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하나는 업고 하나는 배고 괴기 장사했지예"
고등어·갈치·민어 갖가지 생선…진주 시장 곳곳서 40년간 팔아
산청 내대골짜기 총각과 결혼…뒷수발 마다치 않은 남편 덕에 장사하며 어려운 살림 버텨와
한글 다 모르고 못 배운 게 한…마음 알아주는 가족 있어 행복

"중앙시장 가서 괴기 떼다가 괴기장사를 시작했어예. 시내서 도동 끄트머리까지 팔러댕깄다아이가. 과일이 쌀 때는 떼다가 과일도 팔고. 아 하나는 등에 업고 아 하나는 뱃속에 있고…."

황윤심(67) 엄니. 생선 장사를 40년이나 했다. 처음에는 뭐가 뭔지도 몰라 물어물어 시작했다. 남들 하는 거 곁눈질로 봐가면서 진주중앙시장이나 삼천포 가서 중매인한테 떼와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도 팔고 장날 노점에서도 팔았다.

▲ 생선장사 40년 하다가 얼마 전 접은 진주시 망경동 황윤심(67) 엄니. /권영란

"새디기 때 기미가 씌워가꼬 똑 보도 못했다아입니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중앙시장서 그리 댕깄는데…. 서러워도 퍼질러 울고 있을 여가가 없었어예. 도동에는 하우스를 마이 해가꼬 비닐 걷어 고물에 팔고 비누로 바까오고 그리도 했어예."

생선 장사 몇 년 만에 얼마간 돈이 모여 리어카도 사게 됐다. 윤심 엄니는 더 이상 머리에 이고 다니지 않아도 됐다.

"어찌나 좋던지. 머리에 이고 다니면 저녁 되면 천근만근인데. 여름 되면 게도 팔고 내는 주로 고등어 갈치 같은 반찬 고기를 마이 팔았어예. 완사장에도 나가고 평거동 금요장에서도 10년이나 장사했네."

장사가 잘돼 몇 년 지나서는 제사 고기도 다뤘다. 반찬고기에 비해 조기 서대 민어 같은 제사 고기는 비싼 거라 못 팔고 남으면 손해가 컸다. 다행히 손질도 하고 간도 잘해 떼어 오는 것마다 잘 팔렸다.

"내가 성격이 선들선들해서 장사를 잘해예. 대목 되몬 어찌나 잘 팔리는지 그걸 다 손질 할라쿠몬 힘들어. 우리 영감이 거들어면서 뒷수발해주니라 힘들었제. 영감 손이 안 좋은데 비늘 치고 그라몬…. 요즘 사람들은 손질을 해놔야 사가니까."

▲ 윤심 엄니가 오랫동안 사용하던 칼과 도마, 비늘긁개. /권영란

◇부모복 없이 자랐지만 시집가 가족 생겨

"윤양병원에서 엄니가 죽었삤어. 내가 물건을 떼러 갔다가 장사를 하는데 그날따라 물건이 안 팔리더라고. 집에 오니 엄니가 병원에 있대서 갔더니 울 엄니가, 니가 장사하고 올매나 딜건데 빨리 집에 가라꼬, 가서 좀 쉬라꼬 자꾸 그리 말하는 기라. 그라고는 울 어매가 그질로 말문을 닫았삤어…. 복막염이었던게야. 그질로 말을 안하고 죽어삤어."

윤심 엄니는 그렇게 어머니를 잃은 게 가슴에 맺혔던 걸까. 깊이 묻어뒀던 이야기를 먼저 풀어내었다. 친정어머니는 윤심 엄니가 30대 중반일 때 작고했다.

"우리 딸이 열 몇 살 때였는데 지금 마흔셋이니…. 나는 내 먹고살기 어려버서 인자 울 어매가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겠네."

윤심 엄니 고향은 하동읍이다.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딱히 학교를 다닌 기억이 없다. 누구 하나 학교 가라고 챙겨주는 사람 없었고 그저 어른들이 시키는 일을 해내야 했다.

"내는 친아부지 얼굴도 모리는데 울 엄니가 나를 두고 갔삤어. 서모 올케 밑에서 자라 애 봐라, 밥 해라 죽어라 일만 시키고…. 천덕꾸러기도 그런 천덕꾸러기가 오딨어꼬. 하루는 울 엄마가 데불러 왔는데, 내가 우리 엄마가 아니라꼬 안 따라갈끼라고 막 울고 그랬어. 엄니 따라 하동읍에 가서 오빠랑 셋이서 살았제."

세 식구가 한데 모였지만 먹고살기 위해서 엄마는 엄마대로 쌀장사 하러 다니고, 오빠는 오빠대로 동네를 돌아다니고, 어린 윤심 엄니는 살갑게 마음 붙일 이 없이 자랐다.

"지청꾸러기로 자라다보이…. 내가 뻐들하이 키만 크고 우찌 자랐는지도 기억나지 않네."

윤심 엄니는 열아홉에 산청 내대골짜기로 시집을 갔다. 8살 차이 나는 총각이었다.

▲ 황윤심 엄니 열아홉 살 무렵 혼인사진.

"우짜다보이 열일곱에 서울 이모집에 식모살이 갔다가 한 1~2년 뒤에 하동으로 내려왔는데 동네 사람이 낼로 보더만 시집가라더만. 아무것도 없으니 그냥 시집간 거지."

내대골짜기는 산청군에서도 지리산 자락에 붙어 심심산골이다. 윤심 엄니가 시집갈 무렵인 1970년대 초반 당시는 그 동네로 들어가는 버스도 없었다.

"곡점 삼거리서 내대까지 걸어간 거야. 10리가 훨씬 넘는 길이야. 꼬불꼬불 길을 걷고 또랑가에 걸쳐놓은 나무있제? 노다리라는 걸 건너갔어. 새 각시가 흙을 뽀얗게 뒤집어쓰고 참말로…. 내대 묵은터에 시댁이 있었어."

시댁은 보리쌀도 겨우 먹었다. 딸 하나 데리고 혼자 사는 동서가 있어 살림을 맡아 했다. 논밭이며 제법 있었지만 시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갚아야 할 이자가 많았다. 세월이 가니 시나브로 빚은 갚았지만 살림은 나아지지는 않았다.

"산죽대가꼬 김빨 맹글고, 도마도, 꼬재이도 맹글고…. 그래가꼬 돈을 모아 돼지새끼를 샀어. 도저히 이리 살아가꼬 안되겠다 싶어. 돼지를 치서 팔아 인자는 소새끼를 샀어. 그리 키워 돈을 맨들었더만 우리 시아버지가 그걸 들고 가서 빚을 갚아가꼬 왔어."

윤심 엄니는 골짜기서 계속 이래 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나중에 어찌 되더라도 주머니에 돈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어야겠다 싶었다.

"그래가꼬 나락농사를 짓는데 내가 어른들 몰래 나락 한 부대를 빼가꼬 팔았어. 우찌우찌 해가꼬 돈 1만 원을 찡가놨던기라."

내대골짜기에서 시집살이를 한 지 일곱 해나 됐을까? 윤심 엄니는 남편을 따라 진주로 이사를 나왔다.

"큰머시마가 그때 일곱 살이었는데 지금 마흔 일곱이야. 갸는 저그 할배한테 맡기고 작은 아들은 업고, 딸을 뱃속에 배고 진주로 나왔어. 그니께네 내가 26살인가 일곱인가. 굶어죽더라도 여서보다는 낫것다 싶었제."

어른들 몰래 요령껏 챙겨둔 1만 원은 진주살이 시작할 때 종잣돈이 되었다. 1만 원 중 3000원은 도동에 셋방을 얻었고 연탄 사고 냄비 그릇 사고 나니 2000원이 남았다.

"그질로 괴기 장사를 시작했제. 그래가꼬 자식들 키우고…. 울 어매가 우리 멕여키울라꼬 쌀장사 하더만 그것도 좀 본 게 있다고, 우찌하니 장사가 잘되더라고. 내가 이고댕기며 설렁설렁 에북 장사를 잘했구만. 돈이 뽀시락 뽀시락 모이대."

▲ 1991년 윤심 엄니 마흔 살 무렵 한복을 곱게 입고 진주박물관 앞에서 남편과 함께 찍었다.

◇괜스레 기가 죽어…한글 깨치고는 싶은데

윤심 엄니는 지금도 한글을 잘 모른다. 받침이 없는 글자는 그래도 띄엄띄엄 읽지만 시원스레 글을 읽지는 못한다. 남들 앞에서 보란 듯이 글을 읽어보고도 싶다.

"넘보기는 멀끔히 그리 보이는데 내가 한글도 제대로 몰라. 수븐 거는 대충 아는데 어려운 받침 있는 거는 모리것더라고. 글자만 보면 눈이 컴컴해지고 머리가 아프고 그래. 시상에 인자 글 모리는 사람이 없을끼구만, 지금이라도 하몬 되까. 부끄럽기도 하고 넘새시러버서…."

먹고사니라고 억척을 떨 때는 글자를 읽니 모르니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제 바쁠 일이 없으니 이런저런 생각에 되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가 못 배운 게 한이 돼서, 내 맴을 아니께 울 영감이 니가 그리 꼭 할 마음이 있으몬 배워준다카더만. 근디 내는 책을 펴니께 온 데가 다 아푸더만. 배우고는 싶은데…. 밖에 나가몬 어딘지 모르게 기가 죽고 들어간다. 그게 글자 때문인기라."

이제는 남한테 손 안 벌릴 만큼 그럭저럭 먹고살지만 한글을 깨치지 못한 것은 못내 마음에 두고 있다. 얼마 전부터는 자식들이 관두래서 생선장사도 접었다.

"고생은 해도 아들 둘, 딸 하나 있는 게 옴마 마음 알아주고…. 울 영감도 고생을 마이 했어예. 글싸도 참말 자상하구만예. 어렸을 때야 부모복 없어 가족도 없이 살았지만, 내는 시집 가서 가족 생기고 자식들 낳고 잘 살아왔어예." /글·사진 시민기자 권영란

※ 본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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