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과 성공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지요
마지막 단계까지 온힘을 쏟고 지금 이 순간 즐기면 불행도 멈춰

요즘 나와 자주 만나는 백수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마케팅을 전공했다. 우리 동네 어떤 식당, 카페, 술집 등을 다 알고 있다. 어떤 가게가 어떤 콘셉트로 장사를 하는지 관심이 많다. 덕분에 이 친구와 만날 때는 어디를 갈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매번 새로운 장소로 나를 데려가 준다. 시내를 걸을 때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곳저곳 다 가본다. 나도 같이 신난다.

친구는 마케팅도 공부할 겸, 강원도 평창에서 올림픽을 즐겼다. 사진을 한가득 보내주기도 했다. 백수가 길어지고 있지만 여의치 않고 인생을 즐기고 있다. 이 친구는 일이 잘 안 풀려도 충분히 인생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다시 한번 행복이 외부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문화센터에서 심리학 특강을 하기로 하였으나 신청자가 적어서 폐강되었다. 실망하지 않았다. 덕분에 다른 일을 할 시간이 더 생긴 셈이다. 요즘 마음이 더 단단해진 것 같다. 실패를 많이 해서 내성이 생긴 것일까? 웬만한 시련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친구의 영향도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유명인이 자살하는 걸 보면서 행복이 성공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우리는 성공만 바라고 있으니 얼마나 웃긴가? 롤플레잉 게임을 할 때도 퀘스트를 수행하는 그 과정이 재미가 있었다. 마지막 단계까지 가면 허무함이 밀려왔다. 그런데 우리는 게임의 과정을 즐기지 못하고 빨리 엔딩을 보길 원하는 것 같다.

어릴 때 '스타크래프트'란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내가 불리한 상황에 놓이자, 게임을 잘했던 친구가 나 대신 마우스를 잡았다. 친구는 도저히 못 이길 것 같다면서, 수비를 열심히 한 뒤 업그레이드가 막 끝난 유닛을 총동원하여 상대방을 공격했다. 그것이 최선이라고 했다. 침착하게 플레이하는 친구를 보면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느꼈다. 그때 게임에서 졌지만, 큰 인상을 받았다. 아마 그때 게임에서 쉽게 이겼더라면 나는 그 장면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행복은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 있을 수도 있다. 상황이 아무리 좋지 않아도, 그 상황에 맞는 최선이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만약 행복이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 있다면, 행복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당연한 듯이 행복이 결과나 성공에 있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신기루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런 잘못된 믿음 때문에 현재를 불행하게 사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이 과정에 있다. 행복이 이 순간에만 있다는 것을 알면, 그래서 현재를 기대한다면, 실패해도 잘 버틸 수가 있었다. 이것은 내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물론 우리는 성공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 성공하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괴로움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 과연 우리가 작은 실패에 실망하고, 걱정하고, 우울해하는 것이 우리의 성공에 도움이 될까? 그 물음을 자신에게 던져야 한다. 실패해도 잘 버틴다면 그것이 성공에 더 유리한 것이 아닐까? 그러려면 우리는 행복과 성공이 모두 과정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심리학자 아들러는 우리의 우울, 불안을 비롯한 증상이 어떤 방향으로의 '움직임'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인간이 움직일 수 있고, 그 움직임의 가능성이 있을 때 정신질환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들러는 차라리 사지가 마비되어 전혀 움직일 수 없다면 어떤 정신활동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면 우울이나 불안도 없을 것이다.

결국, 삶의 여지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 단순히 지금 현재에 만족한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여지없이 해야 한다. 그래서 공백 없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자신에게 보여줄 때야 비로소 불행이 멈춘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 본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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