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5대 실크 명산지, 진주실크

10월, 계절이 가을로 접어들고 진주 남강에 유등이 띄워졌다. 진주남강유등축제의 시작이다. 지난해까지 유료화 논란이 있었지만, 올해는 가림막을 철거하고 무료로 개방했다. 그런 남강유등축제 곁에 익숙한 행사가 진행된다. 한국실크연구원이 주최하는 '진주실크박람회'다. 2002년 처음 시작한 이 행사는 어느덧 17회째를 맞이하고 있다. 국내 실크산업을 대표하는 진주실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엿볼 수 있다. 김용학(53) 한국실크연구원 연구사업본부장은 박람회가 진주실크 홍보를 위해 시작했다고 말한다. 김 본부장은 "진주실크가 세계 5대 명산지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며 자신감을 내비치면서도 "하지만 국내 일반 소비자들에게는 홍보가 부족한 사실이다. 박람회를 통해 진주실크가 널리 알려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세계 5대 명산지라고 하는 진주실크. 이를 살피기 위해 진주시 문산읍 실크전문단지의 한국실크연구원을 찾았다.

공적 성격을 띈 민간 연구원

한국실크연구원(이하 연구원)은 경영·회계·관리를 맡고 있는 경영본부와 섬유소재 연구·개발을 하는 연구사업본부로 구성돼 있다. 연구사업본부의 책임자인 김용학 본부장은 실크 염색가공을 전문 분야로 한 최고실무진이다.

"대학 졸업 후 안산 반월공단에서 3년 정도 근무하다가 연구원으로 왔습니다. 연구원에서 일한 지는 25년 정도 된 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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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학 한국실크연구원 연구사업본부장. / 이종현 기자

연구원은 지난해 진주시 문산읍의 진주실크산업혁신센터(이하 혁신센터)로 이주했다. 2015년에 준공한 혁신센터는 직기 장비, 염색 장비 등 49종의 장비로 시제품 개발·생산할 수 있는 시설을 갖췄다. 혁신센터 인근에는 여러 실크 업체가 모여 있는 '실크밸리'가 조성돼 있다.

"연구원은 1988년 '한국견직연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됐습니다. 상공부(산업통산자원부의 옛 이름) 산하의 민간 전문생산연구소였죠.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을 지원하는 것이 설립 목적입니다. 기초기술부터 생산기술, 현장 인력 양성 교육까지, 포괄적으로 맡았죠."

연구원의 설립 목적이나 과정, 이후 맡은 업무까지. 민간 연구소라곤 하지만 공공성이 강하다. 분야와 규모가 다르긴 하나 창원 소재의 재료연구소와 역할이 비슷하다.

"재료연구소는 정부출연 연구기관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저희도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기는 하지만, 법적으로는 민간생산 전문연구소로 돼 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기업에 의뢰를 받아 연구하는 민간수탁연구를 진행해야 하는데, 지금 국내 섬유산업계의 사정이 안 좋다 보니 제대로 된 민간수탁연구가 어렵습니다. 게다가 '연구원은 기업을 위해 지원해주는 기관'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보니, 기업들이 연구원에 돈을 주고 연구 의뢰를 한다는 것에 거부감이 큽니다. 저희도 재정적인 압박이 커서 기업 지원에 한계가 있습니다."

섬유소재 연구라고 하면 대략적인 내용은 알겠지만 구체적인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았다. 연구원과 혁신센터의 구체적인 역할에 대해 물었다.

"혁신센터의 핵심은, 실크를 이용한 새로운 섬유소재를 개발하는 첨단 장비의 운용입니다. 혁신센터에서 신제품을 개발하고, 연구원은 그 설비를 운용하는 주체로서 기능합니다. 개발한 기술을 각 업체에, 자기 제품에 접목해 경쟁력을 키울 수 있도록 돕기도 합니다. 장기적으로는 연구원의 고급 인력들이 수시로 현장에 방문해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계획하고 있습니다. 기술지도나 에로상담부터, 업체가 필요한 정보 조사·전달, 마케팅과 유통까지요."

섬유소재의 여왕, 실크

섬유소재가 다양해졌다. 그래서일까, 실크라고 하면 좋게 말하면 전통적인 것, '옛것'이라는 이미지가 있다고 털어놓았더니 김용학 본부장은 "그런 생각도 이해한다"고 한다.

"실크의 기원은 기원전 3000년 전의 중국 신화에서 시작합니다. 기원전 2000년 중국에서 양잠이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요. 그러다 보니 오래된 것이라는 인식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현대 실크는 전통적인 것만 고집하지 않습니다. 전통적인 실크를 기반으로 트렌드에 맞춰 융·복합을 하는 게 최근 트렌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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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실크연구원 실크전시실. 실크소재를 활용한 침구와 여러 물품들이 전시돼 있다. / 이종현 기자

실크의 오래된 별명 중 하나가 '섬유소재의 여왕'이다. 오래전부터 사용되었지만, 섬유로의 기능은 첨단소재들보다 우수하다는 데서 유래된 별명이라고 한다. 나일론, 폴리에스테르 등의 합성섬유와 비교했을 때 어떤 장단점이 있을까.

"실크는 의류패션 업계에서도 최고 수준으로 쳐주는 소재예요. 실크는 누에가 짜낸 실로 만드는 천인데, 누에의 실이 천연단백질입니다. 다른 화학섬유보다 인체친화적인 제품이죠. 실크를 소재로 한 고가의 이너웨어가 많은 이유기도 합니다. 보온력도 좋고 자체 자외선 차단력이 매우 강한 데다 보습성도 뛰어납니다. 반면에 단점도 분명합니다. 일단 가격이 높습니다. 누에를 사육하고 고치를 만드는 양잠 때문에 저렴한 합성섬유에 비해 원단의 가격경쟁력이 낮습니다. 그리고 실크는 천연 소재인 만큼 물에 취약합니다. 세탁을 하려면 반드시 드라이크리닝을 해야 하죠. 그냥 물빨래하면 되는 화학섬유에 비해 오염에 취약하고, 편의성도 낮고, 세탁 비용도 더 든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섬유소재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참 이중적이죠.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지만 관리가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들다 보니 일반 의류에 대중적으로 사용하긴 어려운."

사양길 들어선 실크산업?

고가의 섬유인 만큼 일상에서 비단을 보긴 쉽지 않다. 그나마 명절 때 입는 한복 소재가 실크인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명절에도 한복을 안 입는 사람이 늘고 있는 추세다.

"의류 쪽으로는 한복, 넥타이, 스카프 등이 실크를 쓰는 주요 제품들입니다. 하지만 한복, 넥타이는 시장이 점점 축소되고 있어요. 옛날 같으면 결혼할 때면 양가 집안 통틀어서 한복을 맞추곤 했었죠. 하지만 최근에는 한복을 대여하는 게 대부분이고, 그 대여마저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그나마 대여 한복의 경우 실크보다는 폴리에스테르와 나일론, 레이온을 섞은 인조 실크(인견)를 많이 사용합니다. 또 최근 젊은 층 사이에선 '노타이'(넥타이를 매지 않는 차림)가 유행하면서 넥타이 시장 자체가 줄어들었습니다. 이명박 정부 때는 아예 '에너지 절약'이라며, 기업 사무실에서 넥타이 안 매는 캠페인을 하기도 했죠. 이 에너지 절약 캠페인 이후 실크 넥타이 수요가 1/3 정도로 줄었습니다. 실크를 많이 쓰던 시장이 줄어든 만큼 실크산업계엔 큰 악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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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크재를 활용한 전통의상. / 이종현 기자

주변 상황이 무척 안 좋다. 하지만 김용학 본부장은 "절망적이지만은 않다"고 한다.

"시장 자체가 줄어들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트렌드가 바뀌는 것이니까요. 장단점이 분명한 만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우선 실크를 이용한 합성섬유를 연구·개발하고 있어요. 순수 실크보다는 다른 울이나 기능성 소재와 융복합해서 차별화된 소재를 만드는 거죠.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시장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섬유산업은 의류에만 한정돼 있지 않아요. 실크의 고급스러움을 무기로 한 항공이나 철도, 선박 등의 내장재 개발, 인체친화적인 천연단백질 성분이라는 장점을 살려 수술용 봉합사를 만든다든지, 천연바이오 제품을 만든다든지. 섬유를 활용할 수 있는 사업 분야는 무척 넓습니다. 연구원은 이런 전 분야에 대한 기술개발을 하고 있고요. 진주 혁신도시로 세라믹기술원이 이전해왔는데, 세라믹기술원과 협업해 실크를 이용한 융복합 연구를 할 예정입니다."

실크산업의 중심지, 왜 진주일까

'진주실크'는 대한민국 실크산업계의 중심지다. 이렇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다. 일본이 자원 수탈을 목적으로 한국의 양잠업을 활성화시킨 게 시작이라고 한다.

"진주와 진주 인근의 산청, 하동, 함양은 원래부터 양잠업에 유리한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실크 집산지였던 건 아닙니다. 전국 각지에서 개별적으로 양잠업을 하고 있었죠. 그러다 지금처럼 된 것은 1900년대 초반 '염색'이 세계적인 트렌드가 되면서부터입니다. 염색에서 중요한 요소는 '물'이었습니다. 진주 남강이 염색에 가장 적합했고, 각지에서 생산한 실크가 염색을 위해 진주로 오게 됐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교통편이 열악했고, 염색을 위해 일일이 진주를 오가는 게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아예 진주로 이주해 실크를 생산하게 됐고, 이게 진주실크가 됐습니다."

진주실크는 1970~80년대 최고 호황기를 맞았다. 국내 실크 생산·가공의 태반이 진주에서 이뤄졌다. 많을 때는 진주 내에 실크산업 업체가 150여 곳 정도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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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실 한쪽 벽면엔 진주실크의 역사가 정리돼 있다. / 이종현 기자

"제가 연구원에 온 것은 1990년대 후반이었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진주 내 실크 업체가 135~7개 정도였죠. 하지만 IMF 이후 절반 정도의 기업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비싼 실크보다는 저렴한 섬유소재를 선호하게 됐습니다. 또 중국이 경제 개방을 하면서 저가의 제품이 많이 수입되게 됐는데, 중국의 저가 제품과 경쟁하면서 국내 실크산업 시장이 점점 축소됐습니다."

현재 전국적으로 200개 정도 있는 실크산업 업체 중 진주에 있는 곳은 60~70개 정도로 줄어든 상태다. 호황을 누렸던 과거에 비해 한참 줄어들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진주실크는 여전히 국내 실크산업계의 본산이다. 여전히 국내 실크 생산·가공의 60~70% 정도는 진주에서 한다고.

"어려운 건 맞지만, 열심히 하면 길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연구원이 열심히 일하고 있고, 실크박람회도 여는 거죠. 여전히 진주실크는 세계 5대 실크 명산지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쌓아온 노하우를 바탕으로, 기존에 하던 것은 잘 유지하고. 새로운 사업을 발굴하고. 또 박람회 등의 행사를 통해 일반인들에게도 진주실크라는 브랜드를 각인해나간다면. 더 나아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차별화된 경쟁력 확보가 과제

김용학 본부장은 "가격경쟁력이 떨어지는 기존 실크 제품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면서도, 새로운 가능성 찾기는 포기하지 않았다.

"요즘 10·20 세대가 애용하는 의류 브랜드가 SPA 브랜드잖아요. 품질이 떨어지더라도 가격이 저렴한. 지금처럼 경기가 안 좋은 상황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더더욱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해야 합니다. 가방이나 지갑, 목도리, 머리띠 같은 기존에는 적었던 시장을 공략하는 거죠. 또 이너웨어 같은 피부와 직접 맞닿는 제품은 비싸더라도 인체친화적인 장점을 충분히 어필할 수 있습니다. 또 세탁하기 어려운 것을 다른 소재와 융복합하면서 개선해 실용성을 늘리는 등 연구를 계속할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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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복장에도 실크소재를 활용하는 옷은 많이 있다. / 이종현 기자

실크산업계에 가장 절실한 과제가 무엇일 거 같으냐고 물었다. 답은 빨랐다.

"실크에 대한 인식 개선, 홍보입니다. 실크는 그 자체만으로 최상의 제품이에요. 숱한 첨단 소재가 생겨났지만 실크를 능가하는 섬유는 없습니다. 품질적인 면에서 주목받는 첨단 소재는 가격경쟁력을 갖추는 대신 실크의 품질을 떨어트리는 것들이에요. 이런 간단하면서도 좋은 강점이 있으면서도 실크산업계가 어려워지는 것은, 실크에 대한 홍보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샤넬이나 루이비통의 가방이 비싸다고 안 팔리나요? 비싸더라도 그 가치를 인정받으면 팔리기 마련이죠. 이런 인식 개선을 위해 실크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이 노력할 겁니다. 그리고 안정된 내수 시장을 기반으로, 해외에 '진주실크'라는 명품 브랜드를 선보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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