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가뭄으로 유독 어려웠던 올해 농사
공동체 식구와 의지하며 내년 농사 기약

"누나, 멧돼지 한 번 왔다고 그렇게 속상하면 농사 못 지어." 함께 농사를 짓는 구륜이가 멧돼지가 왔다 간 생강밭을 멍하니 보고 있는 나에게 슬며시 말했다. 구륜이는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농사를 지었다. 나이는 나보다 여덟 살이나 어리지만, 농사 경험으로는 선배인 셈이다. 경험만큼 마음이 더 단단한 걸까? 속상해하는 나에게 괜찮다고, 이런 일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 했다. 구륜이 말을 이해했지만 나는 충분히 속상하고 싶었다. 겨울에 코 훌쩍거리며 모은 부엽토를 두둑에 덮어 주고 폭염에 땀 뻘뻘 흘리며 풀을 맸다. 그렇게 기른 생강인데 어떻게 괜찮기만 할까? 이런 일을 많이 겪어 보아서 덤덤해졌을 뿐이지 구륜이도 같은 마음이었을 거로 생각한다.

올해는 농사짓기가 참 어려웠다. 비가 필요한 때에 폭염과 가뭄이 심해서 작물이 잘 자라지 못했고, 오히려 비가 없어야 할 때, 며칠을 이어서 비가 내렸다. 동물은 왜 그리 많이 찾아오는지. 멧돼지, 고라니, 너구리. 길고양이까지 밤마다 우리 밭에서 잔치를 했다. 잎을 다 따먹고, 두둑에 구덩이를 파 놓고 가는 것도 모자라서, 멧돼지가 생강밭 한쪽을 뒤엎어 버렸다. 서정홍 농부 시인님한테 "멧돼지가 생강을 먹어요?" 하고 물어보았더니, "생강이 아니고, 밭에 있는 지렁이 먹으려고 그러지. 약 안 치고 좋은 거름 넣어서 농사지으니까 멧돼지도 좋은 거 알고 찾아온 거지"라고 하셨다.

내가 사는 합천 황매산 자락 산골 마을에는 '열매지기'라는 공동체가 있다. 아홉 가정이 모인 작은 공동체이다. 열매지기 식구들 모두 땅을 살리는 일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농부들이다. 제초제 대신 손으로 풀을 매고, 비닐 대신 산에서 긁은 부엽토로 멀칭을 한다. 내가 지금까지 농부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열매지기 식구들 덕분이다. 무엇보다 "삼촌, 이모"하고 부르며 어울려 지내니 시골 생활이 외롭지 않다.

해마다 11월이 되면 열매지기 식구들이 모여 생강차를 만든다. 생강차를 만들기 위해서 가정마다 생강을 70㎏ 정도 심는다. 그 생강을 함께 수확해서 차로 만드는 것이다. 올해는 생강 농사가 잘 안된 집이 많았다. 어른들은 "이거 종잣값도 못 건지겠네. 생강 심어서 고생하지 말고, 씨 생강을 잘 보관했다가 생강차를 만드는 게 더 많이 나오겠다" 하며 껄껄 웃으셨다. 생강차를 만들어 파는 일은 한 해 수입 가운데 큰 몫을 한다. 그런데도 이모와 삼촌들은 덤덤하게 말했다. "하늘이 하는 일인데 우야겠노. 내년에 더 잘 지으면 되지. 그래도 배추랑 무는 잘 자랐다 아이가. 그래서 농사짓고 살면 와르르 무너지지는 않는 기야. 안 되는 게 있으면 또 잘되는 것도 있으니까. 먹고살 것도 없이 바닥을 치지는 않으니까."

생강차 솥을 부지런히 저으며 생각했다. '농부로 경험을 쌓아 가다 보면 나도 이모, 삼촌처럼, 구륜이처럼 마음이 단단해질까?' 구륜이 말이 맞는다. 농사 한번 잘 안되었다고 이렇게 속상하면 어떻게 계속 농사를 지을까? 이모와 삼촌 말도 맞다. 그나마 고구마랑 배추 농사는 잘됐으니 말이다. 그리고 내년에 다시 씨를 뿌릴 봄이 올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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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날씨 때문에 속을 태우고, 시들어가는 작물을 보면서 끙끙 앓아도 '내년에는 이렇게 해 봐야지 저렇게 해 봐야지' 생각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년에도 농부로 살아갈 힘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생강차 만드는 일을 마치고 나니 내 안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훌훌 털어 버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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