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랐어요 한국에서 납중독된 줄은
부산 녹산공단 주물공장서 7년 가까이 일을 했어요
두 번이나 다친 적 있지만 산재 설명은 못 들었어요
지금도 기침이 나긴 해요…근데 제가 납중독이라고요?

정경화(62·창원시 진해구) 씨는 지난 2일 최초 요양급여 일부 승인 결정을 받았다. 근로복지공단이 지난해 12월 정 씨가 폭로한 납중독을 인정한 것이다.

정 씨는 2002년부터 2017년까지 부산 녹산공단 주물공장에서 일하다 납중독(D1) 판정을 받았다. 공장은 밀양으로 이전했다. 정 씨는 동·납·주석·아연을 넣어 1350℃로 녹여 합금 후 틀에 붓고 제품이 굳은 후 탈착 작업을 하고, 작업장에 날리는 분진, 금속 물질 등에 노출돼 관절통, 어지러움, 구토, 수면장애 등을 앓았다.

근로복지공단은 "상당 기간 동일 직종에서 근무해, 주물 공정에서 납 등 유해물질에 노출됐을 가능성이 큰 점, 유해물질 중 납·망간 등은 신경 독성이 있는 물질이고, 장기간 노출되면 뇌병증이 초래될 수 있는 점, 2015∼2017년 특수건강진단서에서 혈중 납 농도가 41.8∼61.1㎍/㎗로 상당히 높은 수준인 점 등을 종합하면 업무와의 상당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수트리스노는 부산 녹산공단 주물공장에서 일하다 납에 중독된 사실을 모른 채 인도네시아로 귀국한 이주노동자다. /김구연 기자 sajin@

◇또다른 납중독자 '수'를 찾아서 = 그렇다면, 정 씨와 함께 일한 동료는 괜찮을까. 정 씨는 자신과 가장 오랜 기간 일한 인도네시아인 '수'를 떠올렸다. '수'라고 불린 청년은 자신과 함께 특수건강검진을 받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도네시아로 돌아갔다.

부산울산경남권역 노동자건강권 대책위원회는 고용노동부에 정 씨와 함께 주물공정에서 일한 이주노동자 추적조사를 요구했다. '수'를 언급했던 정 씨는 이름 한 자 외에는 알지 못했다. 공장을 찾아 '수'의 행방을 물었지만, 귀국하면서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그가 공장에서 동료와 함께 찍은 사진을 창고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 사진으로 경남이주민노동복지센터 인도네시아 상담가를 통해 수소문해 어렵게 '수'와 연락이 닿았다. 그는 인도네시아 고향에서 살고 있다.

지난 20일 인도네시아 수라바야 한 호텔에서 '수'를 만났다. '수'의 본명은 수트리스노(34). 그는 한국에서 일했던 친구들과 함께 8시간이나 차를 타고 와서 <경남도민일보>와 인터뷰했다.

수는 정경화 씨 사진을 내보이자 '반장님'이라고 미소를 지었다. 수는 7년 가까이 한 사업장에서 일했다며 '외국인 근로자 고용허가서'를 꺼내 보였다. 처음에는 2008년부터 고용허가제에 따라 일할 수 있는 최대 기간인 4년 10개월 동안 한국에 있었다. 계약이 끝난 후 5개월간 인도네시아로 돌아가 결혼했고, 2013년 6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다시 같은 공장에서 일했다. 4년 10개월간 사업장 변경 없이 농축산업, 어업, 50인 이하 제조업에서 일한 이주노동자는 사용자 요청 시 3개월 후 재입국해 최대 4년 10개월을 더 일할 수 있다.

수는 "함께 한국에 일하러 갔던 다른 친구보다는 월급이 적었지만, 사업장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에 대한 부담이 더 커서 견디며 일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수가 일했던 공장 관계자는 다른 이주노동자들은 힘들다며 단기간 일하고 그만뒀지만, 수는 드물게 가장 오랫동안 일을 잘해냈다고 했다.

◇"납중독 몰랐고, 산재 설명도 없어" = 수는 정 씨가 주조 작업을 할 때 준비 작업을 도맡아 했다. 태운 납을 주조판에 넣고 여러 가지 모양에 맞게 맞춰서 넣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작업 도중 불똥이 튀어서 옷이 타는 경우도 잦았다. 수는 주물공정 작업을 오랜 기간 하면서 2011년부터 기침이 끊이지 않았다고 했다. 한국에서 작업할 당시처럼 심하지는 않지만 지금도 기침, 일부 관절통 등을 겪고 있다. 그냥 참고 지냈고, 병원에 가보지는 않았다고 했다.

수는 한국에서 일할 때 안전보건 교육을 별도로 받지는 못했고, 사고를 당한 적이 있지만 산업재해 신청 자체를 몰랐다고 했다. 수는 "안전교육은 팀 리더인 정경화 씨가 이 일은 이러니까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는 정도였다. 2009년 손가락 부러짐 사고, 2015년 기계 판에 허벅지를 다치는 등 두 차례 사고를 당한 적이 있지만, 산재 신청을 한 적은 없었다"고 했다.

고용노동부는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이 공장에서 일했던 이주노동자 명단을 제시하며 이들에 대한 산재 신청은 없었다고 밝혔다. 이주노동자 명단에는 수트리스노 씨도 포함돼 있었다.

수는 특수건강검진에서 납중독 유소견 판정을 받은 사실을 전혀 몰랐다며 당황해했다. 특수건강검진을 담당했던 대한산업보건협회 남부산업보건센터는 수트리스노 씨가 일반인보다 혈중 납 수치가 2배 이상 높은 것으로 나왔다고 밝혔다. 고용노동부 지침에 따라 2개월 뒤 납 수치를 재확인해야 했지만, 수는 건강검진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귀국했기에 이를 확인하지 못했다.

수는 "공장에서 따로 검진 결과를 설명해주지는 않았다. 궁금해서 함께 있던 공장 한국 친구에게 물으니 '괜찮다'고 해서 그런 줄 알았다"고 말했다. 이어 "작업장에 먼지가 많고, 뜨거워서 힘들었다. 작업장에 배기 등을 위한 제대로 된 시설을 갖췄으면 했다. 사고를 당했을 때 어떻게 산재 신청을 해야 하는지 설명조차 없었던 점이 문제"라고 했다.

정경화 씨와 수트리스노 씨가 일한 공장은 정 씨가 납중독 문제를 제기한 이후 주물공정을 없앴다. 이 공장은 수트리스노 씨가 말한 산재 사고에 대해 확인을 요청하자, "산재 관련한 자료는 알려줄 수 없다. 다친 기록 등을 확인해보겠다"고 했다.

※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