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 도화선 된 학생 시위
역사 바로세우기 차원 노력 필요

'3·15의거정신'은 마산의 얼이요, 마산의 정신이며, 마산의 혼이다. 처음,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시위는 실내에서 성명서를 내는 정도로 마산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다수 발생하였지만, 자유당 정권은 시시하게 보고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이를 보다 못한 마산시민들은 정부 차원의 조직적인 부정선거 투개표는 무효라고 함성을 지르며 개표장을 비롯한 시가지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이들을 공산 불순세력으로 몰아 불법 체포하는 등 무리수를 썼다. 이를 지켜보던 마산 시내 8개 고등학교 전 학생들은 경상도 사람 특유의 의분으로 떨쳐 일어나 스크럼을 짜고 시가행진을 벌이는 등 조직적인 데모에 나섰다.

어린 학생들의 분기로 힘을 얻은 마산시민들의 수효 또한 급격히 늘어나 급기야 경찰은 발포 명령까지 내림에 따라 초유의 유혈사태로 번지게 되었다. 수일 후 4월 11일에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르자 이에 흥분한 시민들과 학생들은 사생결단으로 투쟁을 벌였다.

이 같은 마산에서의 3·15의거가 도화선이 되어 4·19혁명이 일어난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고, 3·15의거에 참여한 8개 고등학교 학생들의 공로가 큰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다.

이후 정부는 4·19를 전후한 민주화운동은 모두 4·19혁명에 포함해 법을 만들었다. 따라서 3·15의거는 4·19혁명에 포함되어 이름조차 사라진 실정에 있었다.

3·15의거 기념일은 경상남도 기념일로 방치되고 있던 차에 3·15의거기념사업회장의 부탁으로 본인이 당시 이명박 대통령에게 건의하고 또 4·19혁명동지회 이기택 회장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하여 동의를 받고 2010년 국가기념일로 제정 공포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산 3·15의거'라는 명칭이 도시 이름 '마산'과 함께 사라지고 '창원(마산) 3·15의거'라 불리는 실정이다. 또한, 당시 시위를 벌였던 마산 시내 8개 고등학교 재학생들에 대하여는 사상자를 제외하고는 머리칼 한 올만큼의 예우도 없는 실정이다. 오늘날, 그들 8개 고등학교 학생들은 70대 후반의 노인이 되어 스스로 '사단법인 3·15의거학생공로자회'를 조직하고 매년 회비를 갹출, 기념식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사무실 한 칸 없이 전셋집을 전전하고 있고, 심지어 '3·15의거 기념관'에서 3·15의거와 관련한 행사를 치르려 해도 보훈처에서 인정하지도 않는 단체라는 이유로 창원시조례에 의거 사용료까지 내야 하는 실정이다. 3·15의거 유공자가 3·15회관을 사용하는데 사용료를 내야 한다니. 이런 현실은 개선되어야 한다. 정부는 법률을 개정해서 '마산 3·15의거'를 4·19혁명에서 분리해 표면에 내세워야 한다.

3·15의거는 국민적 민주화운동의 효시로 4·19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별도로 분리되어야 한다. 경남도를 비롯한 지방 정치권에서는 정부와 중앙정치권의 조치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 자체에서 '역사 바로세우기운동'을 벌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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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후인 2020년이면 3·15의거 60주년이 된다. 그때까지 정부는 '사단법인 3·15의거 학생공로자회'를 국가유공단체로 지정하고 마산 앞바다 신 매립지에 3·15의거 추모공원을 설립함과 동시에 그곳에다 3·15의거 '추모의 벽'을 세워 당시 참여한 8개 고등학교 전 학생들의 이름 석 자라도 새겨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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