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소멸했다가…또 금세 만들어지는 감정

대학 동기 모임에 간 적이 있다. 동기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이 온다고 하였다. 그녀는 대학 1학년 때, 그러니깐 15년 전에 내가 무척 좋아했던 아이였다. 당시 여자친구와 헤어져서 한창 슬플 때 나를 진심으로 위로했던 아이였다. 우리 둘은 매일 만났고, 부산 해운대도 놀러갔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좋아하다가 내가 휴학하고 흐지부지 헤어지게 된 것이다.

다시 만난 그녀는 너무 실망스러웠다. 이미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우리 둘의 모든 상황이 다 바뀌었다. 한때 우리는 세상 누구보다 솔직하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의 감정을 조심스럽게 배려했다. 그녀는 중세의 비밀을 간직한 마법 성과 같았다. 그녀를 위해서 내 모든 걸 희생할 수도 있다고 믿었었는데….

그녀가 지금은 다른 동기와 희희덕거리며 가볍게 웃고 있다. 지금 우리는 서로에게 한 톨의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나와의 추억을 기억할까? 우리에게 그 순수하고, 어느 때보다 진지했던 순간들이 존재하기는 했을까?

참 허무하다. 그 시절 나의 애씀과 정성이 다 의미가 없다. 지금 그녀를 보니 더 못생겨졌다. 내가 왜 여기 시시한 애한테 신비감을 느꼈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그 당시의 애틋했던 감정은 90퍼센트가 내가 포장한 것이었고, 그 나머지가 그 아이의 실체였단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사랑은 진짜일까? 최근에 나의 고민은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패스트푸드점의 어린 여자들(대부분 20대 초반)이 너무 좋다는 것이다. 그녀들은 어리고 옆에 있으면 상큼한 향이 난다. 가끔씩 그 아이들이 나를 '오빠'라고 부르면 마음이 너무 설렌다. 나이가 많은 여자에게는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어느 날 나 자신을 분석하다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백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무의식적) 압박이 지나쳐 연애를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것을 안 것이다. 원래 여자를 좋아하는 내 욕망과 빨리 안정적인 자리를 잡아야한다는 압박이 갈등을 일으켜, 내 무의식은 현실적인 연애 대상을 벗어난, 연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어린 여자를 좋아하는 쪽으로 결정을 한 것이었다.

그 아이들을 보는 나의 설렘이 결국 내 상황에 맞게 조작된 것이었다. 이 세상에 이런 조작된 사랑은 널렸다. 무의식적으로 아빠와 애착이 있는 여성은 소개팅에서 만난 나쁜 성향의 남자에게 사랑을 느낀다. 혹은 부모와 갈등이 깊으면 반동형성으로 부모와 정반대 성향의 이성에게 자신도 모르게 끌리기도 한다. 내가 ○○을 좋아했던 이유도 걔가 예뻐서라기보다는, 그녀가 내 실연의 아픔을 빠르게 치료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사랑은 부모와의 갈등이 소멸하거나, 내가 안정적인 직업을 갖거나, 자기 마음의 생채기가 끝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때는 심각했더라도 말이다. 상황이 바뀌면 사랑은 쉽게 소멸했다가 또 갑자기 만들어지기도 한다.

조작된 것은 사랑뿐만이 아니다. 나의 우울, 불안, 두려움 같은 부정적 감정들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공무원 시험에서 떨어지고 기분이 안 좋았을 당시에는 이런 감정들이 내 인생에서 너무 큰 비중이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것도 결국 내가 키운 것이었고, 다 별거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상황이 바뀌니깐 그 심각했던 감정들도 쉽게 사라졌다. 그 당시의 그 우울, 두려움이 정말 미칠 듯이 우리를 괴롭혔더라도,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모든 감정을 쉽게 잊어버린다.

/시민기자 황원식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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