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은행처럼 지역 유무형 가치 저장
국제종자보관소 2008년 설립
기후변화·핵전쟁·재해 대비
인류 '최후의 날 저장고'불려
경남도기록원 지난 5월 개관
과거-미래 잇는 연결 통로
기록 '마지막 보루'인식 필요

내 먼 기억을 더듬어 보면 햇볕이 따뜻한 봄날, 어머니와 아버지는 겨우내 보관했던 씨앗을 빨간 고무함지에 한가득 붓고는 물을 넣어 10여 일 동안 그것을 정성스럽게 관리했다.

나는 그 물에 내 손을 담가 씨앗을 잡아보기도 했고 나뭇가지로 물을 휘휘 저으며 놀다가 야단을 맞기도 했다. 씨앗이 담긴 투명한 물에서는 하늘, 감나무,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나를 비추며 노란 싹을 피웠다. 시큼한 냄새가 나는 그 씨앗은 우리 가족의 생명이었다.

한 집의 생명이었던 종자가 인류의 생명을 담보하고 있다. 몇백 년이 흐른 후에도 어릴 적 내가 집에서 먹었던 밥을 우리의 후손들도 먹기 위해 북극 노르웨이령 스발바르제도에 세계의 종자를 보관하는 곳이 있다.

국제종자보관소는 북극권 스발바르제도에 있으며, 자연에 의한 대재앙이 발생했을 때를 대비해 종자를 보관하고 있다. /Global Seed Vault 홈페이지 캡처

◇스발바르 국제종자보관소

북위 78도의 북극권에 있는 스발바르제도에 스피츠베르겐 섬이 있다. 북극점에서는 약 1300km 거리다. 국제종자보관소(Global Seed Vault)는 2008년 2월 26일에 공식 설립되었다. 모두 3개의 지하 저장고에 1500만 종의 씨앗 표본을 보관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현재 세계 각국에서 보내온 약 450만 종의 씨앗을 저장하고 있다.

저장고 시설은 노르웨이 정부에서 비용을 지원하여 건설하고 국제연합(UN)산하 세계작물다양성재단(GCDT)에서 기금을 출연하여 북유럽 유전자 자원센터에서 운영·관리한다.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에 비유하여 '최후의 날 저장고'라 부르기도 하며, 2008년 <타임>이 발표한 최고의 발명품 6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설립 목적은 기후변화, 핵전쟁, 천재지변, 자연재해 등으로부터 주요 식물의 멸종을 막고 유전자원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국가나 단체가 종자저장을 의뢰하면 저장비용은 원칙적으로 무상이며, 위탁자는 입고될 종자의 포장과 배송에 관련된 비용만 부담하면 된다.

운영비용은 빌&마린다 게이츠 재단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정부와 NGO 등의 지원을 받는다. 해발 130m에 있는 영구 동토층 사암으로 형성된 바위산에 120m 깊이의 지하에 저장 시설이 만들어져 있고, 씨앗은 영하 18도의 온도에서 밀폐된 봉투에 담겨 보관된다.

저장고는 지진이나 핵폭발에도 견딜 수 있을 만큼 견고하게 지어졌으며, 전기 공급이 끊기는 경우에도 일정 기간 자연 냉동상태가 유지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8년 6월9일에 아시아 최초로 한국산 벼·보리·콩·땅콩·기장·옥수수 등 국내작물 씨앗 5000종을 입고시켰으며, 현재 1만5000여 종의 씨앗을 보관하고 있다.<두산백과>

보관소는 지난 2015년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피해를 본 종자를 대체하기 위해 처음으로 종자샘플을 반출했다고 한다.

종자보관소 소장의 인터뷰(중앙일보/2015.12.26.)에 따르면 종자 다양성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한다.

"종자 다양성은 인류의 식량 위기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일랜드에서 1845년 감자의 잎마름병이 유행해 100만 명이 굶어 죽었다. 주식으로 한 가지 종류의 감자만 심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수백만 명이 이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종이 단순하면 해충의 출현이나 기후변화에 쉽게 영향을 받을 수 있고, 최악의 경우 멸종될 수도 있다. 종자 다양성은 향후 미래 먹거리를 창출하는 데도 의미가 있다. 2100년 지구 인구는 110억 명으로 늘어난다. 이때 영양도 풍부하면서 빈곤층도 살 수 있는 저렴한 식량을 계속 공급하기 위해선 종자 다양성이 지켜져야 한다."

나는 스발바르 종자보관소 정보를 읽으며 경상남도기록원을 생각했다.

▲ 국제종자보관소는 북극권 스발바르제도에 있으며, 자연에 의한 대재앙이 발생했을 때를 대비해 종자를 보관하고 있다. 현재 450만 종의 씨앗을 하 18도 온도에 봉해 보관하고 있다. 한국도 지난 2008년 벼 보리 콩등5000종을 입고했다. /GlobalSeed Vault홈페이지 캡처

◇경상남도기록원

우리나라는 세계기록유산목록에 많은 기록을 등재 할 만큼 으뜸가는 기록과, 그 관리의 전통도 어느 나라보다 깊은 공히 '기록의 나라'라고 일컬을 만 한 곳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군사독재시절, 경제대국 건설을 위한 고난과 효율성의 시대를 거치면서 '당장' 중요치 않은 기록은 상당부분 멸실·유실·훼손되었다.

다행히 1969년 정부기록을 관리하기 위한 정부기록보존소가 생겼고 그 중요성을 감안하여 1999년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제정, 2004년 국가기록원으로 명칭을 변경, 정부기록과 국가적인 가치가 있는 중요민간기록을 관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방은 어떨까?

2007년 같은 법 전면개정으로 지방의 영구기록물관리기관 설립을 의무화했고 약 10년이 지난 2018년 5월 경상남도에 처음으로 '경상남도기록원'이라는 이름으로 지방(영구)기록물관리기관을 개원했다.

처음이라는 것은 영광이기도 하지만 어느 누구도 하지 못했던 것을 하는 것이기에 늘 의문과 도전이 따른다. 도민들에게도 생소한 곳이기도 하지만 '기록'이라는 보편성과 추상성으로 설립취지와 현실은 상충되고 비전의 실현이라는 매일의 도전보다 설치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은 사라지지 않는다. /시민기자 전가희(기록연구사)

◇경상남도기록원, 스발바르 종자보관소의 맥을 같이한다

경상남도기록원은 무엇을 실현하기 위해 경남의 땅과 도민 앞에 섰는가? 향후 몇 년간 당장의 가시적인 성과는 미미할 것이며 효율성을 말하기에는 그 논리가 빈약한 이 기관의 존재목적은 무엇일까?

나는 감히 스발바르의 종자보관소를 떠올린다. 종자의 다양성을 보존하여 지금 당장의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지구 최후의 순간을 대비하는 곳, 그런 큰 목적이 아니라도 내전이 일어나 식량난에 허덕이는 시리아를 돕는 것처럼 나도 당할 수 있는 위험에 대비하는 곳, 그곳을 나는 경상남도기록원과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국가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역사, 기록, 정보를 관리하는 국가기록원과 달리 경남의 시각에서 경남에서 일어난 주요 사건을 정리하고 그것들의 기록을 관리하는 곳으로 향후 국가의 관점으로는 보존하기 힘든 경남의 문인, 박물, 문화재, 산업화의 흐름 등 다양한 경남의 모습을 보존하고 전언할 것이다.

종자보관소처럼 보존이 중요하나 중요시점에 종자를 내어주는 것처럼, 기록원은 보유기록을 종자보관소보다 더 활발히 공개·활용한다. 또한 모든 종자의 샘플을 관리하는 보관소처럼 경남의 공공과 민간의 중요기록을 다양하게 수집하고 관리하기도 한다.

단지 아쉬운 점은 종자보관소는 전기가 끊겨도 북극이라는 환경에 의해 200년은 그 관리를 지속할 수 있다고 하지만 경상남도기록원은 전기가 없으면 온습도를 조절할 수 없기에 훼손은 가속화될 것이다.

경남도의회 기획행정위원회가 지난달 경남도기록원을 찾은 모습. /경남도민일보 DB

종자의 마지막을 함께하며 미래 혹 다가올 재난의 '食(식)'을 담보하는 곳인 종자보관소처럼 경상남도기록원은 경남의 다양한 기록을 보존·관리하여 경남의 마지막이 있다면 그 마지막을 기억할 것이며 새로운 경남이 있다면 경남의 친절한 동반자가 될 것이다. 또한 실패와 오욕의 역사를 기록하여 그것을 반복하지 않도록 지금의 경남을 성장하게 하고 경남을 설명하는 경남의 '住(주)'가 될 것이다.

요즘 나는 갓 초등학생이 된 아들과 바둑을 두곤 한다. 아들은 학교에서 배운 바둑 실력을 나에게 전하며 오랜만에 바둑을 두는 엄마에게 열심히 훈수를 두는데 지난 토요일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엄마, 연결을 해야 돼, 바둑점마다 연결을 해야 힘이 세지고 상대편 바둑을 크게 잡을 수 있어."

나는 어린 아들의 이 충언을 새겨 바둑을 두었고 이기기도 했다. 사람도 연대가 중요하지만 세상의 변화도 연결이 필요하다. 그 연결은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기억 속에 변화되고 변형된다. 그러나 기록은 완벽하지 않지만 어제와 오늘 내일을 기억한 그대로 연결해준다. 그 기록을 관리하는 경상남도기록원은 경남의 어제를 기억하여 오늘을 설명하고 내일을 담보하는 연결통로가 될 것이다. 그러면 힘이 세지고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것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믿음, 소망, 사랑은 추상적인 단어나 그 실현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효율성과 효과성만을 말하는 정부의 좌절을 목격했다면 함께하는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지금, 추상적이며 효과를 산술적인 수치로 말하기 곤란한 그것을 한번 믿어봄이 어떠한가?

/시민기자 전가희(기록연구사)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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