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의 노략질 근절 위해 삼포 개항
말살과 제압보다 공존과 상생 필요해

대마도는 고대 신라의 영토였지만 언젠가부터 버려졌다. 우리가 버린 땅에 일본 사람들이 들어와 살더니 결국 왜구의 본거지가 되고 말았다. 왜구는 1223년 처음 기록에 나타나지만 노략질이 걷잡을 수 없게 된 것은 1350년부터다. 고려 때(1350~1392) 이미 400차례가 넘었고 1392년 조선 건국 이후 1419년까지 28년 동안 300차례가 넘었다.

대마도 정벌의 직접적인 계기는 1419년 5월 5일과 12일 충청도 비인과 황해도 해주를 왜구가 침탈한 사건이었다. 남해뿐 아니라 서해 북쪽에 이르기까지 왜구가 설치고 다닌 것이다. 이대로 두면 서울조차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조선 조정은 곧장 대마도 정벌을 결정했다. 이종무 장군은 6월 19일 마산포를 출발해 주원방포(통영 추봉도)를 거쳐 대마도로 나아갔다. 전선은 227척, 군사는 1만 7285명이었다. 정벌군은 7월 3일 개선했다.

뒤이은 3년은 군사·외교적 마무리 수순이었다. 대마도는 항복에 전제 조건을 내세웠고, 약속을 어기면 다시 정벌하겠다는 조선의 다짐이 오고갔다. 이어 1426년 제포(진해)·부산포(부산)·염포(울산) 세 곳을 열어 무역을 허락했다. 1434년 조선 백성을 지키기 위해 산 너머 육지 쪽에 웅천읍성을 쌓았고 왜인을 감시·견제하는 군사시설인 제포진이 설치된 것은 1437년이다.

전후 사정을 정리해보면 이렇지 싶다. 상대방으로부터 위험이 제기된다(왜구의 노략질). 제기된 위험을 제거한다(대마도 정벌). 제거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요구를 가능한 수용한다(삼포개항). 자신의 보호와 상대방 제어를 위한 조치를 실행한다(웅천읍성 축성과 제포진 설치). 20년 가까이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비로소 왜구가 근절되었다.

대마도 정벌의 목적이 오직 왜구 말살에 있었다면 노략질은 근절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노략질은 그들에게 생존의 문제였다. 노략질을 않고도 생존이 보장되는 방안으로 삼포를 개항해주었다. 평화는 말살과 제압이 아니라 공존과 상생 위에서 가능했다.

그렇다고 완전한 평화가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위태위태했다. 이룩하기 위해서만 아니라 유지하기 위해서도 힘을 키우고 빈틈을 메워야 했다. 힘겨운 노릇을 지겹도록 되풀이하는 과정이었다.

평화는 시공을 초월한 국가 존립의 과제이고 운명이다. 왜구의 침탈에서 벗어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의 결정판 대마도 정벌이 내년이면 600주년이 된다. 지금 우리의 처지는 어떤가! 평화라는 과제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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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를 둘러싼 복잡한 정세 속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계속되고 있다. 평화 유지는 언제나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힘이 있어야 하고 균형 감각을 갖춰야 하고 시간이 필요하고 운도 따라야 한다. 우리는 600년 전의 역사가 주는 교훈을 새겨야 하지 않을까. 대마도 정벌 600주년을 좀 더 각별하게 치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까닭이다.

출판국장 소임을 맡고 있습니다. 도서 제작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관장합니다. 학교와 현장을 찾아 진행하는 문화사업(공연··이벤트 제외)도 담당하고 있습니다. 환경전문기자로서 생태·역사 부문 취재도 합니다. 전화는 010-2926-3543입니다. 고맙습니데이~~~
[출판국에서]아무도 안 했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비춰볼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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