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영근 한 톨의 가을
쌉싸래하고도 고소한
9∼12월 제철일 때 산에 가면 발 아래 도글도글
말리고 가루 내어 찰랑찰랑 묵·쫄깃쫄깃 전으로

쉬는 날은 늦게까지 잠을 잔다. 늘어지게 자다가 점심때 즈음 부은 얼굴로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보통의 휴일이다. 그러다 언제까지 잠만 잘 수는 없지 않나 싶어서 맘을 고쳐먹고 하루는 일찍 잠에서 깼다. 그러고는 부모님을 따라 동네 뒷산을 올랐다.

나와 다르게 부지런한 부모님은 거의 매일 산을 오른다. 산을 다 오르는 것은 아니고, 산 중턱에 자리한 절에 들렀다 내려온다. 이날도 어김없이 절에 들렀다. 대웅전에서 나오는 불경 외는 소리를 들으며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대웅전 뒤 경사진 곳에 길쭉한 나무 한 그루가 섰기에, 맑은 하늘을 배경 삼아 그 자태를 조용히 감상했다.

얼마나 봤을까. 이 정도면 됐다 싶어 고개를 내리다 바닥에 떨어진 도토리를 발견했다. 도토리 실물을 본 게 언제인지 아득할 정도여서 무척 반가웠다. 매끄럽고 윤이 나는 도토리는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 도토리를 말리고 갈고 걸른 다음 끓이고 식혀 굳히는 묵 만들기.

도토리는 한 나무에서만 나는 열매가 아니다. 갈참나무, 졸참나무, 물참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열매를 통틀어 도토리라 부른다. 나무에 따라 크기 차이가 있을 뿐 도토리받침과 열매로 나뉜 모습은 같다. 가끔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사람을 보면 도토리받침이 생각나서 절로 정이 간다.

도토리는 인간 최초 주식 하나라고 한다. 신석기시대 유적인 창녕 부곡면 비봉리 패총에서 도토리 저장시설이 출토되기도 했다. 농사를 지었던 때도 도토리는 일용할 양식으로 쓰였던 셈. 예나 지금이나 쓰고 떫어서 그냥 먹기는 어렵다. 마침 절에서 도토리를 한 아름 나눠 줘 묵을 쑤기로 했다. 시간만 들이면 집에서도 먹음직스런 도토리묵을 즐길 수 있다.

▲ 도토리를말리고 갈고 걸른 다음 끓이고 식혀 굳 히는 묵 만들기.

우선 도토리를 대야에 담고 잠길 정도로 물을 부은 다음 3일 정도 둔다. 단단한 껍질을 잘 벗기려는 과정이다. 이때 떫은맛도 어느 정도 빠진다. 꺼낸 도토리는 햇빛에 말린다. 널찍한 스테인리스 쟁반에 놓고 말리면 열이 골고루 전달된다.

모두 말린 도토리를 자루에 넣어 툭툭 치면 균열이 생겨 껍질이 잘 벗겨진다. 껍질을 모두 바르고 도토리 속살만 골라 믹서기에 물을 넣고 곱게 간다. 물은 도토리가 잠길 정도면 된다. 물을 조금 더해 곱게 간 도토리 속살을 양파 망에 넣고 거른다. 이때 남은 도토리 찌꺼기는 버리지 말자. 나중에 쓸모가 있다. 이제 물에 희석한 도토리 가루를 냄비에 넣고 저으며 끓인다. 점성이 강해졌다 싶을 때 불을 끄고 한 차례 식힌다. 여기다 찬물을 붓고 하루 정도 그대로 두면 완성. 어떤 것도 넣지 않고 도토리와 물만으로 탱탱하게 굳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 도토리를말리고 갈고 걸른 다음 끓이고 식혀 굳 히는 묵 만들기.

시일이 오래 걸리는 과정이지만, 한 번 만들 때 많이 해놓으면 수시로 두고 먹는다. 직접 만들었기에 사먹는 도토리묵보다 믿음직스러운 것은 당연지사다.

이제 도토리 찌꺼기를 활용할 차례. 도토리 찌꺼기에 묵은 김치, 계란, 적당량의 감자 전분을 넣고 전을 부쳐 먹으니 별미다. 기호에 따라 부가 재료는 넣거나 빼면 된다. 이 모든 과정이 부담스럽다면 시판하는 도토리 가루를 사서 쓰면 된다. 이때 도토리가루 1, 물 5 비율로 다루면 된다.

▲ 도토리를말리고 갈고 걸른 다음 끓이고 식혀 굳 히는 묵 만들기.

집에서 해먹는 도토리묵은 약간의 떫고 쓴맛이 오히려 정감 있다. 따로 첨가하는 것이 없어서 도토리 맛을 즐기기에 그만이다. 도토리 전은 고기를 씹는 듯한 식감이 인상적이다. 더욱이 도토리는 신체 독소를 배출하는 효과가 있어 건강식으로도 좋다. 수분이 많고 열량은 적어 살을 빼는 데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뭐든 과하면 좋지 않은 법. 도토리에 든 타닌 성분은 변비를 유발한다. 게다가 탄수화물이 많아 과하게 먹는 것은 삼가자.

도토리 제철은 9월부터 12월이다. 과장 보태서 이때 즈음 산에 가면 발에 채는 것이 도토리다. 하지만, 도토리는 산짐승이나 곤충의 주식이다. 내가 주운 만큼 이들이 굶는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적잖이 속상하다. 더욱이 모든 임야에는 주인이 따로 있다. 허락받지 않은 채취는 불법이다. 그러니 먹을 만큼, 허락을 받아 이용하기를 강조한다.

▲ 집에서 만든 도토리묵·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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