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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그 골목에 갔다] (15) 진주 에나길

과거가 현재처럼…시간을 되돌리는 공간
100년 전 '권번'·30년 전 '가투' 현장 고스란히 재생하는 중안동·대안동

이일균 기자 iglee@idomin.com 2018년 10월 10일 수요일

중안동 진주초등학교부터 진주교육청-진주경찰서-진주우체국에 이르는 길을 사람들은 '에나길'이라 이름붙였다.

"에나?" 하면 "진짜?"라는 뜻으로 알아들으면 된다. '진짜 진주길'이 되는 셈이다.

그만큼 오래된 길이다. 살 만큼 살았겠다 싶을 정도로 굽어진 플라타너스들이 쭈욱 늘어서 실제로 그런 느낌을 준다.

10년 전 골목의 기록을 더듬으며 며칠 전 다시 섰던 진주시 중안동 입구.

그곳에 선 나는 당황했다. 이젠 그렇지 않겠지 싶었는데, 여지없이 주눅이 들었다.

진주경찰서 때문이다.

진주에나길에서 한 모퉁이 돌아서면 중안동의 '차 없는' 젊음의 거리가 펼쳐진다. 사진 안은 옛 권번 교육 장면. /이일균 기자

수없이 이곳을 들락거렸었다. 1991년과 1992년에는 피의자 신분으로, 1995~1996년에는 〈진주신문〉 사회부 기자 신분으로.

경찰서 주변 곳곳에서 이뤄졌던 가투, 가투, 가투….

1980∼90년대 당시 거리에서 돌발적으로 이뤄졌던 민주화투쟁을 말한다.

주변 대로를 메웠던 1991년의 집회와 시위. 최루탄 지랄탄 가스와 눈물, 화염병의 불꽃, 백골단의 곤봉, 육탄전….

과거의 기억도, 현실의 취재도 까마득해지고 아득해졌다.

◇왜 여기 서 있지?

탈출하듯, 중안동 '차 없는 거리'로 모퉁이를 돌았다.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현기증도 사라졌다.

젊음의 거리가 시작된다. 로데오거리, 중안동 차 없는 거리가 시작된다. 거리는 청춘들로 메워졌다.

진주교육청과 경찰서 앞 에나길에 조성돼 있는 플라타너스. /이일균 기자

10~20대에게 물었다.

"이 거리를 뭐라고 불러요?"

'차 없는 거리'나 '로데오거리'라는 간판이 곳곳에 붙어 있지만, 그들만의 은어가 궁금했다.

"모르겠는데예!"

...

"그냥 시내지예 뭐. 시내에서 보자 하면 여기서 보는 거지예."

간단하게 답하고 그들은 총총히 가버렸다.

이 길에서 나는 타인이다.

2000원짜리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쓸쓸함을 달래주었다.

아메리카노가 준 또 하나.

10년 전 기억이었다.

그때 나는 이 길에서 '권번'의 흔적을 찾았다.

그때 난 왜 권번(옛날 관기 과정을 교육하던 시설)을 찾았을까?

가투의 거리에서, 젊음이 넘치는 거리에서….

이유 중에는 이 노래도 있었다.

'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시집살이 삼년만에/ 시어머니 하시는 말씀 얘야 아가 며늘아가/ 진주낭군 오실 것이니 진주남강 빨래가라 … 사랑방에 나가보니 온갖가지 안주에다/ 기생첩을 옆에 끼고서 권주가를 부르더라/ 이것을 본 며늘아가 아랫방에 물러나와/ 아홉가지 약을 먹고서 목 매달아 죽었더라'

진주사람들은 다 아는 '진주난봉가'다. 난봉꾼 남편의 기생 놀음을 한탄한 이 노래는 진주뿐만 아니라 인근 하동과 거창, 심지어 전라도에서도 불렸다.

도대체 남편의 난봉짓(허랑방탕한 짓)이 어느 정도였기에 아홉 가지 약을 먹고 목을 맸을까.

그 모두가 '북평양 남진주'로 상징됐던 진주 기생의 명성에서 비롯됐다.

◇왜 권번을 찾았을까?

그게 이 젊음의 거리에서 100년 전 권번 흔적을 찾아다녔던 이유가 될까?

그땐 이렇게 썼다.

"교방과 권번에서 비롯됐던 풍류의 거리를 '술술' 이야기해 줄 것 같던 어르신네들이 정말 모르는 듯, 아니면 숨기는 듯 입을 다물어버리는 모습은 한편으로 이해가 가기도 했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 더듬고 더듬어, 진주시 대안동과 평안동 옛 풍류의 거리를 뒤졌다. … 전국의 난봉꾼을 모조리 모아 홀렸다는 것은 진주 기생의 일면이다. 또 다른 일면은 논개와 산홍이로 대변되는 '의기'의 이미지다."

"실제로는 기생이 아니었다지만 논개의 행적이나 1905년 을사늑약 직후에 친일오적 중 '이지용'의 수청 요구를 거절했던 관기 산홍이의 기개에서 그 근거를 찾는 것이다. '내 비록 천한 기생이지만 사람 구실하고 사는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소!' 진주성 의기사에 그렇게 산홍이의 단호함이 적혀 있다."

"조선말 일패와 이패·삼패로 구분됐던 기생 중에서 전통가무의 보존과 전승 역할을 맡았던 관기의 총칭이 일패였다 하니 그런 기개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이패는 밀매음, 삼패는 공창의 기능을 했다."

10년 전 대원한약방 원종록(당시 만72세) 대표는 끈질기게 기억의 끈을 이었다.

"지금 우리은행이 중앙로에 붙어있지만 일제 때 식산은행은 옛날 '종로'라고 했던 지금의 중앙시장 바로 앞길에 붙어있었어요. 그 뒤에 논 몇 마지기를 사이에 두고 단층 한옥 권번이 있었으니까 그걸 감안해야지요. 아마 지금의 우리은행이나 약간 뒤쪽이 아닐까 싶네."

"문 옆에 바깥채가 있고 넓은 건물 안채에 여러 개 방이 딸렸어요. 노래나 춤을 배우고, 가야금 장구 같은 걸 연습했지요. 그때 권번에 있던 애들이 우리랑 또래라 댕기를 잡아당기고 그랬지."

그때 원종록 대표는 60~70년 전의 일을 마치 어제 일처럼 이야기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이야기도 어제 일처럼 가깝기만 하다.

원 대표는 지난 4월, 고인이 됐다.

나는 지금 중안동 카페 '시간을 되돌리는 공간'에 앉아 있다.

2006년 9월 25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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