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혈관처럼 퍼진 '특화된 고서점' 책벌레 성지 만들다
일본 도쿄 진보초 내 2㎞ 구간
유서 깊은 헌책방 150곳 성업
연맹 조직 결성·인터넷 판매…
주인장들 끊임없는 노력 '결실'

출판대국인 일본은 전 지역에 걸쳐 헌책방이 산재해 있다. 옛 수도인 교토는 물론 오사카, 고베, 후쿠오카 등 도심 속 중심상권에서도 쉽사리 밀리지 않고 존재감을 이어간다. 특히 도쿄의 간다 진보초에는 유서 깊은 헌책방들이 한데 모여 세계 최대규모의 고서점가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진보초에 밀집된 헌책방들은 100년이 넘는 세월을 흔들림 없이 관통했다. 켜켜이 쌓인 시간의 더께만큼 헌책의 가치 또한 무게감을 더했고, 헌책방의 위상은 더욱 공고해졌다. 언제 스러질지 모를 불안한 미래를 안고 그저 버티는 날들이 많은 우리나라의 헌책방과 다른 모습이다.

일본에서 헌책이 하나의 문화·관광콘텐츠로 자리 잡고, 헌책방이 활성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실 한 가지로 귀결되지 않는다. 서점 환경과 문화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복합적인 이유 가운데 그래도 주된 요인 한 가지를 꼽자면, 헌책방 주인들의 자구 노력을 들 수 있다. 책방 주인들이 주축이 돼 축제를 기획하고, 인터넷 판매를 도모하는 등 상생과 경쟁을 통해 키운 자생력으로 헌책 문화를 길러내는 것이다.

▲ 일본 도쿄 진보초 헌책거리 한편에서 시민들이 책을 읽고 있다. /문정민 기자

◇진보초, 세계 최대 헌책방거리로 거듭나기까지 = 도쿄 중심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진보초에는 약 2㎞에 걸쳐 고서점가를 이루고 있다. 헌책만 다루는 서점이 150여 곳에 달한다. 신간을 파는 서점을 합치면 그 수는 200곳 가까이 된다.

이 지역에 헌책방들이 들어서게 된 배경을 찾다 보면, 메이지(明治)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니깐 130여 년 전부터다. 당시 일본은 근대 신학문을 배우고자 신식 교육기관이 만들어졌다. 도쿄에는 메이지대학, 도쿄대학 등이 차례로 세워지면서 대학촌이 만들어졌다. 자연스레 책의 수요도 많아졌다. 대학 근처에 서점과 출판사, 인쇄소가 들어서면서 진보초 중심으로 헌책방도 하나둘씩 문을 열었다.

▲ 진보초 헌책거리에는 150여 개 고서점이 밀집해 있다. /문정민 기자

이런 역사를 배경으로 생겨난 헌책방은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같은 자리를 지키며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역사적 배경을 따지면 전쟁의 피해를 비켜간 덕분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도쿄는 연합군의 공습으로 초토화되었지만, 진보초 부근만 온전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살아남은 서점가는 '세계 최대 헌책방거리'라는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명성을 좇아 찾은 진보초 거리는 헌책방이라면 으레 떠올리는 낡고 퇴색한 느낌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책들로 빼곡히 둘러싸인 풍경은 한국과 다를 바 없지만 오래된 건물은 고색 짙은 분위기가 두드러졌다. 화려한 도심 가운데 그윽한 묵향이 깃든 느낌이다.

눈에 띄는 또 다른 점은 각각 특정한 분야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헌책방마다 전문 주제에 맞는 책들로 채워졌다. 크게 나누면 문학, 역사, 철학, 예술 등으로 쪼갤 수 있지만 그 분야가 너무도 세분화, 전문화돼 있다. 문학 가운데도 영문학, 중국문학만 따로 취급하거나 고지도, 미술, 사진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서점도 있다.

헌책방 거리는 학술적이고, 철학적이며 예술적인 책에서부터 대중적인 잡지, 만화까지 아우른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큰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이곳에 오면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한 전문서점 하나 정도는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는 게 괜한 말이 아니었다.

◇헌책방 주인들 힘으로 지킨 오늘 = 헌책방들이 오랜 기간 자신만의 색깔을 유지하며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헌책방 주인들의 노력이 컸다. 세계적 축제로 거듭난 진보초 고서 축제도 그러한 노력과 맥을 같이한다.

고서축제는 올해 59년째 이어질 만큼 역사가 깊다. 대체로 10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매년 축제가 이어지며, 이 기간에는 100만 권 정도의 헌책이 특별히 할인된 가격으로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고서축제가 행사의 포문을 열면, 신간 서적을 취급하는 서점과 출판사가 축제 말미에 합류해 그야말로 헌책, 새책 할 것 없이 '책의 축제'가 펼쳐진다.

축제는 헌책 판매뿐 아니라 작가와 만남과 강좌, 이벤트 등 다양한 콘텐츠로 채워진다. 축제 기간에는 헌책을 사고팔려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일회성 홍보나 단순한 판매행사에서 벗어난 고서축제는 세계적으로도 이름을 떨치고 있다.

▲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진보초 내 도쿄고서협동조합 건물에서 열리는 헌책 시장. /문정민 기자

고서축제는 전적으로 헌책방 주인들이 주도적으로 진행한다. 그 중심에는 진보초 헌책방거리 상인들 주축으로 결성한 칸다고서연맹이 있다. 그들 스스로 축제를 자율적으로 기획하고 추진한다. 관할청인 도쿄 지요다구 지원을 일부 받기는 하지만 비율이 높지 않다. 지요다구 또한 행사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팔길이 원칙'을 적용했다.

연맹은 매년 발행하는 가이드북 판매 비용과 광고 수익 그리고 자체 회비로 부족한 축제 비용을 충당한다. 헌책방 주인들이 힘을 합쳐 상생과 공유를 통해 경쟁력을 키우고 공동브랜드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독서량이 세계적으로도 높은 일본이라 할지라도 역시 시대 변화에 따른 독서량이 떨어지는 등 책 문화가 예전 같지는 않다. 대형 중고서점 프랜차이즈 북오프(Book-off) 영향과 스마트 기기에 밀려 독서 인구는 점차 줄어들었다. 그보다 위협적인 건 인터넷이었다. 한국과 같이 인터넷으로 다양한 정보를 접하면서 종이로 된 책을 찾지 않기 시작했다.

역설적이게도 일본 헌책방은 이러한 어려움을 인터넷으로 돌파하고 있다. 전국고서적협동조합을 조직해 원활한 헌책 수집과 운영 체계를 마련했다. 브랜드화된 진보초 헌책방 이외 자칫 시류에 휩쓸릴 지역 헌책방을 살리려면 새로운 판매처가 필요했다. 그것이 1996년 조합이 만든 인터넷 판매 사이트다. 현재 조합에 등록된 회원 중 인터넷 사용을 안 하는 경우가 거의 없을 정도라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진보초 내 도쿄고서협동조합 건물에서 열리는 헌책 시장도 상인들 스스로 마련했다. 조합에 가입된 헌책방 상인들은 필요한 책을 도매로 사고팔 수 있는 시장을 형성해 지속적으로 열고 있다. 특정 날을 지정해 일반인에게 개방할 만큼 활성화돼 있다.

인터넷 판매와 헌책 시장은 헌책방을 유지하는 토대를 마련했고, 서점이 줄어드는 속도를 둔화시켰다. 헌책방이 문을 닫는 와중에도 새로 헌책방 하겠다는 사람이 생겨나는 이유다. 헌책방에 닥친 위기를 상인들 자력으로 타개하고 있는 것이다.

도쿄도고서적조합에서 홍보를 담당하고 있는 오바나호코(42) 씨는 "헌책은 역사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옛 사전 같은 경우 언어의 변천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료나 책이 없어지면 옛것을 알 수 있는 수단이 없어지는 거다. 어떤 특정 분야에서 개인 박물관 혹은 미술관이라고 생각한다"며 "헌책방을 살리려면 어느 정도 관의 개입이 필요하지만 그게 절대적일 수는 없다. 헌책방에는 책방 주인의 철학과 사상이 담겨 있다. 그러한 특성을 살리려면 상인들 스스로 생존방식을 연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이 취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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