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인정 판결
또 다른 불공정 우려 목소리 귀담아야

얼마 전에 대법원에서 병역법 위반으로 기소된 피고인들에게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여 무죄 취지의 파기 환송 판결을 하였다. 몇 달 전에 헌법재판소에서 대체복무를 인정하고 있지 않은 병역법이 잘못되었다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다. 양심적 사유로 병역을 거부하는 이들을 범죄자라고 단죄하고 교도소로 보내는 대신 그들의 그러한 양심은 병역을 거부할 정당한 사유가 되며 대체복무라는 형태로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도록 하는 시절이 된 것이다. 필자가 15년 전 사법시험을 준비할 때 단골 메뉴로 등장했던 양심적 병역거부가 드디어 추상적인 논의로서의 용어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참 오래 걸리기도 했다.필자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만 해도 교련수업이 있었다. 교련복으로 갈아입고 목제 총을 들고 운동장에 나가 제식훈련을 했다. 땡볕에 나가 무거운 목제 총을 들고 절도 있게 움직여야 했고 조금만 동작이 흐트러져도 교련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런데 같은 반 학생 중에 가족 모두가 여호와의 증인 신도인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교련 시간에 집총을 거부했고 교련선생님으로부터 정말 엄청나게 맞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렇게 갖은 체벌과 얼차려를 받았음에도 그 친구는 끝내 집총을 거부했다. 어린 마음에 그 친구가 왜 저토록 맞으면서까지 교련수업을 거부하는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때리는 교련선생님이나 그렇게 맞아도 집총을 거부하는 그 친구나 참 독하다는 생각이 앞섰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친구는 집총 거부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그것이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양심에 반했기 때문에 그토록 거부했을까. 단지 우리 종교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부모님으로부터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교련선생님은 그 친구의 행동이 양심적 병역거부와 같은 맥락이라는 인식을 하였을까. 단순히 교사의 권위에 도전하는 버릇없는 학생으로 보고 어린 학생으로부터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감정적인 체벌을 한 것은 아닐까. 지금이야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말이 일반화되어 있지만, 그 시절 교련선생님과 그 친구의 인식에 그 단어가 존재했을까.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는 판결이 나오자 많은 병역 이행자들이 반발하고 있다. 우리는 양심이 없어서 군대에 간 줄 아느냐. 사실 필자도 법률가이기 전에 군필자로서 솔직히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왜 인생에서 가장 좋은 젊은 시절, 별 이상한 인간들과 함께 내무생활을 하면서 계급에 치이며 춥고 힘든 군 생활을 했는지 억울하다는 거다. 그래 억울하다. 하지만 양심적 병역거부에서의 양심과는 무언가 포인트가 좀 다르지 않나 싶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내 가장 젊은 날을 희생한 것은 맞지만 그것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하는 그들을 교도소에 보냄으로 인해 보상받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양심이라…, 참 쉬운 듯하면서도 어려운 단어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앞으로 군대 대신 대체복무라는 형태로 병역의무를 이행하게 된다. 결국, 군대가 아닌 대체복무를 원하는 사람들의 양심을 누군가는 판단해야 한다. 과연 마음속의 양심을 타인이 판단할 수 있을까. 대법원은 검사가 판단하면 된다고 하지만 당위를 추구하는 법률가가 존재론적인 누군가의 마음, 양심의 현상을 판단하는데 적합한 직업군일까. 차라리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이 낫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제 양심도 하나의 상품이 된 것 같다. 조만간 대체복무를 위한 1:1 교습, 집중상담 학원이 등장하지 않을까. 정말 필자의 몽상으로 그쳤으면 좋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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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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