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때 묻은 책장 사이 지역 문화·역사 켜켜이
단순히 책 사고파는 공간 아닌 '기록 보관소'…도내 활성화 움직임 시급

헌책은 단순히 낡고 오래된 책이 아니다. 이슈 중심의 베스트셀러와 시류에 따라 기획된 책들이 주를 이루는 온·오프라인 대형 서점과 분명히 다른 맛이 있다. 헌책방에는 획일성을 탈피한 다양성이 존재하고 사람과 삶, 흔적이 공유한다. 개중에는 분명히 후세까지 전할 수 있는 소중한 지식과 축적된 문화와 경험이 있다. 나아가 지역의 문화콘텐츠를 재탄생시킬 수 있는 지역 자산으로서 가치 또한 내포돼 있다.

지역에는 얼마 남지 않은 헌책방이 있다. 헌책방을 활성화하고자 크고 작은 활동이 이어지는 타지역처럼 경남 도내에서도 소멸해가는 지식, 문화유산을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 고민하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유로, 또한 밀집도가 낮다는 이유로 무관심으로 일관하기에는 그 가치가 작지 않다. 단지 오늘날 헌책방 주인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대를 이으려고 하지 않는 후손들과 먼 훗날 후손에게 남겨 줄 유산으로서 그 가치를 안다면, 신간을 살리고자 하는 관심 일부라도 뚝 떼어 낼 수 있다. 중요한 건 헌책에 대한 관심이고 헌책방을 살리고자 하는 의지다.

◇"동네 헌책방은 지역 문화의 마지막 버팀목" = 헌책방에는 새로 나온 책을 비롯해 관공서 비매품, 보고서, 개인문집, 옛 교과서 등 다른 데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것들이 차고 넘친다. 다른 데라 함은 역시 대형 오프라인 서점과 중고서점이다. 헌책의 가장 큰 매력은 희귀본과 절판본, 초판본이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신기함을 넘어서 자료적 가치가 있는 책들이다. 희귀고서만이 꼭 가치가 있는 건 아니다. 외면받은 책 중에는 누군가에게 숨은 기록을 찾아내고 잊힌 추억을 되살리는 소중한 역사로 발현되기도 한다. 헌책방 주인들이 하나같이 강조한 문화의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담는 보물 창고인 셈이다.

헌책방이 하나의 문화적 자산이라는 인식을 전환한 단적인 예가 있다. 앞서 보도된 기사에서 소개한 바 있는 '공씨책방'이다. 1972년 경희대 앞에서 처음 문을 연 국내 1세대 헌책방으로, 서울시는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했다. 서울미래유산 가운데 유일한 헌책방이다. 헌책방이 그냥 개인사업자가 아닌 그 마을 문화를 이루는 밑바탕이자 지역 문화의 실핏줄과 같다는 대목을 인정한 것이다.

서울미래유산은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지만 미래세대에게 전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유산을 보존하자는 취지다. 동네 헌책방이 서울미래유산으로 뽑힐 수 있었던 까닭은 오래된 헌책방의 방대한 중고서적과 수십 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운영자의 해박한 지식 즉 '내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화민 공씨책방 대표와 함께 책방을 운영하는 남편 왕복균(61) 씨는 책상 밑에서 200년 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서경을 조심스럽게 꺼내며 오래된 헌책방의 보존 필요성을 강조했다.

"책은 사라지지 않는다. 100년 지나도 지키고 보존해야 할 책이 있다. 도서관, 박물관, 문학관에 있어야 할 책이 헌책방에 있다."

지역에도 공씨책방처럼 오래된 책방이 있다. 창원 창동예술촌에 있는 영록서점이 그렇고 진주 소문난서점과 형설서점도 수십 년간 지역에 터를 잡고 헌책방 살림을 잇고 있다. 진주에서 소소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조경국(45) 대표는 동네 헌책방이 문을 닫아서는 안 되는 이유로 지역성을 내세웠다.

그는 동네 헌책방을 지역에서 만들어진 책들이 폐기되기 전 다시 한 번 머무를 수 있는 '마지막 보루' 같은 곳으로 비유했다. 조 대표는 '숨겨진 비밀을 찾기 위하여' 부제를 단 <어린이의 그림>이라는 빛바랜 책 한 권을 손에 쥐며 동네 헌책방이 지역에서 지니는 의미를 설명했다.

"1959년 경남학생화연구회에서 만든 일종의 잡지 같은 책이다. 당시 선생님들이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통해 개인 성격과 특성을 연구한 자료다. 지역의 역사, 교육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한테 중요하다. 대형 온라인 서점에서는 지역성이 짙은 이런 자료를 받아 주지 않는다. 동네 헌책방은 우리 지역에 관련된 자료가 나오면 버리기보다 우선으로 보관하고자 한다. 동네 헌책방이 지역 아카이브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지역과 관련된 책이면 판매 목적보다 소장 가치로서 보관하고 있다는 조 대표는 특히 그가 나고 자란 진주에 관련된 책은 무조건 수집하고 보관한다. 동네 헌책방은 지역 문인이 쓴 책과 지역 출판사에서 낸 책에 다시 한번 숨결을 불어넣는 마지막 문화적 버팀목인 셈이다.

헌책방이 단순히 낡은 책을 사고파는 곳이 아니라 그 도시와 지역의 문화와 역사가 축적된 공간이라고 정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의 기록이 모여 있는 작은 박물관 같은 공간이다.

▲ 부산 보수동 한 헌책방에 '사람이 만든 책보다 책이 만든 사람이 더 많다'라는 문구가 걸려 있다. /문정민 기자

◇중요한 건 헌책에 대한 관심과 활성화 의지 = 일부 지역의 헌책방거리는 관광콘텐츠로서 재조명되면서 부활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각 지자체도 발 벗고 헌책방 구원투수로 나섰다.

앞서 기사에서 언급했듯이 쇠락의 길을 걷는 부산 보수동과 서울 청계천 헌책방을 살리고자 크고 작은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각종 문화 축제로 헌책방을 홍보하고, 대학생들도 헌책방 지킴이로 나섰으며 헌책방 단골들은 헌책을 매개로 뭉쳤다.

안타깝게도 고령화와 경영난으로 기존 상인이 내몰리는 현상을 막지 못하는 실정이다. 중요한 건 헌책의 가치에 주목하고 헌책방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계속 노력한다는 것이다.

도내에서는 지자체든 단체든 개인이든 헌책의 가치에 주목하고 헌책방을 살리고자 하는 지속적인 움직임을 찾아볼 수 없다. 신간서적을 파는 동네 책방도 어려운 판에 몇 안 되는 헌책방은 왜 살려야 하는지에 의문을 먼저 제기한다. 지역 서점을 살리는 정책에서도 밀려나 있다. 부산, 서울의 헌책방과도 경계를 짓는다. 한 곳에 밀집됐기에 지역의 상황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공간이 갖는 특성은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헌책방을 살리고자 하는 이들이 주목한 건 어찌 됐든 헌책방 그 자체가 갖는 의미와 가치다. 헌책방을 살리고자 하는 활동이 헌책방거리에만 국한되지 않는 까닭이다.

지역에서 헌책방 살림을 잇는 이들이 많지 않다. 문제는 이대로 가다가는 결국 지역 헌책방의 명맥이 끊긴다는 거다.

▲ 서울 공씨책방. 이곳은 2013년 서울미래유산에 선정됐다. /문정민 기자

공씨책방을 운영하는 왕 씨는 "지자체 관심과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헌책방을 살릴 수 있다. 다 살리자는 게 아니다. 오래된 헌책방을 선별해 활성화하는 방안을 마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미래유산인 공씨책방마저 높은 임대료에 밀려 문 닫을 위기에 처하면서 다른 곳으로 이전해야 만 했다.

개인적으로 헌책방을 활성화하는 움직임도 있다. 부산 대우서점 대우독서회원인 박경자 구포도서관 사서는 대우서점과 연계해 함께 지난 몇 년간 지하철 도서교환전을 열기도 했다. 역시 대우서점과 인연이 깊은 한 초등학교 교사는 책방골목 인근 학교에 근무하던 당시, 매주 아이들에게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특정 주제 책 찾기, 책방 주인 인터뷰 등 미션을 주면서 헌책과 친해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하지만, 이 역시 오래가기 어려웠다. 결국 행정기관 혹은 관의 힘으로 헌책방이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을 마련해야 한다. 매년 헌책 축제와 판매를 도모하는 행사를 마련하는 서울도서관은 '서울시 책방지도'를 만든 바 있다. 번화가에 있는 대형 서점은 알아도 집 근처 동네 책방과 헌책방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서울도서관 홈페이지에는 지역별로 동네 책방을 검색할 수 있는 코너를 따로 만들기도 했다. 물론 일회성 홍보로 아쉬움과 현실적인 간극은 있다. 그 간극을 좁히는 것 또한 지자체의 노력에 달렸다.

이정수 서울도서관장은 "공적인 영역에서 헌책방을 지켜야 한다는 바람이 크다. 행정기관과 민간이 함께 협력차원에서 헌책방을 살리기 위한 고민을 하고 대안을 찾고자 노력하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고 밝혔다.

지역에서도 헌책방에 대한 관심이 있다면, 얼마든지 신간 서적과 더불어 헌책을 살리기 위한 활동을 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끝>

※ 이 취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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