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적인 장면에 왜 비발디 '사계'가…
주인공이 복수하는 장면서
바이올린협주곡 '겨울'삽입
비극적 장면-아름다운 선율 대비

2004년 칸 영화제 시상식. 한국영화 <올드보이>가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는 낭보가 날아든다. 이미 한국에서 3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으니, 흥행과 작품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셈이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 <복수는 나의 것>·<올드 보이>·<친절한 금자씨> 가운데 단연 최고의 작품이라 꼽을 수 있는 <올드 보이> 신드롬은 아직도 유효하다.

◇수많은 명장면 남긴 명작 =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자'는 식의 오대수. 그는 오늘도 술에 취해 경찰서에서 밤을 지낸다. 짧은 전화 통화를 끝으로 사라져 버린 오대수가 깨어난 곳은 그로테스크한 벽지 장식의 좁은 방이다. 싸구려 여관을 연상시키는 8평 공간. 그에게 허용된 것은 TV 시청과 군만두, 그리고 잠자기다.

하얀 연기가 방안에 퍼지면서 그는 정신을 잃어버리고 깨어나면 8평 인생은 다시 시작된다. 어느 날 그는 TV뉴스로 자기 아내가 살해됐다는 소식과 자신이 살인용의자라는 소식을 접한다. 자살을 시도하지만 그마저도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기가 막힌 상황에서 이제 그는 자신이 행했던 악행들을 정리해 보기도 하고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싸움에 특화된 체력단련을 시작한다.

▲ 자신을 감금했던 이를 찾아낸 오대수.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1악장이 흐른다. /스틸컷

영화에서 15년이란 시간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무려 15년이란 시간이 흐르고서야 그는 풀려나고 복수는 그의 것이다. 우연히 들어간 일식집에서 미도를 만나고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지만 알 길이 없다. 유명한 생낙지 장면이 끝날 때쯤 그는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깨어나 보니 미도의 집이다.

그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오대수에게 연민을 넘어서는 묘한 감정을 느끼고 그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온 것이다. 이제 오대수는 감금된 방에서 먹던 만두 속에서 발견한 중국집 이름을 떠올리고 같은 이름의 중국집을 찾아다니며 만두 맛을 확인한다.

그의 인생에서 복수 외에는 어떤 것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기어이 자신을 감금했던 장소를 찾아낸 오대수. 여기서 또 하나의 명장면이 탄생하는데, 바로 '장도리 액션'이다.

오대수는 왜 그토록 가혹한 벌을 받았는지에 대한 의뢰인의 녹음된 목소리를 듣게 되는데, '오대수는요, 말이 너무 많아요'. 이게 과연 15년이나 감금돼 있어야 할 정도로 큰 죄인가? 하지만, 영화 결말에 가서는 농담인 듯 스쳐 지나간 그 말이 모든 비극의 시작점임을 간결하고도 정확히 알려준 대사임을 알게 될 것이다.

결국, 오대수는 자신을 감금한 우진을 만나고 5일 안에 자신을 감금했던 이유를 알아내는 게임이 시작된다. 성공하면 깨끗이 죽어주겠다는 우진의 약속과 함께.

어렵게 찾아낸 동창회와 모교에서 오대수는 졸업 앨범 속 우진을 찾아내고 과거 기억을 쫓는다. 우연히 목격한 우진과 그의 누나 수아의 과학실에서의 은밀한 장면을 목격한 오대수. 그는 서울로 전학을 가기 전 친구에게 무심코 이 사실을 이야기한다. 수아를 둘러싼 추문은 그녀를 상상 임신에까지 이르게 하고 결국 죽음을 택하고 마는데.

오대수의 말 한마디가 사랑하는 누나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생각에 우진은 지금까지 복수만을 위해 살아왔던 것. 모든 것을 알아냈다고 생각한 오대수는 우진을 찾아가고 이제는 죽으라고 하지만 우진의 복수는 감금이 아니었다. 우진은 오대수의 딸 미도가 성인이 되는 15년을 기다렸으며 둘의 근친상간이 이뤄지도록 철저히 계획했으며 이에 성공했다.

이런 상황을 알게 된 오대수는 미친 듯 죄를 빌고 우진의 복수는 완성된다. 하지만, 그곳을 떠나던 우진은 이제 삶의 의미를 잃은 듯 자신의 머리로 방아쇠를 당긴다.

◇비극적 장면 극대화 시키는 반전 음악 = 보랏빛·핏빛이 맴도는 영상으로 우리 시각을 무겁게 하는 영화 <올드보이>. 내게 가장 충격적인 장면을 뽑으라면 단연코 오대수가 사람을 가둬놓는 것을 업으로 삼는 업자의 이를 하나씩 뽑는 장면이다.

'1년에 하나씩'이라던 오대수 대사에 온몸의 세포가 얼어붙는 듯했으며 이런 잔인한 장면에서 사용된 음악이 행복한 기운이 가득한 바로크 음악이라는 것은 놀랍다. 이탈리아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 1악장'. 이 곡은 이후 복수를 위해 찾아온 감금사업자가 자신이 당한 그대로 오대수 이를 뽑으려는 장면에서도 사용되는데 '이 뽑기 테마'라고 해야 하나.

'음악의 아버지' 바흐보다 7살 형인 비발디는 이탈리아 베네치아 태생의 작곡가이자 가톨릭 신부였다. 머리 색이 붉어 '빨간 머리 신부'라 불리며 많은 작품을 남긴 그는 오랜 기간 베네치아 자선 병원 부속의 여자 음악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것이 다작의 요인이었을 것이다. 언뜻 구별이 잘 안 되는 비슷한 스타일의 곡들이 많아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로부터 '같은 곡을 수백 곡 작곡한 작곡가'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대표작 '사계'만으로도 사랑받을 만한 보석 같은 작곡가이다. '사계'는 표제 음악(곡의 내용을 설명·암시하는 표제로써 구체적 또는 추상적인 대상을 묘사하려는 음악)의 역사에 있어서 상당히 앞쪽에 있는 곡으로 '화성과 창의에의 시도'라는 협주곡 집에 수록돼 있으며 각 계절의 악장(3악장 구성)마다 소네트(정형 서정시)가 붙어 있어 그 장면을 묘사하고 있으니 표제음악적 특징을 지닌 것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봄의 1악장 일 테지만 영화에 사용된 계절은 겨울이며 1악장이다. '차가운 눈 속, 추위에 벌벌 떨며 휘몰아치는 매서운 바람을 향해 걸어간다. 쉬지 않고 걷고 있지만 제자리걸음에 불과하고 혹독한 추위에 이가 덜덜 떨린다'. 소네트에 이가 등장해서 이 곡을 사용했을까. 덜덜 떨린다는 소절 때문이었을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장면에서 이 곡의 선택은 탁월했다.

겨울의 2악장 또한 유명하며 국내가요도 사용됐기에 누구든 들어보았을 법하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선율로 언뜻 겨울이라는 계절과 어울리지 않을 듯한데 난롯가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평화로운 장면을 묘사했다.

대중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던 비발디 말년은 비참했다. 음악적 성공을 위해 오스트리아 빈으로 옮겨간 그는 청중으로부터 외면을 받았으며 생활을 유지하고자 악보를 헐값에 팔며 살아가다 결국 객사한다.

빈에 있는 '음악가들의 무덤'에 가보면 위대한 음악가들의 묘를 만날 수 있다. 그들의 묘에는 1년 내내 방문객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꽃다발로 가득하다. 비발디의 묘도 빈에 있다. 하지만, 그의 자리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는 가난한 죽음으로 평민들의 묘 가운데 초라하게 묻히고 만 것이다.

이후 그는 세상으로부터 서서히 잊혔고 그렇게 100년이 넘어 베네치아의 한 음악도서관에서 그의 '사계' 악보가 발견된다. 그리하여 비발디라는 이름이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한 것이니 실제 우리가 그의 음악을 즐기기 시작한 것은 반세기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 <올드 보이>가 호평을 받는 이유 중 반 이상은 배우 최민식 연기에 있다고 보인다. 산 낙지 먹는 장면과 '장도리 액션'이 많이 회자되지만 영화 후반부 모든 것을 알게 된 오대수가 오열하듯 협박하듯 우진에게 용서를 비는 장면은 얼굴을 찡그려 가며 몰입할 수밖에 없다. 더불어 영화 완성도를 높여준 많은 예술적 배경과 미술품들, 그리고 명대사들이 어우러진 걸작이 바로 <올드보이>다.

여러 명대사 중에서 뇌리에 남아있는 대사가 있다. 반드시 복수하겠다는 의지가 실려 있는, 살아가는 동안 들어서도 해서도 안 될 서슬 퍼런 바로 그 말. '누구냐 넌'. /심광도 시민기자

※ 본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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