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서서히 물들어가는 것
성격·취향 다른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 담아
엘가 '사랑의 인사' 사용
약혼자에게 바치는 노래
사랑스러운 선율 돋보여

낡은 집을 새롭게 바꿔 어려운 이들을 돕던 예능 프로그램 러브하우스, 놀랍게 변신한 보금자리를 보여줄 때면 어김없이 흘러나오던 익숙한 음악과 함께 영화는 시작된다.

결혼식 비디오 촬영기사인 '춘희(심은하)'는 짝사랑을 하고 있다. 촬영 때 가끔 마주치는 보좌관 '인공(안성기)'이 그 대상이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온 '철수(이성재)'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애인 '다혜(송선미)'의 집 문을 열고는 그녀를 기다린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와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 위해 그 집을 떠났고, 이제 그 집은 춘희의 거처이다.

자신의 옛 연인이 더 이상 그곳에 살지 않음을 알게 된 철수는 함께했던 공간을 버리고 마음마저 떠나 버린 다혜와의 관계회복을 시도한다. 집 전화만이 유일한 통신수단이었던 시절, 언제 걸려올지 모를 그녀의 전화를 기다려야 한다는 이유와 이미 월세를 자신이 냈다는 권리 주장으로 철수와 춘희의 좌충우돌 동거가 시작되는데….

몰입을 방해할만한 이러한 황당한 설정이 지나면 영화는 지금부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집 정리는 물론 이 닦는 것조차도 게으른 춘희, 반면 모든 것이 깔끔히 정리된 것을 좋아하는 철수, 너무나 다른 생활방식을 지니고 있는 두 사람. 하지만 가장 극명한 차이는 사랑에 대한 서로의 가치관이다. 춘희는 순수한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소녀 감성임에 반해 철수에게 사랑은 서로의 체온을 나누어야 하는 현실적인 것이다.

영화 시나리오 공모를 준비하는 춘희, 사랑에 대해 논쟁하다 급기야 그들은 시나리오를 함께 써나가기로 한다. 철수에게서 떠나 버린 다혜, 춘희에게 마음속 사랑의 대상에 불과한 인공을 시나리오 속 주인공들 이름으로 하고선 말이다. 제목은 '미술관 옆 동물원'.

◇이상한 만남

미술관은 춘희가 좋아하는 장소이고 동물원은 철수가 가고 싶어 하는 장소이며, 서로의 생각의 거리를 보여주는 은유적 공간이다. 둘은 서로의 주장을 포기하지 않고 결국 합의점으로 찾은 것이 미술관 옆 동물원.

자기 생각을 상대방에게 설득하기 위해 그들이 선택하는 방법은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다. 때로는 큰 소리를 내고, 때로는 '맘대로 하세요'라며 귀를 막고 무시하는 것이 전부다. 티격태격, 이러한 거친 과정이 지나가며 그들은 서로에 대해 조금씩 이해해 가지만, 겉으로는 이전 모습과 별로 달라진 게 없다. 하지만 그들이 써나가는 시나리오 속 두 주인공, 다혜와 인공이 변해 가는 모습을 통해 춘희와 철수의 변화를 조용히 보여준다.

마침내 철수의 휴가가 끝나고 춘희는 시나리오 공모를 포기한다. 춘희가 일을 보러 나간 사이 그녀가 갖고 싶어 하던 오디오를 선물로 놓아두곤 과천으로 갔다가 귀대한다는 짧은 편지만을 남겨 두곤 철수는 춘희 집을 나온다. 황급히 그를 찾아가는 춘희, 이번에도 그들의 길은 엇갈리고 만다. 철수는 춘희가 좋아하는 미술관으로, 춘희는 철수를 찾아 동물원으로.

시나리오 속 두 주인공 다혜와 인공은 현실의 춘희와 철수처럼 먼 생각의 거리가 있다. 자전거, 외로움, 그리고 순수함이 다혜를 표현한다면, 자동차, 현실, 무관심은 인공을 대변하며 미술관의 프레임과 우주는 두 사람의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치로 영화에서 사용된다. 지금 보는 별의 빛이 수 억 년 전의 것이라는 막대함을 사랑하는 인공, 하지만 다혜에게는 그 광활함에 비해 너무도 초라한 사각 프레임에 자신의 모든 것이 있다.

서로에게 스며드는 인공과 다혜, 어느덧 인공은 자동차 대신 자전거가 이동 수단이 되어 가고, 다혜는 우주 관련 서적을 탐독하며 조심스러운 고백도 한다. '그림 밖이 훨씬 따뜻해요'. 우주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다혜에게 우주는 영하 수백 도의 진공 지옥이라고 이야기하던 인공도 이젠 얼굴에 웃음이 늘었다. 좁은 프레임에 갇혀 누구도 받아들이기 힘들던 이와 너무 넓은 공간에 놓여 한 사람만을 받아들이기엔 공허했던 이가 공간을 넓히거나 좁히며 서로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이다.

자동차가 고장 난 인공은 다혜의 자전거에 그녀를 태우고 밤길을 가고 있다. '다혜 씨, 오늘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했어요, 누구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공 씨, 오늘 처음으로 웃었어요'. 이렇듯 서로는 이해를 통해 사랑을 키워간다.

이토록 아름다운 장면에서 그 아름다움을 더해 주는 익숙한 선율이 흐르는데, 바로 영국 작곡가 '엘가'의 '사랑의 인사(salut d'amour, op.12)'다. 평민 집안에서 태어난 엘가는 어릴 적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나 평범한 음악 인생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8살 연상의 '앨리스'를 만나면서부터 그의 인생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엘가에게 좋은 음악적 조언자이자 매니저였으며 음악적 영감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실제 엘가의 명곡 '수수께끼 변주곡'도 아내를 위한 선율을 구상하던 중 창작된 작품이다. 그들의 결혼이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평민인 엘가에 비해 앨리스는 귀족 집안 딸이었다. 하지만 집안 반대도 둘 사랑을 막을 수 없었으며 결국 결혼에 이르게 되는데,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엘가는 약혼자인 그녀에게 '사랑의 인사'를 작곡해 결혼선물로 바치게 된다.

들어 보면 곡 제목처럼 사랑하는 이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너무도 사랑스러운 선율이다. 이후 엘가는 성공 가도를 달리고 영국을 대표하는 작곡가로서의 이름을 얻게 되는데,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위풍당당 행진곡'은 지금도 졸업식장이나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자주 연주된다.

◇'스며드는' 사랑

'사랑의 인사'는 피아노 반주를 동반한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소품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선율로 인해 많은 악기로 편곡돼 연주되곤 하는데, 수많은 연주 중에서 첫손에 꼽을 연주는 한국이 낳은 자랑스러운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연주일 것이다. 그녀의 데뷔앨범인 <콘 아모레(Con amore)>에 수록된 이 곡을 들으면 악기로 노래를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선명히 보여주는 듯하며, 사랑하는 이에 대한 절절함이 바이올린 소리에 녹아있다.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은 사랑에 대한 명대사로도 유명하다. 가장 유명한 대사는 아마도 춘희가 영화 막바지 조용히 읊조렸던 대사일 것이다.

1998년 개봉한 이성재·심은하 주연의 <미술관 옆 동물원>. /스틸컷

"사랑이 처음부터 풍덩 빠지는 줄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 버리는 것인 줄은 몰랐어."

또 몇 가지 마음속에 남는 대사를 언급하자면 시나리오 속의 다혜가 지구를 별이라고 언급하자 인공은 '지구는 별이 아니라 행성입니다.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니, 그런 행성도 자기 주변만 맴도는 위성을 갖고 있죠, 달처럼'이라고 한다. 그런 인공의 말에 '그럼 난 행성', '난 정말 달인가 보다. 내 안에서는 노을이 지지도 않으며, 그에게 미치는 내 중력은 너무도 약해 그를 당길 수도 없다. 누군가를 맞이하려는 듯 깨끗하게 치워진 내부. 난 태양 빛을 못 받아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월식 중인 불쌍한 달이다'라던 그녀의 체념이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나에게 더욱 깊게 스며든 대사가 있다. 길을 가다 진열대에 놓인 어느 구두를 바라보며 춘희가 이야기한다. 저 구두가 너무 예쁘다고, 이 길을 가다 보면 꼭 보게 된다고.

"들어가서 한번 신어볼래?"

"아냐 됐어."

"그러지 말고 한번 신어 봐."

"나한테는 안 어울릴 거야, 지금 신은 신발처럼 편하지도 않을 거고."

"신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야, 저기 네거랑 똑같은 거 있다, 그지?"

"그렇네, 처음 봤을 땐 너무 마음에 들어서 샀는데 지금 보니까 왠지 초라해 보이네."

"그건 그 신발을 지금 신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야." /시민기자 심광도

※ 본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정경화 <콘 아모레> 음반에서 최고의 '사랑의 인사'를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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