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군역 면하려 신분 세탁 유행
고학력 갈구하는 현대인과 닮아 있어

조선 후기 숙종 때인 17세기 경상도 단성현(현 산청군)에 수봉이라는 노비가 살았다. 1678년 그곳 양반 심정량의 호적에 기록된 내용이다. 1717년 호적에 따르면 수봉 본인과 가족 모두 더 이상 노비가 아니었다. 나라에 곡식을 바치고 '통정대부'라는 직역을 얻었다는 기록이 그 증거다. 평민이 된 수봉은 당장 성씨를 마련했다. 성은 '김'으로 본관은 '김해'로 정했다. 자녀들에게 성씨와 함께 신분까지 물려주게 됐으니 얼마나 보람이 컸을까. 그러나 김수봉을 시조로 하는 김해 김씨 집안은 평민 정도에 만족할 수 없었다. 평민은 고달프기 짝이 없는, 난리가 나면 총알받이로 앞장서야 하는 군역을 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이란 나라에서 군역을 면하는 유일한 길은 신분을 한 단계 더 높여 '양반'이 되는 것이었다.

수봉의 증손자 김아무개는 증조 때부터 물려받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마흔한 살 되던 때인 1780년 마침내 양반 신분을 나타내는 '유학(幼學)'이라는 직역을 얻었다. 유학은 관직을 갖지 못한 일반 양반을 가리킨다. 평민 신분을 호적에서 확인한 때부터 계산하면 불과 63년 만에 이뤄낸 쾌거였다. 그러나 무슨 곡절이 있었는지 3년 뒤 김아무개는 다시 평민의 직역으로 떨어진다. 양반들의 견제가 그만큼 심했다는 뜻 아닐까.

양반가를 향한 김씨 가문의 꿈은 19세기 중엽에 마침내 이뤄진다. 그때가 되면 수봉의 후손들 대부분 호적에서 '유학'이라는 직역이 발견된다. 1831년에서 1867년 사이에 등장하는 수봉의 5세손과 6세손이 맹활약한 덕분이었다. 수봉이 노비를 면한 지 약 200년 만에 양반가로 변신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로써 집안 식솔들은 군역에서 자유로운 세상을 맞이했다. 상세한 내용은 권내현이 쓴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을 참고하시길.

문제는 당시 신분상승을 이뤄낸 경우가 수봉 가문뿐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수봉의 근거지 도산면 남자들 중 17세기에 양반은 약 10%에 불과했지만 19세기 중반이 되면 70%에 육박했다. 게다가 일하지도, 군역에 부름을 받지도 않는 양반들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그 신분을 떠받쳐야 하는 평민과 하층민의 구조가 극도로 취약해졌다. 수봉 가문이 양반가로 변신한 뒤 불과 30년 뒤에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난 것을 우연이라 할 수 있을까?

지난 12일 서울 숙명여고 시험문제·정답 유출 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교무부장인 아버지에 의해 실제 문제가 유출됐다고 결론 내리고 쌍둥이 딸들도 포함해 기소 의견으로 수사결과를 검찰에 넘겼다. 이 사건은 한동안 신문 지면과 저녁 뉴스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며 온 나라를 분노에 들끓게 했다. 냉정하게 따져 일개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성적 조작 사건이 과연 나라 전체를 뒤흔들 만큼 뉴스 가치를 가진 걸까. 남북 문제, 국제 문제보다 이 문제에 나라 전체가 더 분노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대한민국은 더 이상 신분 사회가 아니라지만, 실제로도 그럴까? 대졸 학력 아니면 어디 명함 꺼내기도 어려울뿐더러 임금에서도 여전히 차별받는 사회라면, 학력이 곧 신분인 사회, 대졸은 돼야 양반 대접받는 사회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200년에 걸쳐 노비에서 양반으로 눈물겨운 신분 상승을 도모했던 수봉 가문의 모습과 내신 조작 사건에 공분하면서 한편으로는 더 높은 학력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의 우리 모습이 과연 얼마나 다를까? 나아가 모두가 대졸자이기를 원하는 사회, 명문대가 됐든 유학파가 됐든 기왕이면 '어엿한 대졸자'를 더 떠받드는 사회는 과연 그 건강성을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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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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