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을 존경하는 박정희와 이은상

시조시인 이근배에 의하면 '국난극복의 성웅 충무공(1545~1598년)을 겨레의 가슴에 더 깊이 심고 싶어 했던 노산 이은상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을 만나면서 그 뜻을 펴게 되었다고 한다. 이병도, 이선근, 박종화와 함께 새 지도자 박정희의 학술, 문화 쪽 자문을 했던 노산은 박정희 정치이념의 상징 인물로 충무공 이순신을 강력히 천거하였다'고 한다. 이미 박정희는 충무공에 대해 특별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5·16군사쿠데타 이후 1962년부터 18년 동안의 집권기간 중 아산 현충사에서 매년 4월 28일에 열리는 충무공 탄신기념제전에 열네 번이나 참석할 정도로 숭배하였다. '대통령이 참배할 때마다 노산은 헬리콥터에 동승하여 해박한 지식과 능변에 박정희의 구릿빛 얼굴도 녹아들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충무공 탄신일에 아산 현충사를 방문할 때에는 추모행사에 참석하고 나서 경내의 활터에서 활을 쏘는 등 자신과 이순신을 동일한 이미지로 국민들에게 각인시키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거의 외우다시피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군사정권의 정치적 정통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애국 군인의 상징인 이순신을 군인정신의 표상으로 삼았다. 이는 이순신에 대한 박정희의 개인적인 관심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추진배경에는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가 가로 놓여 있었다. 한일국교정상화는 반일 민족주의적 감성이 강한 청년학생과 대중들을 자극하였고, 곧바로 격렬한 굴욕외교 반대 투쟁에 직면하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대중들의 반일민족주의 정서라는 원심력을 체제 내의 구심력으로 전환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전환에 이순신은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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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세종로에 세워져 있는 이순신 동상.

박정희 대통령은 1962년 3월 1일, 충남도지사에게 현충사를 정화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경내가 1345평에서 5359평으로 확장되고 내삼문 안에 유물전시관이 건립되었다. 1965년 한일협정 조인과 국회비준을 전후로 야당과 지식인의 반발이 지속되던 중이었다. 1966년 4월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된 현충사의 성역화는 처음에 충남도가 주관하다가 곧바로 문교부 문화재관리국으로 바뀌었다. 전체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1967년 3월에 10만 6000여 평에 착공하고 문화재법에 따라 사적 제155호로 지정하였다. 이때부터 현충사 관리를 법률로 보장하기 위해 국가기관인 현충사관리소를 설치하고 관리소장은 예비역 준장급이 임명되었다. 1차 공사는 1969년 4월에 준공하였고 이후에도 계속되어 1973년에는 21만 6000여 평으로, 다시 1974년에 이르러 현충사 사적보호구역으로 지정된 면적이 42만 5000여 평에 이르러 대폭 확장되었고 약 30억 원이 투입된 대역사였다. 또한 1967년에 충무공 422주년 탄신기념 현충사 성역화 기공식에서 충무공 탄신기념일을 국가행사로 할 것을 지시한 이후 문교부는 1월 16일, 문교부령 제179호에 의해 4월 28일을 이충무공 탄신기념일로 제정했다. 1973년 3월 30일에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기념일로 지정하였다.

서울 광화문의 세종로 네거리에 있는 17.49m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은 이순신 탄생 423주년을 기념하여 정부산하 단체였던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위원장 김종필 공화당의장)의 주관으로 1968년 4월 27일 건립되었다.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는 1966년 8월 15일에 발족되어 첫 작품이었는데 당시 위원회의 총재는 김종필이었고 박정희는 위원회에 동상의 총공사비 983만 원 전체를 지원한 최초의 헌납자였다. 이 점에서 이순신 동상은 철저하게 박정희의 정치적 의도를 반영한 조형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문공부의 1973년 7월 조사에 따르면 이순신 동상은 전국에 275기가 세워져 있다. 세종로의 이순신 장군 동상은 청와대가 있는 북악을 등지고 위엄을 떨치며 서 있다. 동상의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썼고 동상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김세중 교수가 제작하였다. 당시 충무공기념사업회의 회장이며 박 대통령의 문화자문이었던 노산 이은상의 권유로 지금의 자리에 세워졌다. 물론 15년 전인 자유당 시절에도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있긴 했지만 본격적인 신격화 사업은 아니었다.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하여 제막식을 한 진해 중원로터리에 윤효중이 제작한 충무공 동상의 글도 노산이 썼다.

박정희 역사관은 식민사관에서 이순신의 신격화로

충무공 탄신기념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빼놓지 않고 강조했던 것은 이순신과 당파싸움에 얼룩진 조정의 모리배에 대한 이분법적 시각이었다. 이제 이순신과 조정의 모리배는 박정희와 반대를 일삼는 야당, 지식인들과 동일시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 여러분은 저들을 믿지 말고 나를 따르라는 이야기였다. 임진왜란과 현재를 대비함으로써 박정희가 거둔 효과는 정전보존과 집권연장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역사인식은 오천년 역사를 퇴영과 조잡과 침체의 연쇄사라고 격하하는 등 전형적인 식민사관을 가졌다. 그런데 1960년대 말부터 민족의 긍정적 측면을 적극적으로 강조하는 쪽으로 변화하기 시작하면서 위인의 신격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우리의 반만년 역사는 한마디로 말해서 퇴영과 조잡과 침체의 연쇄사였다 할 것이다.…… 고식, 나태, 안일, 무사주의로 표현되는 소아병적인 봉건사회의 한 축소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창조, 협동, 애국은 서구의 논리에서도 지상의 생활신조이며 기본가치이겠지만 이것은 바로 우리 선조들이 지켜온 역사적 유산의 중심 가치, 즉 홍익인간의 이상이요, 화랑도의 정신이요, 서민사회의 이상'으로 바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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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초 세종로 동상 건립 조감도에서부터 헌납 박정희를 강조하고 있다.

박정희의 입장이 이렇게 바뀐 이유는 처음에는 쿠데타의 당위성을 입증하기 위해 민족사를 부정했지만, 곧 자신이 기획한 쿠데타의 완수를 위해서는 민족의 공동체적 숙명에 호소하며 역사를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순신의 신격화를 통하여 얻고자 했던 효과는 첫째 이순신이 가지고 있는 반일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친일적 이미지를 희석시키려했다. 둘째 이순신의 구국 영웅적인 이미지를 통해 군인 출신 대통령의 통치를 합리화하려 했다. 셋째 박정희 대통령은 이순신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논리로 야당세력을 비판했다. 시인 김지하는 박정희의 이러한 이순신 성웅화 작업에 대해서 비판하는 희곡 <구리 이순신>을 써서 <다리>지 1971년 11월호에 게재하기도 했다.

이광수는 1931년 소설 <이순신>에서 '왜적과 용감하게 싸우는 이순신'이 아니라 '문약하고 시기심이 많은 선비 정치인들에 의하여 당하고 마는 비극적 군인'이었다. 이은상의 호를 지어준 이광수는 난중일기를 많이 참조하여 소설 <이순신>을 썼다. 춘원은 1931년 6월 26일부터 시작하는 동아일보 연재를 앞두고 5월 30일 자에 쓴 작가의 말에서 '나는 이순신을 철갑선의 발명자로 숭상하는 것도 아니요, 임란의 전공자로 숭앙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도 위대한 공적이 아닌 것은 아니겠지마는, 내가 진실로 일생에 이순신을 숭앙하는 것은 그의 자기희생적, 초훼예적(超毁譽的), 그리고 끝없는 충의(애국심)인 것입니다. 군소배(群小輩)들이 자기를 모함하거나 말거나, 일에 성산(成算)이 있거나 말거나, 자기의 의무라고 믿는 바를 위하여 국궁진췌(鞠躬盡)하여 마침내 죽는 순간까지 쉬지 아니하고 변치 아니한 그 충의, 그 인격을 숭앙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오직 나라사랑, '민족반역자도, 독재자도 욕하지 않는다. 일본제국이든 대한제국이든 국가라면 무조건 받들 뿐이었다' 성웅에게는 나는 없고 국가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순신과 조선조 지배층에 대해서 이광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1960년대 현충사를 성역화할 때 그는 자신의 조국 근대화 정책에 반대하는 지식인들과 직업정치인들을 이순신을 모함했던 조선조의 선비들과 동일시하였다. 심지어 박정희 대통령은 충무공으로 상징되는 호국정신을 북한의 주체사상을 압도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까지 생각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였다. 이은상 역시 국가 지도자의 역할을 생각할 때 이순신을 내세웠고 나라가 힘든 일을 당할 때에도 그 답을 이순신에게서 찾았다.

대통령 재임 중에 자필로 쓴 소년시절 회고 기록에 의하면 박정희는 1931년, 보통학교 5학년 때 춘원이 쓴 이순신을 읽고 이순신 장군을 숭배하게 되었고 6학년 때 나폴레옹전기를 읽고 나폴레옹을 숭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볼 때 6학년 때였을 것이라고 한다. 1934년, 박정희 대통령이 대구사범을 다닐 때에는 이순신 전기도 교내 독서금지도서 였다. 신채호로부터 이광수를 거쳐 박정희로 이어지는 동안에 이순신 장군은 영웅화되었고 독재권력의 명분이 되었다. 임금과 조정 신하와 이순신 장군 간의 대립과 갈등은 고독한 대통령과 저속한 반대세력으로 이해되면서 자신과 이순신 장군을 동일시하게 되었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이 충무공에 대해 남다른 존경심을 갖고 있던 노산을 찾게 되었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친밀해졌다. 역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박정희 대통령은 저녁에 술을 먹어도 이은상 선생이나 이선근 박사, 이런 사람들, 문화재 위원이나 원로들하고 자리를 같이 하였다. 이선근 박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국사 가정교사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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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초 세종로 동상 건립 조감도에서부터 헌납 박정희를 강조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세종대왕과 이순신을 합해놓은 인물

노산은 스스로 <이충무공전서> 속에 있는 충무공의 행적과 말씀과 사상과 정신은 나의 유일한 스승이고 일생의 '지로침(指路針)'이라고 하였다. <불굴의 박정희>(전 10권)의 저자인 동서문화사 고정일 대표는 2017년 5월 8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월간조선과 박정희 대통령 기념재단이 연중기획으로 진행 중인 제7회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 시민강좌에서 주제강연을 하였다. 고 대표는 노산 이은상의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박 전 대통령을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합해놓은 인물이라고 평했다고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합해놓은 인물이라고요.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를 비롯하여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나 백성들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이순신은 목숨 바쳐 나라를 구했지만 손자병법에 이르길 백번 싸워 백번 이기는 것이 최상은 아니라고 합니다. 박 전 대통령은 남북한 체제경쟁에서 김일성과 싸우지 않고도 이겼고, 세종대왕도 못 이루었던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

현충사는 숙종 때인 1709년에 세워졌다. 그 후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최초의 현충사 사당이 자취를 감추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에 의하여 13대 종손 이종옥(李種玉)의 가산이 쇠진되어 채무에 허덕이게 되었다. 결국 동일은행·호서은행 등 채권자들에 의한 경매 절차에 따라 충무공 묘소 임야와 위토(位土)마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게 될 위기에 처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이 소식이 1931년 5월 13일 자 동아일보에 보도되자 뜻 있는 인사들이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조직하고 동아일보사와 협력하여 전국 각지에서 총 16,021원 30전의 성금을 연 2만 명의 인원으로부터 모금하여 빚을 갚고 남은 금액으로 1932년 6월 5일 현충사 낙성식과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화백이 그린 영정 봉안식을 동시에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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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채호의 <이순신전>.

동아일보의 성금 모금이 시작되자 이광수는 충무공 유적지로 급파되어 충무공의 행적을 역사적으로 더듬는 기행문을 열네 차례에 걸쳐 연재하게 되는데 이광수의 소설 <이순신>은 이 기행문 연재가 끝난 직 후에 1931년 6월 26일부터 1932년 4월 3일까지 동아일보에 장편소설로 178회 연재된 작품이다. 이광수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이었다. 춘원은 소설의 끝부분에서 '그가 돌아간 지 334년 4월 2일에 조선 500년에 처음이요 나중인 큰 사람 이순신(충무공이란 말을 나는 싫어한다. 그것은 왕과 그 밑에 썩은 무리들이 준 것이기 때문)의 슬픈 일생을 그리는 붓을 놓는다'라고 적었다. '왕과 그 밑에 썩은 무리'라는 괄호 안 문장만으로도 이광수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소설 집필 당시에 조선총독부의 회유, 협박으로 친일파로 변절해가던 이광수는 조선이 망한 것은 당쟁 때문이며 이를 개조해야 할 민족성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노산은 스스로 밝히기를 현충사가 허물어지는 것을 전국에서 민족의 성금을 모아 1932년 6월에 현충사를 충남 아산에 중건하던 때부터 충무공에 대하여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몇 년 앞서는 것 같다. 모금운동, 그 이전인 스승 이윤재와 함께 계명구락부, 조선어학회 활동을 할 때부터인 것 같다. 이 당시 고하 송진우와 친하게 지낸 위당 정인보도 1931년부터 32년까지 이충무공기념사업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이 충무공 관련 글을 발표하였다.

1930년 동아일보가 주도한 정신개혁, 문화혁신은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자치운동을 이끌었던 문화주의, 민족주의의 연장선에 있었다. 조선의 정치적 독립이 아니라 체제 내 자치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동아일보는 문화주의, 민족주의는 자치를 제창하면서 민족문화의 가치와 민족문화의 선양을 강조하고 이순신 추모사업을 하였다. 조선의 역사적 위인과 문화유적에 대한 동아일보의 대대적인 여론형성에 편집국장인 이광수가 직접 관여하였던 것이다. 동아일보가 전면에 나선 1930년대의 문화운동은 조선의 독립이라는 정치적 목적은 포기한 채 일본제국의 한 지방으로서 조선이라고 하는 토속성, 종속성을 강화하는 데 그쳤다.

이윤재, 신채호, 이광수의 소설 <이순신>

신채호의 <이순신전>은 전투를 중심으로 구성되어있다. 특히 그중 18장이 이순신 휘하의 여러 장수들과 공의 유적 및 기담으로 구성되어있다. 이는 상무정신의 재건을 바라는 신채호의 역사의식에 의한 구성이다. 만약 충무공의 불굴의 애국심이 없었으며 잘 훈련된 정예군도 무력하다는 것이 신채호의 최종결론이다.

이순신의 영웅성에 대해 이광수는 부패한 조정의 온갖 악정을 타개해가는 것으로 그렸다. 그는 외롭고 고독한 영웅이었다. 이순신의 앞길에는 오직 죽음과 실패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순신이 자신의 죽음을 알면서도 조정의 부름에 나아갔던 것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충정 때문이었다. 이광수가 민족개조론에서 개조주의의 내용으로 꼽은 것이 이순신과 이 저급한 여타의 인물이 고스란히 반영되어있다.

이광수는 충무공이라는 시호마저 거부하는 결벽증을 보이고 있다. 왜냐하면 시호는 왕과 그 밑에 썩은 무리들이 준 것이기 때문에 이순신을 더럽히고 오염시키는 불결한 칭호이기 때문이었다. 500년 조선의 역사가 중증환자, 병통의 역사이고 이순신만이 이 병통에 홀로 맞섰다는 점에서 신채호와 이광수는 같다. 그러나 이광수는 자신의 작품에서 한민족의 모든 역사를 부정하였다. 신채호는 이순신의 애국심을 본받아 독립운동을 강조한 데 반해서 이광수는 영웅 이순신을 제외한 모든 조선인들이 바뀌어야 한다는 민족개조론으로 연결되고 있다. 사실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순신의 인간적인 모습에 더 정이 간다. 예를 들면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모습, 백의종군하면서 느꼈던 갈등, 전쟁에 임하여 도망가는 부하들로 인하여 고민하는 모습 등이다.

환산 이윤재도 동아일보에 1930년 10~12월까지 성웅 이순신을 43회 연재하였다. 이 글은 정조 때 간행된 <충무공전서> 가운데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지은 <행록>과 승지 최유해가 지은 <행장>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이듬해 1931년 8월에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성웅 이순신>으로 출판했다. 환산이 이 책의 간행에 문일평, 이은상, 백낙준, 유각경 제씨의 노고를 사례한다고 책의 서문 앞부분에서 밝힌 것으로 볼 때 노산이 이때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이 책은 인기가 좋아서 초판이 다 팔렸다. 두 번째 판을 내었는데 다 팔리기 전에 일제의 관헌이 '조선사람에게 읽힐 것이 못 된다'하여 발매 금지처분을 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홍원경찰서에 구금되었을 때 이 책에 대해서도 조사받으면서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해방 직후 1946년에 <성웅 이순신>은 통문관에서 재출간하였다.

노산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인하여 일제강점기에 감옥으로 끌려갈 때 자신의 서재에 있던 국학 관계 서적과 미처 출판하지 못한 원고를 모조리 압수당하여 홍원경찰서 유치장 마당에서 조선어학회의 다른 동지들의 서적과 함께 분서(焚書)의 화를 당하였는데 다행히 집안 벽장 속에 둔 <이충무공 전서>만은 화를 피하였다고 한다.

노산의 <이순신 장군>은 무용극으로, 영화로 만들어졌다

해방 후, 노산은 호남신문사를 창간하면서 1945년 겨울, 제일 먼저 신문지상에 연재하다가 이듬해인 1946년에 이충무공일대기를 자신이 사장인 국학도서에서 출판하였는데 신문 연재와 출판이라는 방식이 환산과 똑같다. 노산이 1955년 10월에 이충무공기념사업회를 결성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회장으로 있을 때, 전남대학교 재단이사장이었는데 학교에서 1956년 충무공정신계승 마라톤대회를 주최하였다. 이은상의 작품 <이순신 장군>은 1960년에 무용가 이미라에 의해 무용극으로 창작되었다. 1962년에는 감독 유현목에 의해 영화 <임진란과 성웅 이순신>으로 만들어졌다. 원작은 이은상이고 시나리오는 나소운이 썼고 출연은 김승길, 조미령 등이었다. 이즈음에는 역사영화가 많이 만들어졌다. 1956년에는 춘원 이광수의 <단종애사>가 시나리오 유치진, 감독 전창근(출연 엄앵란, 황해남)에 의해 만들어졌고 역시 이광수의 <재생>이 1960년, 시나리오 유치진, 감독 홍성기, 박찬(출연 최무룡, 김지미)에 의해 만들어졌고 월탄 박종화의 <금삼의 피>가 <연산군>이라는 제목으로 1962년, 시나리오 임희재, 감독 신상옥(출연 신영균, 도금봉)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다.

영화 이순신을 관람할 때마다 매번 의무적으로 상영되었던 대한뉴스에서는 이순신과 관련된 뉴스가 매년 빠짐없이 나오곤 했다. 특히 1973년에는 <충무공 유적 따라>라는 제목의 기획물을 연속적으로 상영하면서 문화제 보호정신과 이순신의 애국정신을 대중들에게 계몽하였다. 1971년에는 김진규 제작, 주연의 영화 <성웅 이순신>이 제작되었고 1978년에는 역시 김진규 주연의 영화 <난중일기>가 제작되었다. <성웅 이순신>이라는 제목의 뮤지컬도 1973년 국립극장 개관 기념 공연작으로 무대에 올려졌다. 문화공보부에서는 1969년 3월에 <충무공의 노래>를 제정해 학교에서 부르도록 하였다. 지폐, 우표, 담배 등도 이순신과 관련된 것들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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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 유현목 감독이 만든 영화 임진란과 성웅이순신.

충무공기념사업회 1955년도 이사장 이은상, 회장 이기붕

1955년에는 충무공기념사업회의 이사장은 이은상이었고, 회장은 이기붕이었다. 사무국장 김용태는 1955년부터 1962년까지 7년간 근무하였다. 이 당시는 국방부장관과 3군 참모총장이 이사로 참여하였고 이승만 대통령이 사업기금을 후원해주었으며 동아일보가 주관하였다. 역점사업은 충무공전서 발간, 난중일기 국역사업이었다.

5·16 쿠데타 이후에 김용태 사무국장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에게 현충사 성역화를 건의하였고 얼마 후 국역한 충무공 전서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주었다. 5·16 쿠데타 사전모의과정에 김용태가 참여하면서 문교부로부터 충무공 전서 제작비로 받은 지원금을 쿠데타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물론 이은상으로부터 사전 동의를 받았다고 한다. 이은상이 민주공화당 창당선언문 초안을 쓰게 된 것도 김용태의 제안인 듯하다. 왜냐하면 김용태는 이은상을 5·16쿠데타 사전모의 과정에 참여시킬 생각도 하였다고 한다. 물론 사전누설 가능성 때문에 참여시키지는 않았다.

<노산 이은상 선생>을 쓴 김봉천은 노산이 1955년 10월부터 1961년 3월까지 사단법인 이충무공기념사업회장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관련 자료에 의하면 1968년 광화문에 이순신 장군동상이 건립될 때의 충무공기념사업회 회장은 이은상이었다고 한다. 충무공기념사업회 이사장을 하면서 여러 가지 사업을 주도하고 정부 및 사회 각계와 긴밀한 제휴를 해가면서 혼신의 정력을 기울였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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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천, <노산 이은상 선생>, 창신고등학교(2002년),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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