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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에세이 - 그녀 이야기

이별 뒤 나를 위해서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대학 때 만나 6년 사귄 사람
그녀만 취직하며 점점 멀어져
헤어지고 그 시간 허무했지만
원망 같은 부정적 감정 버려

시민기자 황원식 webmaster@idomin.com 2018년 11월 21일 수요일

공시생 시절에 사귀던 사람이 있었다. 대학 때 처음 만나 내가 30대 초반까지 인연이 이어졌다. 낮에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저녁에 가끔 그녀와 데이트를 하였다. 대학 때는 아무 문제없었는데, 졸업 후 그녀가 취직하면서 점점 거리감을 느끼게 되었다.

밤에 전화를 하면 자주 회식을 한다고 하였다. 화장을 예쁘게 하고, 치마를 입는 날이 많아졌다. 대학 때는 관심도 없었던 향수도 뿌리기 시작하였다. 연락이 안 되는 날도 있었다. 솔직히 누구를 만나 뭐하고 다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난 그녀에게 더 좋은 것을 사주기 위해서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거의 매일 아침 그녀의 직장까지 차로 데려다주었다. 그녀에게 시간과 돈을 많이 뺏겼다. 그녀는 갈수록 더 빛났고 나는 초라해졌다.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가진 장점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대학생 때는 밥이라도 많이 사줬지만, 이젠 그녀도 직장인이고 비싼 밥도 잘 먹고 다닐 것이다. 그녀와 만나기 1시간 전부터 오늘은 무엇을 그녀에게 자랑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답이 잘 나오지 않았다. 나는 무기력하게 도서관에서 공부를 할 뿐이다. 공무원에 합격만 한다면 이 모든 상황이 바뀔 것이다. 그래서 내겐 오로지 그 희망밖에는 없었다.

저녁에 매일 갔던 장소를 드라이브하며 참 많은 시간을 보냈었다. 그때 봤던 예쁜 풍경들이 지금 내게 어떤 의미였을까? 멋진 야경이 낯설고 편안하지 않았다. 그때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영화? 음악? 나와 그녀의 친구 이야기? 그런 대화가 다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내 인생에서 가장 중독적이고, 나른하고, 허무한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서 보면 과거의 모든 장면들이 다 의미가 있었다고 믿는다. 틈 날 때마다 과거를 여행하며 그때의 의미들을 퍼즐 맞추듯 찾곤 한다. 하지만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그녀와 함께했던 그 허무했던 조각들의 자리를 완전히 찾지 못했다. 내 인생의 공백처럼 기록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만약 그 시간에 공부를 열심히 했다면 공무원 시험도 합격하지 않았을까? 그 시간에 책을 읽었다면, 그 시간에 그녀 이외의 다른 곳에 몰두했더라면 인생의 한 획을 그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경쟁자들의 모든 관심이 공무원 시험 공부였는데 내 관심은 그녀였다. 내가 만약 천재였더라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사실관계의 문제가 아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무질서하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의 인과응보는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삶에 질서가 없다는 것은 우리의 착각이다. 삶의 지혜라는 것은 결국 이 세상이 사필귀정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녀를 만날 때마다 뇌하수체에서 나오는 도파민이나 세르토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내게서 그런 느낌을 전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대신 그녀는 물리적, 물질적인 이득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더 유리한 거래였을 수도 있다. 이 비정상적인 계약 관계는 결국 끝이 났다. 그녀의 의심스러운 행동을 내가 계속 추궁하자, 귀찮다는 듯 그녀는 다른 남자가 있다고 말하였다. 그 후 나는 그녀에게 진심을 다해 결혼하자고 하였다. 그녀와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내 인생은 어찌되든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내 제안을 거절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그녀는 나와 계속 연락하고 싶어 했으나 그 선에서 내가 끈질긴 6년의 시간을 끝냈다.

그녀를 미워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녀를 미워하면 시험에 떨어진 모든 것이 그녀 탓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고, 그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만약 그녀를 원망한다면 그 시간은 내가 그녀를 만났던 시간보다 훨씬 더 길 것이다. 어쩌면 평생이 갈 수도 있다. 그 시간 동안 나 자신을 파괴함으로써 그녀에게 복수하려 들 것이다. 내가 어떤 짓을 할지 모를 것이다. 부처님께서 부정적 감정에서 벗어나라고 했던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발목을 잡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미워한다면 앞으로 내가 어떤 일을 해도 그녀에 대한 미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나는 그녀를 미워하면 안 되었다. /시민기자 황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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