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일상이 행복하다는 증거
관성에 젖어 불평하기보다 '감사하는 삶'추구

다시 백수가 되었다. 공무원 시험, 사업, 연애, 결혼, 내 전공을 살린 일을 하는 것에도 실패를 하였다. 벌써 38살이다. 일을 하지 않으면 다음 달 카드값을 못 막을 것이다. 다음 주엔 나는 어디에서라도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최저 임금을 받고, 몸을 쓰고, 휴일이 거의 없는 일을 할 것이다. 내가 남들보다 뒤처졌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로는 계속 서러운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나를 떠난 사람이 생각났다. 그 이별이 이 세상으로부터 느낀 소외감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이상하다. 어릴 때에는 잦은 이별이 이렇게 아프진 않았는데…. 진짜 어른이 되고 나서부터는 작은 상처도 잘 아물지 않는 것 같다. 잘 버티다가도 한 번씩 무너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영영 이대로 아무것도 못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정말로 잘못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내가 나 자신을 놓아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밤에 부정적 생각들이 지칠 때까지 나를 흔들어놓을 때가 있었다. 그땐 법륜 스님의 영상을 끊임없이 틀어놓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내 머리맡에 항상 메모지를 놓아두었다. 나는 긍정적인 말들을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좋은 것들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 나는 친구와 빌딩 속을 걸을 것이고, 맛있는 저녁을 먹고,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와 라디오를 들을 것이다. 운이 좋은 날에는 아가씨와 데이트를 할 수도 있다. 어떤 것도 나에게 이런 즐거움을 빼앗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자유롭고 내 삶을 통제할 수 있으며, 좋은 생각을 선택할 수 있다.

시간은 지났고, 나는 도저히 회복될 것 같지 않은 우울 속에서도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할 뿐이었다. 어쨌든 난 이겨냈다. 밥을 제때 먹고, 도서관에 가고, 농구를 하고, 씩씩하게 아르바이트를 하고, 틈틈이 글도 쓰고 있다. 나는 괜찮다. 지금 웃고 있다. 내 상황과 상관없이 내가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 날, 이 사회로부터 내가 뒤처지고, 소외되었다는 생각도 내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란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나는 행복하다.

점심때 엄마가 라면을 끓여주었다. 그리고 한동안 같이 TV를 보았다. 대수롭지 않다고 여길 이 장면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이런 장면들은 세상이 행복하다는 하나의 증거이고, 이런 장면들을 부지런히 수집해야 내가 드디어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 만난 사람들과 나누었던 대화, 식사, 산책의 기억도 어느 하나라도 버릴 것이 없다. 나는 감사한 기억과 느낌을 모아서 매일 감사 일기를 적었다.

우리는 앞일을 걱정하고, 스스로를 옥죄고, 자신의 잘못이나 나태함에 죄책감을 느낌으로써 모든 것을 해결하였다. 그것은 거대한 관성이었다. 누구도 이 과정을 의심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삶에 감사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과정을 의심했다. 우리가 강제로 어떤 일을 한다고 그 일이 잘된다는 보장이 없다. 나는 그냥 천천히 내 삶을 지켜보고,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억지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긍정적인 마음에서 그 일을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인간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인간은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았다. 어차피 세상일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인간은 불안전성을 믿음으로 극복해야한다. 내가 종교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에 이미 완전한 존재(神)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그 존재에 의지할 때에만 자유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 내 몸을 한 번 관찰해보자. 우리는 의식하지 않아도 숨을 쉬고, 엄청난 물리작용과 화학작용으로 살아간다. 신기하지 않은가? 우리는 이런 사실에도 감사할 줄 모른다.

내가 만약 신(神)이라면 인간에게 서운할 것 같다. 신은 이 세상이 이미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주셨는데 우리는 우리의 불리한 점만 가지고 온갖 불평만 하고 있다. 우리가 신에게 돌려줘야 할 것은 삶에 감사하는 것이다. 행복이란 신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의 좋은 점을 보고 기뻐할 것인지, 나쁜 점을 보고 좌절할 것인지는 오직 우리의 선택이다. 우리는 손, 발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듯이 생각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시민기자 황원식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