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평화 분위기 가로막는 세력 발호
촌철살인 노회찬 빈자리 더욱 커보여

머리에 석남(石南)꽃을 꽃고 네가 죽으면

머리에 석남꽃을 꽃고 나도 죽어서

서른 해만 서른 해만 더 함께 살아볼거나

그가 떠난 후 시도 때도 없이 타고 올라와 웅얼거리는 소리. 그가 고등학생 시절 서정주의 수필 '석남꽃'의 배경에 얽힌 설화를 읽고 감동하여 작곡했다는 노래 '소연가'다. 그가 떠난 다음 날 아침 김어준은 방송을 마치며 이 노래를 켰다. 미소를 머금은 듯한 그의 육성이 무반주로 흘러나온다. 첼로를 손수 켜는 내공 높은 음악도였다 했는데 발성은 영락없는 음치다. 그것조차 송두리째 '그'로 느껴져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방송 이후 속 깊은 젊은이들이 헐벗은 곡조에 멜로디와 화음을 입히고 그의 육성을 얹어 추모에 동참했다. 노래는 삽시간에 퍼졌다.

노회찬. 그가 떠나고 석 달째. 공동이 너무 크다. 쉼 없이 터지는 정치적 변화의 굽이마다 그를 떠올린다. 대체재가 없는 자원임을 절감할수록 애통함은 더하다. 저 나쁜 놈들은 저리도 뻔뻔하게 살아있는데 그게 무슨 죽을죄라도 된다고 목숨을 내던졌냐고. 아깝고 원망스럽다.

그를 처음 본 것은 2004년이었다. 빤히 보이는 속내를 교언영색으로 포장해 번드르르하게 늘어놓으며 백성의 등골을 빼먹는 것이 '정치인'이라 이름 붙은 거개의 화상들이라. 불신의 골이 깊어도 용뺄 도리 없이 역겨움을 참고 견디는 와중에 그가 등장한 것이다. "50년 동안 똑같은 판에다 삼겹살 구워 먹으면 고기가 시커메집니다. 판을 갈 때가 이제 왔습니다." 심야 토론에 나와 내지른 그의 일갈은 박하 한 줌을 베어 문 것 같은 신선함이었다. 영혼이 빠진 기계음처럼 날아다니는 '정치 언어'만 범람했을 뿐 서민의 일상어를 날것 그대로 쓰며 진솔히 다가오는 정치인은 귀했다.

노회찬은 등장하자마자 말 그대로 40년 된 불판을 갈아치웠다. 정당투표가 허용돼 1인 2표가 행사된 비례대표의 의석 향배가 초미의 관심사였던 것이 17대 총선이다. 충청의 지연에 의지해 9선 의원으로 이 나라 정치를 쥐락펴락하던 수구 정치의 대표적 인물인 김종필이 자민련의 비례대표 1번을 달고 10선 도전에 나섰다. '불판론'을 들고나온 노회찬은 노동자, 농민의 권익을 위해 싸우겠노라 나선 민주노동당의 비례대표 8번이었다. 새벽까지 시소가 거듭되며 피를 말리다 민주노동당 13.03%, 자민련 2.82%로 끝났다. 낙선한 김종필은 그길로 정계를 은퇴했다. 그야말로 40년 된 불판을 갈아엎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그 후 14년. 정치인으로서의 그는 부침이 있었고 그러므로 의당 좌절과 환희의 순간이 있었을 터다. 그러나 그런 개인적 영락과는 무관하게 '노회찬'은 존재 자체로 서민의 친구요 위안이요 희망의 아이콘이 되었다. "6411번 버스라고 있습니다"로 시작되는 빛나는 그의 연설은 정치가 무엇을 위해 있으며 정당의 궁극적 목표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를 명징하게 가리켰다. 그는 검소하고 겸손하게 유머를 잃지 않고 그 길을 걸어온 독보적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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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조국은 피맺힌 70년 분단역사를 끝장내려는 의지가 어느 때보다 넘쳐난다. 우리 대통령이 평양에서 북한 민중의 열렬한 박수를 받으며 눈물겨운 연설을 하고, 젊은 위원장 부부와 백두산을 오르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나라 안팎에서 그 길을 가로막는 훼방세력의 가당찮은 발호는 여전하다. 행여 꺼질세라 불안하고 초조할 때 더더욱 당신의 굳셈과 여유와 해학이 그립다. 석남꽃 두른 '최항'이 깨어났듯이 다시 돌아와 한 서른 해 늙다 갈 순 없는가 그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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