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중심지 내 고향 옛이야기 더듬어보네
삼랑진고 학생 유적지 3곳 답사
역 주변 적산가옥·거리 그려보고
왜적에 저항한 작원잔도 거닐고
압구정 올라 낙동강 내려다보며
아름다웠던 시절 정경 헤아려봐

◇삼랑진역과 주변 적산가옥

삼랑진 일대 유적을 9월 1일 삼랑진고등학교 학생들과 찾았다. 먼저 삼랑진역과 둘레 일제가 남긴 적산가옥이 들어서 있는 거리를 둘러보았다. 삼랑진역은 1905년 경부선 철길을 개통하면서 영업을 시작했다. 경남의 중부와 서부를 침탈하는 시작점이기도 했다. 같은 해에는 마산까지, 1923년에는 진주까지 깔았다. 마산은 옆 진해에 군항이 있는 요충이고 진주는 서부 경남의 물산이 모이는 거점이기 때문이었다.

삼랑진역 구내에서 자기가 그린 작품을 들고 친구들에게 설명을 하는 모습.

돌아다니며 살펴보기에는 미션 수행이 딱이다. 인상깊은 건물이나 가게 다섯을 사진찍은 다음 하나를 자세하게 그리기였다. 비가 내려서 그리기는 역 구내에서 했다. 적산가옥을 고쳐 짓거나 70년대에 지어진 사진관과 가게·음식점을 그렸다. 우뚝한 축대 위 옛 모습 그대로 적산가옥도 그렸고 낡은 거리를 오가는 사람과 자동차도 그렸다. 함께 모여 그린 이유를 공유하고 가장 그럴듯한 친구에게 문화상품권이 선물로 돌아갔다.

짬을 내어 급수탑도 둘러보았다. 석탄을 때서 수증기로 엔진을 움직이던 시절의 산물이다. 1923년 지어졌으니 올해 95년이 되었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70년대까지도 여느 역과 견줘도 처지지 않는 요지였다. 경전선에서 경부선으로, 경부선에서 경전선으로 갈아타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승객이 붐비니 지역 아지매들도 몰려들었다. 그이들 머리 또아리 위에는 철마다 다른 채소와 과일이 올라 있었다. 가장 유명하기로는 봄철 삼랑진 특산물 딸기였다. 인파에 밀리면서도 차창 가까이 다가가 있는 힘껏 "내 딸 사이소! 내 딸!!"이라 외쳤다.

삼랑진역 급수탑에 들른 학생들.

◇왜적과 1대62로 싸운 전적지 작원관 일대

조선시대까지는 이런 육로 요충 역할을 작원관(鵲院關) 일대가 맡고 있었다. 너르고 사통팔달이라서가 아니고 남북으로 오가려면 꼭 거쳐야 하는 좁은 길목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작원관은 1995년 밀양시청이 세웠다. 임진왜란 이후 어느 때인가 들었던 원래 작원관은 하류쪽 1.2㎞에 있다가 1936년 대홍수로 사라졌다. 먼저 비각에 들러 거기 새겨진 내력을 살폈다. 앞서 있던 다리가 홍수에 허물어지는 바람에 튼튼하게 돌다리로 새로 쌓았다는 내용들이다.

작원관에서 원(院)은 전통시대 국립 여관이다. 사람과 말이 먹고 자고 쉬는 공간이다. 말은 요즘 자동차에 해당된다.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는 증거다. 관(關)은 방어용 군사 시설이다. 외적의 침략을 막는 데 안성맞춤인 자리였다. 작원잔도가 이를 증명한다. 잔도는 원래는 길이 아니었다. 70~80도로 비탈진 바위 벼랑이었다. 네모지게 다듬은 바위를 기둥 삼아 먼저 아래를 세로로 받친 다음 길게 다듬은 바위를 들보로 얹었다. 그런 위에 직각으로 어긋지게 1m 정도 길이 바위를 나란히 깔았다. 둘이 지나면 어깨가 마주칠 정도로 좁아 잘못하면 강물로 떨어지기 십상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군사가 작원잔도에서 왜적을 맞아 최초로 저항다운 저항을 할 수 있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기습공격으로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떨어뜨린 왜적은 거칠 것이 없는 파죽지세였다. 조선군은 그냥 추풍낙엽이었다. 게다가 여기 지키는 조선 군사는 고작 300명이었고 진격을 멈추지 않은 왜병은 60배를 훌쩍 웃도는 1만 8700명이었다. 그런데도 조선은 왜적한테 바로 깨지지 않고 하루 이상 막아낼 수 있었다. 그게 작원잔도 덕분이었다.

작원잔도로 걸어가는데 길이 굴다리에서 끊겨 있었다. 비가 내려 물이 불어나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 아쉽지만 발길을 돌려야 했다. 대신 새로 지은 작원관에 들렀다. 정식 출입문 한남문의 2층 문루 공운루에 올라 둘레 강변 풍경을 눈에 담았다. 그러고는 이런 역사를 적당하게 버무린 문제로 '작원관 도전 골든벨'을 하고 문제풀이를 하면서 밀양 학생들의 밀양 역사에 대한 흥미를 돋우고 관심을 키웠다.

◇풍경도 아름다웠던 삼랑창 자리

점심을 먹고서는 삼랑창 자리로 갔다. 삼랑진은 뭍에서도 물에서도 교통 요충이었다. 조선시대 조세창고 후조창(後漕倉)이 증명한다. 경남에는 창원 마산창, 사천 가산창, 밀양 삼랑창 셋이 있었다. 마산창은 임금이 있는 서울에서 볼 때 왼쪽에 있어서 좌조창, 가산창은 오른쪽에 있다고 우조창이라 했으며 삼랑창은 앞쪽 바닷가가 아닌 뒤쪽 낙동강 중하류 내륙에 있다고 후조창이 되었다. 낙동강과 밀양강 강물이 맞부딪치는 자리에 1765년 설치되었다. 밀양은 물론 현풍·창녕·영산·김해·양산 여섯 고을에서 조세로 거둔 쌀과 베와 특산물을 바다를 거쳐 서울로 실어날랐다.

여섯 고을에서 현물을 거두어 쌓아놓아야 했으니 창고가 대단했겠다. 덩달아 마을도 적지 않았겠지. 하지만 옛 모습은 모두 사라졌다. 마을 뒤편 언덕 꺾어지는 길목의 '후조창 유지(遺址) 비석군'으로 남은 선정비 여덟이 전부다. 가장 안쪽이 1766년에 세워져 가장 오래되었고 1812년, 1843년 1839년, 1857년으로 이어지다 바깥쪽 셋은 1872년 같은 해에 세워졌다. 셋째와 넷째는 쇠로 만든 철비고 나머지는 석비다.

압구정 대청마루에서 앞서 본 후조창 유지 선정비를 그리고 있는 학생들.

선정비를 거쳐 언덕 위 압구정(鴨鷗亭)에 올랐다. 대청마루에 앉아 선정비 자세히 그리기를 하고 문화상품권을 선물로 나누었다. 이어서 낙동강을 내려다보았다. 후조창=삼랑창 시절만 해도 풍경이 더없이 아름다웠다고. <동국여지승람>은 여기 삼랑루가 있다며 시를 붙였다. "호수 위에 푸른 산이요 산 아래는 누각일세. 물가 가게는 늘어놓은 달팽이껍데기 같고 물결 따라 바람 받은 배는 춤추네. 뽕나무에 연기 깊어 천리가 저물고 마름꽃·연꽃이 늙어 강이 온통 가을빛이라. 낙하고목(落霞孤鶩=지는 노을에 외로운 물새)은 이제 상투어라네. 새로 시를 지어 명승을 기록하네."

이렇게 삼랑진 일대 교통 요충 세 곳을 삼랑진고 학생들과 함께 둘러보았다.

△후원 : 밀양시청

△기획·주관 : 밀양교육지원청·경남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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