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와 일곱 마리 아기염소>는 딸이 가장 좋아하는 동화다. 매일 들어도 질리지 않는지 밤마다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른다. 하루는 역할을 바꿔 딸이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아기염소들과 늑대가 실랑이를 벌이다 곧 잡아먹히는 당연한 전개를 기대하며 듣던 나는 멈칫했다. "집으로 들어온 늑대는 아기염소들을 안아줬어요. 엄마염소도 안아줬어요." 결말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잡아먹고, 먹히고, 물에 빠져 죽는 부분이 싫었다고 했다. 그동안 재미의 포인트인 줄 알고 더 오버해서 늑대 흉내를 냈던 나는 미안함에 머쓱해졌다. 가만 동화를 들여다보니 악역을 맡은 늑대가 무단 침입을 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데다가 살생이 난무하는 등 새삼 잔인한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이 이야기가 오래 사랑받는 이유는 뭐였을까?

동화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이들에게 전하고픈 어른들의 메시지가 효과적으로 담겼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고, 모르는 사람에게 문 열어주지 마라. 바로 조심하라는 경고다.

"조심해!" 거의 매일 듣는 말이다. 자전거 탈 때, 계단 오를 때. 그리고 밤늦게 외출하거나 낯선 사람을 만날 때도 듣는다.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불필요한 긴장을 하고 행동반경이 좁아진다. 미리 걱정하고, 긴장한다고 해서 안전이 확보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자각하고부터는 아이들에게 '조심해' 대신 '천천히'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쓰고 있다. 이왕이면 아이들에게 자유롭게 살라고 말하고 싶다. 마음껏 거리를 활보하고 이웃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성범죄, 따돌림, 불법 촬영…. 매일같이 접하는 뉴스들은 마음을 움츠리게 만든다. 마치 늘 주위를 경계하고 조심하며 살라는 지겨운 경고처럼 느껴진다. 매일 그렇게 산다면 정말 안전해질 수 있을까. 예측 불가능의 삶에서 위험을 차단하는 게 가능한 일이긴 할까.

답을 구하는 마음으로 성교육 강의를 찾아 들으러 다녔다. 모르는 게 많았다. 핑계를 대자면 우리 세대는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아본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배운다는 생각으로 강의를 들었다.

살갗에 다가온 것은 '경계 존중'이라는 개념이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누구나 존중받아야 할 자기만의 경계가 있다는 것. 상대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함부로 찍거나, 물건을 가져가는 행동. 즉 타인의 경계를 넘으면 상처가 된다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모두에게 필요한 이야기로 느껴졌다. 같이 사는 사람에게 먼저 적용했다. 아이들이 귀엽다고 마구 볼을 만지거나, 싫다는 데도 간지럼을 태우는 일은 삼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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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낯선 사람을 경계하고 신체를 마음대로 만질 때는 "안돼요, 싫어요!"를 외치라 가르치는 것도 이제 구시대적인 발상이 되었다. 잠재적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왜 거부하지 않았느냐, 말하지 못했냐"라고 묻는 2차 가해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은유 작가의 책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에는 '타자를 변화시키는 것은 계몽이 아니라 전염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제 그만 공포를 활용하는 시대를 지나자. 지금은 모두가 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점검해야 할 시간이다. 느리더라도 나와 타인의 경계를 존중하고 지키는 태도를 배워가야 할 때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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