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문화의전당, 김용환 20주기 특별전&국제 학술심포지엄
대표 캐릭터 1945년 탄생  
해방 후 서민 애환 담아
활발한 작업활동 기록 
김해시 '자원화'시동

코가 큰 '코주부'를 만든 1세대 만화가 김용환(1912~1998). 화백을 기리고 계승하려는 작업이 김해에서 활발하다. 그는 김해에서 태어나 국내는 물론 일본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해 한국 현대만화를 일군 선구자라는 평을 받는다.

지난 5일 김해시와 김해문화의전당이 김용환 화백 추모 20주기 특별전 '코주부, 김용환의 60년 작품세계'를 열었다. 윤슬미술관은 이날 전시 개막과 함께 국제 학술심포지엄을 진행하고, 이에 앞서 개최한 '김용환 기념 전국 만화 공모전' 수상작을 공개했다.

이날 왜 그를 기억해야 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 머리를 맞댔다.

김용환 화백의 대표 캐릭터 '코주부' 1945년 해방 이후 탄생했다. /이미지 기자

◇'최초'를 만든 만화가

김용환의 대표 캐릭터 '코주부'는 1945년에 태어났다. 김 화백의 <코주부 삼국지>와 신문의 시사민화에 등장한 코가 큰 아저씨는 서민과 울고 웃는 연재만화 주인공으로, 그 시절 국민 캐릭터였다.

"해방 후 처음으로 연재한 '코주부'를 그린 것이 아마 만화로서는 나의 제일 처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도 일본서는 전기한 바와 같이 삽화는 그렸지만 만화로서는 이것이 처음이다."

그는 이전에 만화를 그렸지만 '코주부'를 첫 만화였다고 밝혔다.

김 화백은 스스로 화공예술가라고 불렀다. 부산 동래보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오른 그의 그림은 펜화와 삽화로 시작됐다.

그는 1931년 일본 가와바타 미술학교와 데이코쿠미술원에서 공부하며 가바시마 가쓰이치(당시 일본 최고의 삽화가)처럼 되고 싶었다. 간판과 종이 연극을 그리며 실력을 쌓았고 '기타 고지'라는 필명으로 일본 출판사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고단샤의 세계명작시리즈 <소공자>에 참여하며 아주 섬세한 삽화를 그렸다.

만화뿐 아니라 민화와 풍속화도 즐겨 그린 김 화백. /이미지 기자

그러다 김 화백은 1945년 고단샤의 직원 신분으로 귀국한다. 마침 그해 발행한 첫 영자일간지 <서울타임즈> 창간호에 만화 연재를 시작하며 한국에서 새로운 작업에 몰두한다. 이때 '코주부'가 나온다.

또 1945년 최초의 만화 단행본 <홍길동의 모험>, 1946년 최초의 여성 만화 <미쓰 꽈리>, 최초의 성인만화잡지 <만화행진>을 발간하고 1949년 주간신문 <만화뉴스>를 자비로 발행하면서 국내 현대 만화사의 처음을 만들어냈다.

그가 1947년에 펴낸 <토끼와 원숭이>는 2013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토끼와 원숭이>는 동물을 국가를 상징하는 캐릭터들로 의인화해 국가의 속성이나 현실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에 대해 박기준 만화연구자는 "마해송의 반일풍자 동화 원작을 새롭게 구성한 <토끼와 원숭이>는 당시 선진국에서 동물을 의인화하여 풍자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만큼 인기가 있었고 견줄 수 있는 작품으로 충분했다"고 설명했다.

김 화백은 1990년대까지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특히 이순신 그리기는 평생에 걸쳐 이뤄졌다. 펜화, 수채화, 유화로 충무공을 표현했고 집필활동도 했다. 1980년에 유화로 제작한 '명량해전도'가 대표작이다. 또 <자유의 벗>의 표지 그림을 그리며 한국의 풍속과 역사, 전통을 화려한 그림체로 전달했다.

김해시와 김해문화의전당이 지난 5일 김 화백 추모 20주기를 기리며 김해문화의전당에서 국제 학술심포지엄을 연 모습. /이미지 기자

◇전쟁…예술가의 처절한 운명

"만화가 가진 능력의 하나는 비판능력이다. 비판하고 공격할 수 있는 대상은 바로 인간이다."

"만화가는 멸학해도 좋으니 박식해야 하며 일선 신문기자 정도의 날카로운 감각을 가져야 한다. 또한 만화가로서 능란한 데생력을 갖추어야 함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김 화백은 <서울타임즈>, <중앙신문>, <동아일보> 등에서 꾸준히 시사만평을 그리며 만화가의 역할과 자세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했다.

하지만 전쟁은 비극이었고 불행이었다. 특별전에 맞춰 열린 국제 학술심포지엄에서 정규하 작가는 '김해 출신 목정 김용환의 생애와 만화론'을 발표하며 식민통치와 세계정세를 비판한 만화가가 남로당 당원으로 대남 선전물을 만들고, 이와 반대로 유엔군 소속 대북 선전물을 만들어야 했던 시대를 안타까워했다.

김용환 화백의 생전 모습. /김해문화의전당

한국전쟁 당시 선동 조직인 미술가 동맹으로 전향, 방첩부대 CIC 취조, 서대문 형무소 수감, 1959년부터 도쿄 소재 미군 극동사령부의 작전국 심리전과에 근무했던 그의 궤적은 재능이 이념의 도구가 됐고 그림 실력 덕에 기사회생한 예술가의 처절한 운명을 잘 보여준다.

김 화백이 오랫동안 작업한 <자유의 벗>은 매달 전국의 관공서와 학교, 농촌 마을 단위까지 배포되는 미군홍보지이자 교양 시사화보 잡지였다.

이에 대해 정규하 작가는 "평생 이순신을 그리고 <자유의 벗>에 끊임없이 한국을 담았던 김 화백. 아마도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작업이었을 것이다"고 말했다.

또 일본에서 김용환 화백을 연구하는 우시다 아야미 교토조형대학교 교수는 "줄곧 정치적인 문제에 좌우되던 한 사람의 만화가를 쫓아오면서 일본, 한국, 북한, 미국과 국경을 초월한 만화가의 존재를 명확하게 밝히고 싶다"고 했다.

◇만화박물관 계획한 김해시

한편 이번 특별전을 기획한 김해시는 김 화백의 업적을 시의 관광산업과 연계할 계획이다. 이에 대한 논의도 이날 국제 학술심포지엄에서 진행됐다. 윤기헌 부산대 교수는 김해의 이미지를 물으며 상징성 이미지가 부재하다고 밝혔다. 이어 오지지역을 만화로 알린 프랑스 앙굴렘, 만화가 3명을 만화왕국 콘셉트로 마을 전체를 만화마을로 만든 일본 돗토리 등 사례를 보여주며, 50대 이하가 '코주부'를 잘 모르는 현실, 화백의 정체성 문제, 박물관 소장품과 자료의 부족 등을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화백이 남긴 위대한 유산과 그의 생애·만화론을 정리하고 문화관광콘텐츠로 가치를 일구는 일, 이미 시작됐다.

전시는 9일까지. 문의 055-320-1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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