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치 <동아일보>의 기사 <위안부 할머니 또 별세 / 올들어 6명…27명 남아>라는 제목 중 '남아'라는 낱말이 유다르게 내 시선을 끌었습니다. 순간 상상이지만 결코 상상일 수가 없지 싶은 일본의 혼네(本心) 쪽으로 의심이 쏠리며 떠오른 게 있었습니다. 그건 '불감청이언정 고소원'과 '회심의 미소' 바로 그 말들이었습니다. 일본의 꿍꿍이 속셈은 <결국엔 하나도 안 '남게' 될 거야. 그 잉여의 잇속은 보나마나 우리 일본 것이지> 하고도 '남았을' 게 너무도 뻔히 보였습니다.

지난달 26일 별세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하점연(향년 97세) 할머니의 부음 기사를 보다가 문득 서두의 '남아'의 '아'에서 점 하나를 지운 '남이' 즉 마산 출신 일본군 위안부로 캄보디아를 떠돌다 고국을 찾고, 가정도 꾸려 살다 별세한 '훈' 할머니가 떠올라 콧등이 찡했습니다. 일본의 잇속으로 '남아' 있잖아준 탈(脫)잉여 그 '남이-훈' 할머니가 새삼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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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테' 그 망각의 강물

'므네모시네' 그 기억 강물

망각 팔아야만 이익 '남는'

장사에 이골난 일본이여

'망각'에

위안부나 끼워 파는

그 상술을 '기억'은 웃노라.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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