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이 불리한 전장에서 이겼던 까닭
421년 전 오늘 정유재란 상황
조선 전투함 판옥선, 왜선 압도
1층 노군·2층 전투원 배치 효율적
화포 써서 적선 박살내는 데 주력
학익진, 포 화력 집중하려는 전형
원하는 곳 원하는 시간 골라 전투

오늘은 음력으로 9월 14일이다. 이 시점으로부터 421년 전 정유년(1597년)으로 잠시 돌아가보자. 정유재란 발발 첫해다. 12일 전 9월 2일, 장수 배설은 도주했다. 9월 14일에는 적선 55척이 접근했다. 그리고 이순신에게는'아직 13척의 전선이 있을 뿐'이었다. 이틀 후면 임진왜란, 아니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 손꼽을 만한 역전의 전투가 벌어질 순간이었다.

◇명량해전 직전의 조선 수군 상황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조·명 연합군에 남쪽으로 밀려난 일본과 명나라는 강화교섭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교섭은 희대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1597년 1월 정유재란이 발발한다.

양측 모두 휴전기간 중 많은 준비를 했지만 전황은 조선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고니시의 간계가 결정적이었다. 그해 2월 이순신은 하옥되고 사형까지 언도받았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다. 선조(宣祖)는 이순신을 임금을 무시하고 나라를 저버렸기 때문에 죽여야 마땅하다고 했다. 천만 다행으로 4월 1일 석방되었다.

하지만 조선 수군은 허무하게도 7월 15일 궤멸한다(칠천량해전). 8월 3일 이순신은 거의 허울뿐인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되어 남부지방을 돌면서 전력을 정비하던 중 수군을 폐하고 육지에서 싸우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에 그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 전선 12척이 있으니 죽을 힘을 내어 싸우겠다'는 답서를 올린다. 전황은 더욱 나빠져 8월 16일 남원이 함락되고 왜군은 전주를 거쳐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했다.

◇일본 수군의 전력

일본은 섬나라이니까 수군세력은 당연히 강할 것이라는 선입관이 있다. 실록에 의하면 "왜적은 수전에 강하지만 육지에 오르면 불리하다는 것으로 오로지 육지의 방어에 힘쓰기를 청하니 이에 호남, 영남의 큰 읍성을 증축하고 수리하게 하였다(1591년, 임진왜란 발발 1년 전)" 하고 같은 해 신립도 "왜군은 해전에 능하지만 육지에 오르기만 하면 원활하지 못하다"고 하여 육지방어에 전력하기를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해전 경험이 거의 없고 대부분의 배도 수송에만 주력한 상황이었다. 개전 첫날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아무런 호위함도 없었다. 임란 당시 16만 명에 달한 왜군 중 수군은 1만 명도 되지 않았다. 배를 봐도 왜선은 규모가 큰 아타케부네(안택선·安宅船) 일부와 주력은 세키부네(관선·關船)라고 부르는 작은 배가 대부분이었다. 안택선이란 말은 배위에 집처럼 생긴 구조물이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이 아타케부네가 일본 수군이 가진 가장 큰 배였는데 그 수는 많지 않았고 대부분 세키부네를 중심으로 전투가 이루어졌다. 세키부네의 크기는 판옥선의 절반 수준 정도였다. 당시 일본도 화포가 있기는 했지만 배의 내구성이 반발력을 받쳐줄 형편이 못되어 아주 소수만 운영 가능했고 그것도 천장에 끈으로 매달아서 쏴야 할 상황이었다. 끈에 매달려 있다 보니 당연히 명중도는 급격하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의 승리 요인

1. 선진 무기체계. 조선 수군의 주력 전투함 판옥선(板屋船)은 2층 구조 대형 전투함이다. 거북선을 아주 신비한 무기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판옥선의 개량형일 가능성이 높다. 판옥선 1층에는 비전투원인 노군을 배치하고 2층에는 전투원을 배치하여 전투 중에도 노군들이 안전하게 노를 저을 수 있었다. 또 규모가 커서 높은 곳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었고 튼튼해서 포격의 충격도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배의 거의 모든 방향에 화포를 배치하여 집중적인 포사격이 가능했는데 평평한 배 바닥과 조선식 노 덕분에 빠르게 배를 돌릴 수 있었다. 한마디로 포격전에 특화된 배였다. 그리고 천·지·현·황(天·地·鉉·黃) 자 총통 등 다양한 화포가 있었다.

▲ 〈각선도본〉(규장각 소장)에 나타난 판옥선도. 용 그림이 있는 2층 갑판이 전투병들을 위한 공간이고 노군들은 그 아래 공간에서 작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적합한 전술. 일본 수군뿐 아니라 그 당시 대부분의 국가들은 어느 정도 피해를 준 다음 갈고리로 적 배를 끌어당겨서 붙여놓은 다음 백병전을 통해서 전세를 가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충무공은 적의 사거리(조총의 경우 약 50m) 밖에서 화포를 이용, 적선을 박살내는 데 주력했다. 전술도 화력을 집중하기 위해 해전에서 최초로 진형을 도입해 실전에 적용했다. 한산대첩에서 사용한 학익진도 원거리에서 포의 화력을 집중하기 위한 진형이다. 그래서 충무공의 전과를 보면 우리 피해는 적고 왜선의 피해는 막대했다. 이렇게 부서진 배를 보충하기 위해 도요토미는 "삼나무는 배의 건조에만 사용하라" 같은 극단적인 명령을 내리면서 대응했다.

거북선이 돌격용 배이고 왜선을 들이받아서 깨트렸다는 이야기들은 사실과 다를 가능성이 많다. 오히려 그렇게 싸운 원균은 조선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안방중이 쓴 <은봉전서(隱峯全書)>에 따르면 원균이 통제사로 부임하던 날 찾아와 말하길 "적을 만나 싸울 때 거리가 멀면 편전(片箭)을 쓰고 가까우면 장전(長箭)을 쓰며, 육박전이 벌어지면 칼을 사용하고 칼이 부러지면 곤봉으로 싸우니, 이기지 못할 리 없습니다"라고 한 대목이 있다. 기관총을 쥐어줬더니 그걸 휘둘러서 적의 머리를 부수겠다는 말이다. 안방중도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기를 "대장이 되어서 칼과 정을 사용하는 데 이른다면 옳겠는가?"라 했다. 안방중의 처는 원균집안 사람이었다.

하지만 명량에서는 우리 군 숫자가 부족해 진형을 구사하기 힘들었고 근접전도 불사했다. 그야말로 백척간두에 서 있는 상황이었다.

▲ 2012년 10월 전남 해남군과 진도군을 연결하는 울돌목에서 열린 '2012 명량대첩 축제'에서 고증을 통해 만들어진 판옥선 두 척이 당시 해전상황을 재현하는 모습. /연합뉴스

3. 이겨놓고 싸운다. 이런 와중에도 충무공은 임란 중 모든 전투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갔다. 원하는 곳 원하는 시간을 골라 전투를 벌였고 심지어 전선 13척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도 울돌목으로 전투장소를 골라냈다.

◇승리를 이끌어 낸 충무공의 한마디!

"이 승리는 천행(天幸)이다."

하지만 이것도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가능한 결과이다.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는 선조의 말대로 수군을 버리고 육전에 참여했다고 해서 누가 무어라 했을까? 수군에 대한 홀대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죽음이 눈앞에 보이는 부하장수들은 더 좋아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쓰러져 가는 나라와 백성들은? 동요하는 부하와 백성들의 목까지 베어가며 짧은 시간에 결전을 위한 준비를 이끌어 내고 선두에서 몸을 던져 모든 수군들을 이순신으로 만들어냈다. 국왕, 전세(戰勢), 심지어 부하장수까지 자신을 버리는 상황에서 그가 지켜야 할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얼마 전 국제 관함식에서 일본의 망발이 이어졌다. 관함식 사열을 받은 대통령 탑승함에 조선시대 대장군 기를 걸었고 일본은 이 깃발이 이순신 장군의 배에 걸렸던 것이라며 토를 달았다. 맥락상 전범기(욱일기)를 달지 못하게 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을 것이다. 군함은 국가 영토를 상징한다. 그리고 거기에 내걸린 깃발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전투함대의 지휘함을 기함(旗艦), 영어로 Flag Ship이라고 부르는 것도 깃발의 중요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불과 70여 년 전 아시아를 피로 물들인 곳에 서 있었던 깃발과 나라를 구하기 위해 백척간두에서 목숨을 바친 곳에 서 있었던 깃발을 등치시키는 후안무치는 어떻게 해야 나올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다. 정유년의 승리로부터 421년 지난 시점에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이 기획은 LH 한국토지주택공사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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