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위, 유치준 관련 현장조사
박홍기 씨 당시 상황 증언
"죽음과 관련된 일 있었을 것"

부마항쟁진상규명위가 경찰 진압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유치준 씨와 관련해 현장조사를 했다. 동행한 박홍기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는 유 씨가 숨진 채 발견된 산호동에서 경찰 진압이 매우 강했고, 사망과 관련성이 높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무총리 소속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이하 진상규명위)는 지난 14일 오후 유치준(사망 당시 51세) 씨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옛 마산시 산호동소재 새한자동차 마산지사 앞 노상(현 마산용마고 총동창회관 앞 도로) 등에서 현장조사를 했다. 1979년 10월 18∼20일 부마항쟁에 참여하면서 산호동 일대를 다녔던 박홍기(66)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가 현장조사에 동행했다.

▲ 박홍기 씨가 지난 16일 부마민주항쟁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박 씨는 경남은행 산호동지점 맞은편 쉐보레 마산한일전시장 쪽에서 100여 명으로 보이는 경찰의 움직임을 봤다고 말했다. /류민기 기자

박 이사는 1979년 10월 18일 오후 6시 40분께부터 마산 남성동 제일다방 앞에서 오동교, 산호동 용마맨션, 양덕파출소를 거쳐 다시 산호동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박 이사는 이날 산호동에 있던 박종규 공화당 의원 사무실이 파손됐으며, 일부 시위대가 박 의원 사무실 현판을 떼어내 불태웠다고 했다.

박 이사는 이날 오후 8시 30∼40분께 경남은행 산호동지점 사거리에서 경찰 100여 명을 봤다고 했다. 옛 마산경찰서가 작성한 1979년 10월 18일 경찰 배치 현황 실황조사서에는 오후 7시 58분 산호동 용마맨션 앞에 경찰 109명을 배치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8시 10분께 양덕파출소 앞 56명, 8시 18분께 산호파출소에 50명을 배치한 것으로 돼 있다.

박 이사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다름없는 존재이면서 마산 실세였던 박종규 의원 사무실이 훼손되자 경찰이 더 강압적으로 대처했을 것"이라며 "제복을 입고 곤봉을 손에 든 경찰이 길 건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도 이때 유치준 씨 죽음과 관련된 일이 있었을 것 같다"고 말했다.

1979년 10월 18일 유 씨는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고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고 나서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유 씨는 이튿날(1979년 10월 19일) 오전 5시께 숨진 채 발견됐다. <부마민주항쟁 10주년 기념 자료집>에는 경찰 자료를 바탕으로 변사자 기록이 '정황으로 판단, 타살체가 분명'이라고 돼 있다.

하지만, 진상규명위가 지난 2월 내놓은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보고서(안)'는 객관적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유치준 씨 사망 관련성을 인정하지 않아 유족과 관련단체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지난달 진상규명위는 유 씨와 관련해 현장조사를 하려다 취소하기도 했다. 당시 조사관은 공식 조사가 아닌 사전답사였다고 해명했다.

진상규명위는 지난 7월 관련 단체 동의를 얻어 1차 수정·보완된 진상조사보고서를 조건부 채택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재조사하기로 했다. 지난달 5일 45차 본회의에서도 6개월 이내 보완하기로 했다.

이와 관련해 조사 권한 강화와 기한 연장 등을 담은 부마민주항쟁법 개정안은 국회에 계류된 상태다. 진상규명위 한 조사관은 "법 개정이 공감대를 얻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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