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 원동역

근무일이었던 일요일 하루 휴가를 미리 냈다. 10월 6일 토요일 경북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에서 열리는 '이륜차타고세계여행'(이하 이타세)카페 10월 정기캠핑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이타세 10월 정캠은 몇 해 전부터 '와인과 함께 하는 재즈공연'을 함께 해왔다. 캠핑장에서는 열리는 재즈 공연은 실내공연에 비해 집중도가 떨어지기는 하지만 그것대로 색다른 맛이 있다. 이번 정캠에는 꼭 참석하고 싶었다. 정캠은 매월 첫째 주 토요일에 열리는데 최근 몇 달간 이런저런 이유로 참석을 못했기 때문이다. 정캠에 참석하면 반갑게 얼굴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도 있고, 모터사이클을 타고 장거리를 오가며 여기저기 들러 구경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쪽 태평양에서 태풍 '콩레이'가 우리나라로 향하고 있다는 예보가 있었다. 올해 대부분 태풍은 일본이나 중국으로 방향을 틀었고, 우리나라를 향해 오는 것들도 다 와서 열대저기압으로 사그라졌었다. 콩레이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조금 기대를 했지만 이번에는 그게 아니었다. 태풍은 캠핑과 공연이 열리는 토요일 오후 정확하게 우리나라를 통과하는 것으로 예보됐다. 카페 운영진이 고민 끝에 정캠을 취소했다.

우리 회사 <경남도민일보>도 같은 날 인디밴드를 창원 돝섬에 초청해 시민들을 대상으로 무료공연을 열 예정이었지만 태풍 때문에 공연팀과 관람객 안전이 우려되고, 비바람으로 공연도 정상적으로 진행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해 한 달 뒤로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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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 원동역 마당 벽에 그려져 있는 ‘은하철도999’. 36년 전 '메텔'은 모든 어린이들의 연인이었다. / 조재영 기자

 

태풍에 날아간 캠핑

경남을 기준으로 하면, 태풍은 금요일 비와 바람으로 시작해 토요일 점심 무렵 끝이 났다. 아침에 전세로 사는 빌라 기둥 아래에서 조금씩 물이 세어 나오길래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이 한강이 되어 있었다. 물이 발목 높이까지 차 있었다. 옥상 귀퉁이 네 곳에 있는 물 빠짐 관 뚜껑에 낙엽이 달라붙어 물이 빠지지 않고 있었다. 우산을 쓰고 네 귀퉁이를 돌며 낙엽을 걷어냈다. 고여 있던 물은 쐐애액하는 소리와 함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물 빠지는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아래층 안방에 누워있던 각시가 놀라서 뛰어올라왔다.

하지만 태풍은 그 정도로 끝이 났다. 오후 2시쯤에는 파란 하늘이 보였다. 예상 보다 태풍의 진행 속도가 빨랐기 때문이다. 정캠이 열리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이타세 운영진이나 우리 회사는 최선의 판단을 한 셈이다. 예보대로 태풍이 움직이고, 행사를 강행했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아무도 모른다. 큰 사고가 나는 것 보다는 조금 아쉬운 게 더 낫다고 나는 생각했다. 태풍은 애초보다 조금 약해졌지만 상륙지점이 남해안이었기 때문에 강력했다. 부산 민락수변공원에서는 바닷속에 있던 2m 바위가 육지로 옮겨져 있는 것이 발견될 정도였다.

그래도 정캠이 열리지 못한 것이 아쉬워서 경남에 사는 이타세 회원 몇 명이 김해 무척산 아래에서 모이기로 했다. 우리 신문에 '오토바이 타고 유라시아 횡단'을 연재 중인 최정환 씨가 마련한 자리였다. 김해에서 일식집을 운영하는 최 씨는 작년에 5학년 아들을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파미르고원을 넘어 유라시아를 횡단하고 돌아왔다.

나는 이번 모임에 차를 끌고 갔고, 다른 이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 김해 시내에서 최 씨와 만나 장을 본 뒤 그것을 차에 싣고, 최 씨의 오토바이를 따라갔다. 우리는 김해시 생림면 최 씨의 촌집 마당에 자리 잡았다. 총 6명이 모였는데 묘하게 이미 유라시아횡단을 한 3명과 국내에서만 돌아다닌 3명이었다. 곧 세계 여행 이야기가 쏟아졌다. 직접 불에 구운 삼겹살바베큐와 바다회가 자꾸 젓가락을 들게 했다. 밤이 깊도록 이야기는 이어졌다. 새벽이 와서 안개가 짙을 때 나는 다른 이들을 남겨두고 고속도로를 달려 귀가했다.

모터사이클, 자전거는 갈 수 없는 통도사

일요일을 가족과 함께 보낸 뒤 월요일 아침 모터사이클 덮개를 벗겼다. 다음날이 한글날인데, 일간 신문사는 공휴일 하루 전날 쉬고 공휴일에는 일을 하기 때문에 그날이 쉬는 날이었다. 어깨, 팔꿈치, 허벅지, 무릎에 보호대가 들어있는 자켓과 바지를 입었다. 부츠를 신고 헬멧을 썼다. 출발 준비가 끝났다. 적당한 기온에 하늘은 맑았다. 24번 국도를 타고 밀양 가지산을 넘었다. 가지산을 넘는 길은 두 길이 있다. 가지산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옛길이고, 하나는 4차로 자동차전용도로다. 모터사이클은 자동차전용도로를 탈 수 없기 때문에 잘 달리다가 가지산 앞에서 옛길로 갈아타야 한다. 옛길을 따라 오르면 석남터널을 지나게 된다. 터널을 지나면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이다. 그곳에서 언양을 거쳐 35번 국도를 타고 양산 통도사로 향했다. 통도사 입구 매표소에 도착했을 때 자동차 몇 대가 표를 사려고 줄을 서 있었다. 나도 자동차 뒤에 섰다. 그런데 제복을 입은 경비원이 모터사이클과 자전거는 입장할 수 없다며 매표소 옆에 있는 주차장에 주차하라고 했다. 주차장에 모터사이클을 주차하고, 헬멧을 벗었다. 경비원에게 왜 자동차는 되고 모터사이클과 자전거는 안 되는지 물었다.

"절에 올라가면 자동차는 지정된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사람만 움직이는데, 오토바이와 자전거는 절 안 아무 곳이나 돌아다니기 때문에 통제가 안 되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절 앞 주차장에서 통제를 잘하면 되지 않습니까?"

"통제할 사람이 없어요. 통제할 사람을 뽑아야 하는데 절에 그럴 만한 돈이 없습니다."

"여기서 절까지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1.5km 정도 됩니다."

"그럼 그 거리를 자동차 탄 사람들은 차를 타고 가고, 오토바이 자전거를 타고 온 사람들은 걸어가야 한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이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이다. 들여보내려면 다 들여보내고, 안 들여보내려면 모두 통제를 해야지 특정 교통수단만 되고 나머지는 안된다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처사다. 더구나 종교 시설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 더욱 분노를 일으켰다. 합천 해인사를 비롯해 대부분의 절은 교통수단의 종류를 따지지 않는다. 다만 절 아래 주차장까지만 탈 것을 허용하고 나머지 일정 거리는 걸어서 오르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통도사는 아예 매표소에서부터 오토바이와 자전거 진입을 막고 있으니 어찌 욕을 하지 않을까.

하지만 눈앞에 있는 나이 든 경비원을 붙잡고 따져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어서 그만두었다. 먼 거리를 달려서 통도사를 찾아갔지만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미련 없이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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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길을 달려 통도사 입구에 도착했지만 모토사이클과 자전거는 출입을 금지한다는 절의 방침 때문에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자동차가 매표소를 통과하고 있다

 

원동역

모터사이클 시동을 걸었다. 35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다 어곡공단 쪽으로 들어가서 가파른 새미기고개를 넘었다. 고개를 넘어가면 낙동강변 원동면으로 길이 이어진다. 커다란 정자나무가 서 있는 들판에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풍경은 언제나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화제리 삼거리에서 1022번 지방도를 만난다. 이 지방도는 낙동강을 따라간다. 남쪽으로 가면 양산시내 쪽으로 가게 되고, 북쪽으로 가면 밀양시 삼랑진으로 가게 된다.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달린다. 도로에는 주말에 지나간 태풍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군데군데 토사가 깔려있고, 물이 흐르기도 한다. 이런 길에서 과속을 하면 미끄러지는 사고를 내기 십상이다. 이 길은 군데군데 쉬어갈 수 있도록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낙동강을 굽어보기 좋은 곳에 잠시 멈춰서 사진을 찍었다. 하늘은 맑았지만, 태풍으로 불어난 강물은 아직도 탁한 색이었다. 푸른 강물이 아니어서 아쉬웠지만 탁 트인 풍경은 가슴을 시원하게 했다. 적당하게 불어오는 강바람도 좋았다. 강 옆으로 철길이 길게 뻗어있다. 저 철길은 밀양, 대구를 지나 서울까지 이어진다. 통일이 되면 철길이 북한 땅을 지나 중국, 러시아로도 이어질 것이다. 그러면 기차를 타고 유럽 끝까지 여행할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조그만 오토바이를 기차에 싣고 출발해서 중간중간 내려서 구경을 하고 달리고, 힘들면 다시 기차를 타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멋지지 않은가?

오랜만에 원동역에 들렀다. 역 마당에 마을버스 한 대가 들어왔다가 승객 몇 명을 내려놓고 머리를 돌렸다. 승객이 뿔뿔이 흩어졌다. 마을버스는 시동이 꺼졌다. 다음 출발 시각까지 대기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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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동역에 정차해 승객을 태우고 밀양 쪽으로 출발하는 기차.

 

마당 옆에는 대여자전거가 늘어서 있고, 벽에는 커다란 천사 날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오래된 우체통도 하나 놓여있다. 모두 사진을 찍기 위한 것들이다. 천사 날개 그림 옆에는 어릴 적에 넋을 놓고 봤던 TV 만화영화 '은하철도999'의 기차와 '메텔' 그림이 있다.

5학년 무렵이었다. 은하철도999는 일요일 아침에 했는데, 초등학생(당시 국민학생)들에게는 엄청나게 인기가 많았다.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면~" 하는 주제곡이 지금도 또렷이 생각날 정도다. 아이들은 주인공 '철이'를 부러워했다. 늘 아름다운 메텔과 함께 다니고 그녀로부터 보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은하철도999를 볼 수 없기도 했다. 우리 집에서는 그 당시 담배 농사를 지었는데 일요일이 되면 온 가족이 일에 매달려야 했다. 나는 막내였고 어렸지만 그래도 작은 손이라도 보태야 했다. 일하러 담배 논에 갔다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집에 와서는 은하철도999를 몰래 보기도 했다. 아마도 부모님이나 형님 누나들은 내가 그렇게 하는 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알면서도 모른 척해주었을 것이다. 그때는 은하철도999를 보지 않으면 학교에서 친구들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지경이니 어린 나로서는 작은 죄책감이 생기는 걸 감수하고라도 그렇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철딱서니 없는 행동이었음을 고백한다.

역 안팎을 구경하고 있는 사이 남쪽에서 온 기차 한 대와 북쪽에서 온 기차 한 대가 지축을 울리며 지나갔다.

맛있는 원두로 내린 커피 한 잔이 간절했지만 시골 작은 역에 그런 것이 있을 턱이 없었다. 자판기에서 음료 하나를 사서 마셨다.

기차가 도착하고 할머니 할아버지 몇 분이 내렸다. 그들은 대기하고 있던 마을버스를 탔다. 마을버스가 시동을 걸었다. 원동역은 도착점과 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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