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슬픈데… 동생이 자꾸 웃어 더 슬프다
어른들 무책임한 행동에 방치된 4남매 실화 가공
비극·감정적 연출 배제…관찰자 시선 조용히 응시

흔들리는 전철 안, 한쪽 구석을 멀리서 응시하는 카메라. 요동치는 시선은 구석에 앉은 소년의 감정처럼 불안하다.

카메라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 소년의 신체를 확대한다. 더벅머리, 때가 잔뜩 낀 손톱, 해진 상의가 드러난다.

아이는 큼직한 분홍색 여행용 가방을 힘겹게 붙잡고 있다. 가방도 아이처럼 겉이 긁히고, 빛이 바랬다.

<아무도 모른다> 스틸컷.

손끝에서 불안감, 슬픔, 두려움 같은 무거운 감정이 전해진다. 아니, 오히려 덤덤함이려나.

카메라는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아이 앞에 앉은 여성의 얼굴이 차창에 비치지만, 흐릿한 초점 탓에 얼굴을 알아보기 어렵다.

그 옆으로 조용히 글자가 떠올랐다가 다시 사라진다. '아무도 모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일상의 순간을 포착한 시각이 돋보인다.

제한된 화면 속에 배치한 상징은 시각적 감각만으로 여러 의미를 전달한다. 가끔은 상징성이 진부해 보여도 까다롭지 않은 무던한 연출이 감정을 더욱 깊게 응집한다.

영화 속에서 나중을 암시하는 소재가 너무나 명확해 언뜻 노골적으로 비치지만, 전혀 낡아 보이지 않는 것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힘.

한 발 뒤로 물러선 시선과 섬세한 연출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영화에 등장하는 아역 배우들의 연기다.

<아무도 모른다> 스틸컷.

지난 2004년 제57회 칸 영화제에 영화가 공개됐을 때 아역 배우들의 연기와 존재감에 시선이 쏠렸다.

과장없이 담담한, 영화의 시선에 자연스레 녹아든 연기는 오히려 보는 이의 감정에 큰 파동을 일으켰다.

떠난 엄마를 대신해 세 동생을 돌보는 장남 아키라 역을 맡은 배우 야기라 유야의 깊은 눈빛은 영화가 끝나도 쉽게 가시지 않는 여운을 남긴다.

◇아역배우 '묘한' 연기 = 야기라 유야는 그해 칸 영화제 남우 주연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 수상은 영화 속 모든 아역 배우를 대표한 것이 아닐까 싶다.

둘째 교코를 연기한 배우 기타우라 아유의 눈빛은 야기라 유야의 눈빛과 비슷하면서 묘하게 다르다.

가끔은 흔들리며 방황하는 것이 야기라 유야라면, 시종일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웠던 쪽은 기타우라 아유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셋째 시게루를 연기한 배우 기무라 히에이의 장난스러운 모습은 보는 이의 감정을 더욱 안타깝게 한다.

막내 유키를 연기한 시미즈 모모코의 애틋함까지, 누가 상을 받았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영화 촬영은 영화 속 시간과 비슷하게 1년가량 걸렸다. 가을에서 이듬해 여름까지 영화를 찍으면서, 감독은 아역 배우들과 신뢰를 쌓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감독의 기다림과 배려, 배우와 감독 사이의 교감이 있었던 까닭에 아이들의 개성이 자연스럽게 영화에 묻어난다.

<아무도 모른다> 스틸컷.

영화는 시작과 끝에 현재를, 중간에는 관객이 현재를 이해하는 과정인 과거를 그려낸다.

영화는 아무도 모르는 아이들의 일상을 일기를 쓰듯 담담하게, 관찰자의 시선으로 조용히 응시한다.

한 편의 영화보다는 다큐멘터리처럼 읽힌다.

그 과정 속에서 아이들은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조금씩 성장하고, 때로는 부침을 겪는다.

감독은 실제 사건을 빌려 영화로 가공했다. 실제 배경인 1988년 '스가모 어린이 방치 사건'은 영화와는 결이 크게 다르다. 현실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듯 매정하고 잔인하다.

영화는 실제 사건의 비극성, 선정성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감정적인 연출을 최대한 배제했다.

어떤 접근이 영화적으로 더 나은지는 관객이 판단할 몫이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접근이 더욱 시리게 다가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유치한' 어른들 = 영화 속 어른들의 모습은 참으로 유치하다. 아이들보다 더 일차원적인 본능에 충실하고, 그 감정을 행동과 언어로 드러내는 것을 꺼리지 않는 뻔뻔함을 보인다.

엄마와 사랑을 나눴던 남자들은 "교코가 나를 닮았느냐" "유키는 내 딸 아니야"라며 현실을 부정하고 의심한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아키라에게 고백하는 엄마 또한 "이번엔 정말 다르다" "이번엔 진짜야"라며 현실을 부정하기는 마찬가지다.

아슬아슬한 시기에 집에 돌아온 엄마를, 아키라는 "엄마는 정말 제멋대로야"라며 원망한다.

엄마는 "제멋대로인 것은 혼자 떠나버린 네 아빠야. 난 행복해지면 안 돼?"라고 되묻고 아키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책임감 강한 아이와 제멋대로인 엄마의 모습이 대조하는 상황은 영화를 상징하는 대목이다.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다 돈이 다 떨어진 아이들. 교코는 피아노를 사려고 모은 돈을 아키라에게 내민다. 네 아이는 영화에서 처음으로 다 같이 바깥 구경을 나선다.

편의점에서 장을 보고, 공원에서 웃고 떠드는 모습은 네 명의 아이들이 동시에 아이처럼 보이는 유일한 순간이다.

아이들은 공터 배수구에 핀 이름 모를 꽃의 씨앗을 받아 각자의 이름을 쓴 컵라면 용기에 넣고 흙을 담아 소중하게 가꾼다. 보살핌 받을 아이들이 오히려 생명을 잉태하는 모습이 인상 깊다.

13일 0시 35분 EBS 방영. 140분, 12세 관람 가.

<아무도 모른다>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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