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년 전 거룩한 발자국 남긴 성스런 도시
성 프란체스코 고향 아시시 신전 등 로마 유적 많은 곳
고개숙인 프란체스코 동상 귀향하던 당시 심경 드러내
성당 내 신발 전시 '인상적'

절대화된 가치를 만나면 부차적인 것들은 모두 상대화될 수 있다. 괴테는 절대적 가치를 지녔다고 확신하는 미네르바성당 마당에 앉아 그가 베네치아에서 구입했던 비트루비우스의 <건축서>를 또다시 꺼내 들고는 그의 말처럼 기도하듯이, 경배하듯이 읽었다. 이 영성 가득한 도시의 나머지 성당들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도시는 어떻게 건설해야 하며 신전과 공공건물은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를 그 속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아예 그 앞에서 떠날 줄 몰랐다. 도면과 실물을 번갈아 가며 온 종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철저하게 지켜 낸 일관성, 영적 스승과 같은 팔라디오와 비트루비우스에 대한 솟아나는 신뢰감과 감출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했다. 마치 하나님 말씀을 받은 선지자처럼, 다시 태어나기 시작했다고 할 만큼 영감을 얻었던 베네치아의 추억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안드레아가 '안드레아 팔라디오(Andrea Palladio·1508~1580)'로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스승 트리시노와의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석공에 불과했던 안드레아를 그가 설계한 빌라건축 현장에서 단번에 그의 재기와 수학적 자질을 간파했다. 그는 당장 안드레아에게 비트루비우스의 <건축서>를 시작으로 고전뿐 아니라 높은 수준의 교육을 시켰다.

트리시노는 안드레아를 파도바로 데려와 정규코스를 통한 수학과 함께 네 차례나 로마여행을 감행했다. 그랜드 투어였다. 당시 비첸차의 지배층인 귀족계급 사회에서는 그들이 결속하여 공공의 이익을 위한 고귀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공통된 인식이 있었다. 그 중심에 트리시노가 있었고 그런 공통된 의식이 팔라디오라는 인물을 탄생시킨 것이다. 결국 비트루비우스, 트리시노, 팔라디오로 연결되는 인맥이 형성되었으며 이는 괴테로 이어져 인맥을 넘은 무한한 인문의 광맥으로 연결되었다.

◇미네르바 성당

미네르바성당은 로마 시대에 신전으로 사용됐던 것을 성당으로 개조한 것이다. 성당 앞에는 작은 광장이 있고 성당과 광장 지하는 옛 포로 로마노가 있었던 자리다. 밖에서 보면 영락없는 로마 신전이지만 실내로 들어가면 작지만 영성 가득한 성전이다. 로마 시대 때 어디든 도시를 만들게 되면 어김없이 따르게 되는 광장 포로 로마노, 엊그제 방문했던 피렌체의 피에솔레도 마찬가지였다. 에트루리아 유적과 로마 유적이 뒤섞여 있었고 역시 포로 로마노와 공중목욕탕, 원형극장은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

로마시대 신전이었던 미네르바 성당 야경.

"보라 극히 찬양할 만한 작품이 내 눈앞에 서 있다. 내가 본 최초의 완벽한 고대의 기념비가 여기 있노라! 이 작은 도시에 어울리게 소박하지만 온 세상을 비추도록 완벽하고도 아름답게 만들어진 건물을."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미네르바성당뿐이었다. 오히려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 대해서는 음침하다는 표현을 쓸 정도로 폄하하고서는 멀리서만 바라보고 왔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는 4명의 경찰관들에 의해 밀수꾼으로 의심받아 불심검문을 당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변덕스러운 날씨와 군주의 기분에 결코 눈썹 찌푸릴 그가 아니다. 오히려 4명 중 1명이 따로 찾아와 팁을 달라고 하자 너그럽게 은화 몇 닢을 건네주었다. 이탈리아 여행이 가져다 준 변화이리라. 그가 명랑한 사람을 사랑하며 자기 자신을 화젯거리로 내놓을 수 없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은 아니라고 말했던 것을 이상이 아닌 현실에서 실천하고 있었다.

이 도시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축복의 광명을 받은 것과 같다는 것을 느낀 것은 도착한 날 오후 짐을 풀자 마자 달려 나간 포르타 누오바, 포르타 모이아노 그리고 키아라 성당을 거쳐 성 프란체스코 성당으로 가는 중간 즈음의 골목길에서였다. 움브리아 대평원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태양, 저 넓은 대지에서 올라오는 땅의 기운, 눈부시도록 빛을 발하는 올리브 나무 이파리,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나는 이런 모든 것들에 취해 있었다.

◇신발의 메시지

아시시 기차역은 이런 모든 것들을 미리 알려주는 주파수와 같은 존재였다. 다른 역들과 달리 'ASSISI'가 타이포그래피로 색다르게 쓰인 역의 간판과 시골의 간이역 같은 정취가 사람을 감싸 안아주었다. 아시시의 C번 버스는 움브리아 들판의 곧은길을 지나 올리브 나무 밭 사이로 굽이쳐 돌아 10여 분 만에 포르타 누오바 광장에 나를 내려 주었다.

천 년이 넘었지만 이제 막 지은 것 같은 성당들, 이 성당들은 옅은 분홍색과 하얀 색이 결합된 대리석으로 지어져 마치 종이로 지은 집처럼 가벼워 보였다. 외벽은 그 흔한 성인들의 동상이나 조형물조차도 볼 수 없었다. 이런 성당들과 색상이 어우러진 아파트와 상가 건물들, 도시의 크기에 비해 비교적 넓은 도로와 도시 아래로 저 멀리 펼쳐진 움브리아 대평원, 아!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아시시를 아시시 되게 만든 성 프란체스코 성당은 햇빛이 나면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얗다. 바실리카 디 산타 키아라 성당이나 미네르바 성당까지도 무게를 뺀 상태였으니 이 도시에서 무게감이라고는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고성(古城) 모카 마지오레뿐이었다. 이 성에 올랐을 때에는 그 높이로 인하여 제법 바람이 거셌으나 오히려 아시시의 영성이 섞여 불어오는 거룩한 바람으로 느껴졌다.

▲ 성 프란체스코 성당과 동상. 프란체스코의 심정이 단 한 장면으로 나타나 있다.

성 프란체스코 성당 앞 잔디 광장에는 말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프란체스코의 동상이 있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바닥으로 향하고 있는 얼굴, 주인을 따라 말(馬)조차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다. 이 동상을 보고 있으면 한껏 내 마음도 무거워진다. 패배자, 비겁자, 겁쟁이로 낙인이 찍힐 운명에 처한 프란체스코의 당시의 심경을 단 하나의 장면으로 말하고 있다.

성 프란체스코 성당의 프레스코화를 감상한 후 후문으로 본당을 빠져나와 회랑으로 들어갔다. 이 땅에 살다가 떠난 이들 중에 아름다운 족적을 남긴 사람들의 신발을 전시하고 있었다. 사막 여행자, 북극 개척자, 암벽 등반가, 선교자, 여행자, 맨발로 세계를 일주한 자, 산티아고 순례 길을 여덟 번이나 완주한 자, 특별하지 않았지만 특별한 이름을 남긴 사람들의 오래된 신발들은 여행자인 나에게 거룩한 메시지를 던져 주려는 듯했다. 나는 방명록에 '신발을 보면 그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전시된 신발은 가지가지였다. 나무로 만든 나막신, 극지 탐험가의 털신, 가죽 끈으로 엮어 만든 순례자의 샌들, 산악용 등산화, 심지어 신발을 신지 않고 세계를 일주했던 이의 발자국까지 동판에 새겨 전시가 되어 있었다. 문득 내가 신고 있는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내 신발은 무엇으로 기억되고 기록될까?

해질 무렵, 프란체스코가 회심한 후 기도에 전념했던 성 다미아노 성당으로 내려갔다. 나 또한 프란체스코의 발자국을 밟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찬송가가 내 입에서 계속 우물거렸다. 나의 이 무모한? 여정이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여정이 아니기를.

이방의 신전도 아시시에 맡겨지면 성전이 되고, 상처 입은 자는 치유되며, 길 잃은 자는 바른 길 가게 인도하는 영성이 가득한 가난한 자의 도시, 아시시에서의 세 번째 밤이 깊어 간다. /글·사진 시민기자 조문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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