 하는 자신의 행동처럼.

...

어떻게 하랴.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이 생멸하는 것을….

부대 뒤편 '우등산'은 그 과정을 다 지켜봤겠지.

다시 골목산책.

이번에는 여명로 쪽이다. 소방도로로 큼직큼직하게 구획된 동네에서 골목은 더 이상 깊어지지 않는다.

골목 한쪽 대문에 붙은 달셋방 안내장이 정겹다.

▲ 진해 여좌동 미군고문단 앞 원에이숍. /이일균 기자

추신 하나,

퇴역군인의 설명 중 틀린 게 하나 있었다.

미군부대 앞 옷가게가 하나도 안 남았다는 말.

왜?

'ONE A'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영문 점퍼·파카·군복·트레이닝복이 10년 전 위세보다는 좀 더 수그러든 모양새로 가게 안에 진열돼 있었다.

▲ 2006년 9월 11일 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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