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한, 바람 불어도 야단스럽지 않은
부모 없이 산골서 살아온 주인공…백발노인이던 고을 부사에 반해
포근한 그의 시 세계에 위로받고…관기가 되어 부사 어른 평생 모셔
부사가 지어준 새로운 이름 '부용'…자기 무덤에 심은 꽃도 '부용화'로

산골 마을 선비 집에 한 송이 꽃처럼 예쁜 처녀가 있었어요.

그의 얼굴이 하얀 옥처럼 고왔고, 눈, 코, 입은 조각가가 다듬은 듯이 그 선이 선명하고 아름다웠어요.

어느 날, 선비가 아침나절 처녀를 사랑방으로 불러 앉혀 놓고 말을 했어요. 선비는 부모도 없는 먼 친척의 아이를 데려다 20여 년을 키웠지요.

"민지야, 너도 이제 스무 살이 넘었으니 가정을 이루는 것이 어떻겠니?"

"저는 이미 저의 갈 길을 정해 두었습니다."

"뭐? 정해 두었어? 누구냐? 어느 대감의 자제이냐?"

처녀는 대답을 머뭇거리다 이미 결심을 한 듯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이 고을의 부사 어른이옵니다."

처녀의 답을 듣자, 아저씨는 놀라서 고함치듯 말했어요.

"뭐라고? 부사 어른? 그 어른은 지체가 높고 감히 네가 넘볼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 분은 이미 백발의 노인이 아니냐?"

처녀는 이미 각오라도 한 듯이 태연하게 말했어요.

"부모 없이 홀로 아프게 살아온 저는 그분의 시를 읽으면 너무도 포근해요. 그런 분 곁에서 평생을 살고 싶어요. 그분의 평화로운 웃음도…."

처녀는 그 말을 남기고 아저씨 방을 나와 버렸어요. 여태까지 자라오면서 한 번도 아저씨의 말을 거역해 본 적이 없는 처녀로서는 마음이 무척 아려왔어요.

다음날, 처녀는 고을의 원이 사는 관청으로 찾아갔어요. 문을 지키던 포졸이 대문에서 처녀에게 물었어요.

"어떻게 왔는가?"

"고을의 부사 어른을 만나 뵙고 싶습니다."

처녀는 아주 어렵게 마을의 최고 관리인 부사 어른을 직접 만나게 되었어요. 처녀는 관헌 넓은 마루에서 부사 어른과 마주 앉게 되었어요.

"너는 지난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처녀가 아니냐. 많은 선비들을 제치고. "

"부사 어른, 저를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오늘 부사 어른을 찾아온 것은 어려운 청이 있어서 왔습니다."

"나라의 법이 허락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주마."

처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숨을 거칠게 쉬다가 말했어요.

"부사 어른, 저는 관기가 되고 싶습니다."

"뭐라고? 선녀처럼 예쁜 네가 기생이 되겠다고? 기생이 되어 고을 선비들과 시를 짓고 노래를 하며 춤을 추는 관기가 되겠다고?"

"예, 부사 어른. 저는 그렇게 해서라도 시와 문장으로 뛰어난 부사 어른을 가까이서 평생 모시고 싶습니다."

"허어. 나의 곁에서 시를 지으며 평생을?"

백발의 부사 어른은 너무 흥분되어 처녀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어요.

"네가 한 말이 사실이냐?"

"예, 부사 어른. 저의 말에 한 치의 거짓이 없습니다."

백발의 부사 어른은 손을 바르르 떨며 깊은 생각에 잠겼어요. 그러다 숨을 고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노한 목소리로 처녀를 꾸중하듯 말했어요.

"안 돼. 자네는 아직 청춘이 구만리야. 그리고 그 아름다운 얼굴에다, 시를 짓는 재주도 뛰어나니, 양반집으로 시집을 가서 행복하게 살아라."

그 말을 남기고, 부사 어른은 자리를 떠나버렸어요.

그러나 처녀는 부사 어른의 포근한 인품과 시 세계를 떨쳐버릴 수 없었어요. 그 부사 어른의 시를 읽으면 호수의 안개처럼, 봄날 들판의 아지랑이처럼 마음이 평화롭기가 한량없었어요.

그렇게 부사 어른에게 꾸중을 듣고도 처녀는 끊임없이 부사 어른을 찾아가 결국 관기가 되는 허락을 받아, 거문고, 춤 등 어려운 관기 수업을 받았어요.

관기란 한양에서 귀한 손님이 내려오면 이를 영접하거나 시중을 드는 일이고, 간혹 부사 어른이 마을 선비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시중을 드는 것이 그의 업무였어요.

달이 밝은 초가을 밤이었어요. 부사 어른은 관헌의 연못가에 있는 정자에 앉아 낭랑한 목소리로 시를 읊으며 인생의 외로움을 달래었어요.

"가을은 낙엽 하나에도 이별의 애창곡을 달아두었구나."

그때였어요. 어디선가 사뿐이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나더니 시 한 구절이 흘러나왔어요.

"세월이 얼굴에 주름은 늘리겠지만, 부사 어른의 마음을 시들게 못하지요."

부사 어른은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았어요. 관기인 처녀가 거문고를 메고 작은 술상을 준비해서 정자로 올라오고 있었어요.

"네가 웬일이냐?"

처녀가 수줍은 얼굴로 부사 어른 앞에 다소곳이 앉았어요. 처녀는 부사 어른과 시를 낭송하며 가을밤을 즐긴다는 것이 하늘의 무지개 위를 날고 있는 것만큼이나 황홀했어요.

처녀의 가슴속에는 청춘의 뜨거운 사랑이 물레방아처럼 콩닥거렸어요.

'아, 문을 닫아도 새어드는 달빛, 가슴을 닫아도 스며드는 사랑.'

그때, 부사가 처녀의 손목을 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처녀를 불렀어요.

"얘야, 내가 너에게 고운 이름 하나 지어 줄게 받겠느냐?"

"영광이지요. 부사 어른이 저에게 주시는 이름인데."

"너는 사람이기보다는 한 송이 꽃이다. 꽃잎도 부드럽고 꽃잎의 색깔도 은은하고 바람이 불어도 야단스럽지 않은 부용화, 너를 '부용'이라고 부르마."

"부용! 이 크신 은혜를 어떻게?"

"지금부터 너를 부용이라고 부르마. 부용아, 이리 가까이 오너라."

부용은 머뭇거림도 없이 부사 어른 무릎 앞으로 가서 숨을 떨며 앉았어요.

"부용아, 사랑이란 고이 아끼는 것이 좋은 거란다. "

"알아요. 부사 어른의 마음을. 저는 일생 동안 부사 어른 곁에서 시를 읊고 노래하며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으로 알고 살겠어요. "

부용은 부사 어른 곁에서 시중 드는 그 순간, 순간이 너무도 행복했어요. 부사 어른이 부처처럼 숭고하게 보이다가, 어떤 때에는 너무도 아름다운 연인처럼 가까이 보이기도 했어요.

이 세상에 영원이라는 것은 없는 것인가 봐요. 그는 시의 스승으로, 한편으로 연인으로 모시던 부사 어른이 돌아가시자, 삼년상을 정성껏 모셨어요.

부용이 이 세상을 떠날 즈음, 그는 하인을 불러 명령했어요.

"나를 부사 어른 가까이 묻어다오. 그리고 내 무덤 주변에 관헌 정자 근처에 있는 꽃을 옮겨다 심어라. 그 꽃을 '부용화'라고 불러라."

우리는 미인을 비유할 적에 양귀비꽃이나 부용화에 비유하지요.

부용 처녀가 부사 어른에게 마음이 끌리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부용화의 꽃말은 '매혹', '섬세한 아름다움', '정숙한 여인', '행운은 반드시 온다'라고 해요. /시민기자 조현술(동화작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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