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격파 핵심은 가파른 '산성'과 기세등등 '기마병'
성 지키며 돌아가는 적 뒤를 쳐…중국 전차 대항 '개마무사'양성
비늘처럼 작은 철판 이은 갑옷…말 발걸이 '등자'로 전투에 유리
성벽 허물기 위한 기술도 발달…땅굴 파 짐승 사체 폭발시키기도
고구려, 독자적인 세계 중심 천명
한·수·당 제국과 당당하게 싸워

세뇌와도 같은 지속적인 스토리텔링은 많은 사람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하지만 단순히 흥미로운 가십거리로만 다루고 말기에는 '안시성'과 고구려는 아쉬운 기억이다. 이번 회에는 그 기억이 앞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지, 나아가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할지를 다뤄보고자 한다. 우리에게 고구려란 어떤 존재일까?

◇영화의 역사적 배경

안시성 전투는 그 유명세에 비해서 자세한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다. 안시성 전투(645년)가 기록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이 <삼국사기>(1145년)인데 이는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 500년이 지난 후에 만든 역사책이다. 100년 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라진 거북선의 내용도 지금 알기 어려운 게 현실인데, 500년쯤 후에 쓴 사서에 얼마나 많은 내용이 기록될 수 있겠는가? 중국의 기록 역시 마찬가지이다. 패전의 역사에 대해서 시시콜콜히 적을 사관은 없을 것이다. 전투의 주역인 성주의 이름마저 기록되지 않았다. 당태종이 포기하고 철수할 때 성주만 혼자 성벽에 올라 절하며 하직인사를 했다든지 그리고 이에 당태종이 비단 100필을 주면서 임금 섬기는 일을 격려했다는 기록 역시 패전의 치욕을 물타기 하면서 당태종의 관대함을 포장하기 위한 기록에 가깝다.

영화 〈안시성〉에서 기마부대장이 전투하는 장면. /스틸컷

645년 5월 10일 시작한 당군의 공격은 40일 정도 만에 요동성·백암성 등을 함락시키고 6월 20일 안시성에 이르렀다. 영화 도입부에 나오는 대규모 전투는 고연수와 고혜진의 15만 응원군이 도착한 6월 21일에서 23일까지의 일이다. 여기서 승리한 당태종이 산 이름을 주필산으로 바꾸어 지금은 주필산 전투라고 전한다. 주필은 천자의 행차를 위해 길을 치운다는 뜻이다.

◇고구려의 기본 전술과 무기체계-산성(사진 1)

<사진 1> 고구려 오녀산성 전경. 요령성 환인현에 있는 고구려 산성. 공성의 엄두조차 나지 않을 정도의 위세를 확인할 수 있다. /五女山城(오녀산성), 2004, 文物出版社(문물출판사) 圖(도) 1

고구려의 가장 큰 무기는 산성과 개마무사이다. 고구려 건국 초기 한나라와의 전투에서도 일단 평지에 양식을 비우고(淸野) 수성전을 벌이다가 적이 굶주려 돌아가는 뒤를 치는 전술을 사용했다. 그래서 산성이 방어의 기본이다. 혹자는 고구려, 고려, 구려라는 나라 이름 자체가 가우리 즉 울타리를 의미하는 말에서 나온 것이라 할 정도이다. 고구려는 요동지방을 확보한 이후 요하를 앞에 두고 산성을 중심으로 대중국 방어선을 만들었다. 이런 산성들은 하나가 독립적으로 움직이기도 했지만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서 만약 방어선 중에 있는 성을 점령하지 않고 지나갔을 경우 보급로를 차단당하거나 전·후방 협공에 빠질 우려가 있어 함부로 지나치기도 위험했다. 수나라의 평양성 침입이 그런 예이다. 요동성 일대에서 전진이 멈춘 수나라는 난국을 타개하고자 별동대를 편성해서 바로 평양을 공격했다. 하지만 이 공격도 성공하지 못하고 보급물자는 부족해져서 퇴각하는 도중에 30만 5000명의 군사 중 겨우 2700명만 돌아갔다는 거의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게 된다. 이 전투가 살수대첩인데 강물을 막고 보를 터트려 몰살시켰다는 말은 후대의 허구에 가깝고 실제로는 퇴각하는 적의 뒤를 공략하여 몰살시킨 전투였다. 아마 이 전투의 중심이 기병이었을 것이다. 퇴각하는 군대보다 빠른 기동력 없이 전과를 올리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중장기병(介馬武士)

산성이 방어의 중심이라면 공격의 중심은 기마병이었다. 기마병도 단순히 말을 타고 싸우는 게 아니라 말과 사람 모두 철갑으로 두른 철갑기병, 기수뿐 아니라 말까지 껍질로 감쌌다고(介) 해서 개마무사라고 부르는 전력이다. 고구려의 주적이었던 중국 전력의 핵심은 전차였다. 다양한 전차를 상대하기 위해 고구려는 점점 중장갑으로 무장한 개마무사의 비율을 높였다. 갑옷도 일반 갑옷이 아니라. 비늘처럼 작은 철판을 이어 만든 찰갑(札甲)이다. 큰 판을 이어 만든 판갑보다 발달된 형태이다. 작은 조각들을 이어 붙여야 하니 만드는데 더 많은 공력이 들지만 무사들의 움직임을 좀 더 자유롭게 만들 수 있었다.(사진 2·3)

<사진 2> 고구려 개마무사. 찰갑으로 무장한 말과 무사의 모습, 개마무사는 창, 말에서 내린 병사는 고리 달린 칼(환도)을 들고 있다. 집안현 서강 12호분 동벽 모사도. /한국 고대의 갑옷과 투구, 2002, 국립김해박물관, 圖(도) 11

<사진 3> 함안 가야무덤(마갑총)에서 발굴된 거의 완전한 형태의 말갑옷.


/함안박물관 소장(https://museum.haman.go.kr)
그리고 이 중장기병의 존재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등자'이다. 등자는 기수가 안정적으로 말을 탈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아주는 발걸이다. 등자를 통해 기수는 말을 달리면서 보다 자유롭게 창을 쓰거나 격렬한 전투에 몸을 던질 수 있었다. 본격적인 개마무사를 위한 등자는 기원후 4세기 무렵 요서지방에서 처음 등장했고 그 주인공은 고구려 아니면 선비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사진 4)
<사진 4> 고령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가야시대 등자(보물 570호). /문화재청

-공성전

산성이 아니라도 기습을 당하지 않는 한 일반적으로 공격보다는 방어가 유리하다. 수비측은 성벽이라는 든든한 방어물이 있고 공격측의 움직임을 보면서 대응할 수 있으며 구원군이 오면 양쪽에서 협공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공격 측은 강력한 원거리 무기로 성벽을 파괴하거나, 성벽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싸우기 위한 구조물을 만들어 대응해야 했다. 성벽을 부수기 위해서 사용한 무기는 투석기이다. 이 무렵에는 사람의 힘으로 날렸고 영화와는 달리 수비 측도 사용할 수 있었다.

성벽의 높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성탑(정란)을 이용하거나, 성벽을 타오를 수 있는 구름사다리(雲梯) 등을 이용해야 했다. 어떻게든지 수비 측은 화공으로 병기들을 불태우거나 성벽의 적병들을 향해 불·기름·돌 등을 이용해서 떨어트린다.

하지만 정말로 효율적인 공성방법은 땅굴이었다. 적에게 들키지 않고 성벽 밑을 파서 무너트리거나 굴속에 짐승의 사체를 쌓은 후 부패시킨 다음 불을 붙여 폭발시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방법은 싸우지 않고 항복시키는 방법이다. 고구려 평양성도 밖에서 무너트린 게 아니라 안에서 열었다. 각종 외교나 스파이 등을 활용해서 스스로 열게 만드는 게 최선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이 상책이었다. 645년 당시에도 고구려는 장안성 북쪽 오르도스지방의 세력을 움직여 당을 협공했다. 안시성의 전투도 중요했지만 분명히 외교전도 대당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도대체 왜 중국은?

고구려의 대중국 전쟁은 건국 초기부터 이어진다. 압록강 이북지역을 가로지르는 가장 큰 강이 요하이고 그 동쪽을 요동, 서쪽을 요서라 하는데 광개토대왕 때부터 안정적으로 요동지방을 차지했다. 중국은 수나라 당나라 고구려와의 전쟁을 일으키면서 모두 옛 영토, 요동의 회복을 가장 큰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다음으로 신하 노릇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두 번째가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고구려는 시조 동명왕이 하늘의 신과 하백이라는 수신의 혈통을 이은 존재임을 늘 강조했다. 천손(天孫)이란 말이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스스로 중국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세계의 중심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천자의 세상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영락, 연가 등의 연호를 사용했고, 광개토대왕릉비를 보면 백제왕과 신라왕이 모두 광개토대왕에게 스스로를 노객(奴客)이라 맹세했다 한다. 노객은 노예 같은 비천한 신하라는 의미다. 천자와 제후국관계로 주변 나라들을 거느렸던 것이다. 동등한 나라끼리 군신관계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또 하나 사서에는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중국은 북방을 항상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 북쪽 영역은 시대에 따라 주인공이 바뀌기는 했지만 적어도 훈족이나 몽골족처럼 그야말로 세상을 흔들어놨던 동네이다. 천하의 제국이라 자처하던 중국도 만리장성을 쌓으면서 이들을 두려워했다. 가을이 되면 살찐 말들이 북쪽에서 침략할까 봐 두려워했던 중국에 고구려와의 전투는 북방에 대한 헤게모니 싸움이었고 이슬람과 기독교 문명의 충돌처럼 서로 다른 두 세상의 충돌이었다. 그리고 고구려는 한(漢)·수(隨)·당(唐)으로 이어지는 제국과 당당하게 싸워나간 동북아시아의 중심축이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고구려는?

우리는 그동안 북쪽이 막혀서 섬나라처럼 살아왔다.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은 인식에서도 잊히기 마련이다. 안시성도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잠시 우리의 인식에서 벗어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 양만춘이라는 이름이 알려지고 연행(북경 가는 길)에서 만날 수 있는 안시성이 새롭게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다.(물론 안시성이 어디라고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고구려의 기록도 마찬가지이다. 교과서에서 지도에서 아무리 이야기를 다루어봤자 경험하지 못하는 기록은 공허할 뿐이다. 하지만 최근 갈라진 한반도의 교통로가 하나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사실상 섬나라였던 분단 현실을 극복하고 주변 나라들과 육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 필자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주변국은 우리가 서로 편하게 왔다갔다 할 수 있는 나라이고, 서로 다른 문화의 접촉은 우리 젊은이들의 시각을 보다 넓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때 고구려가 진정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자라날 이 땅의 후손들에게 새로운 환경이 주어진다면 그들에게 고구려는 그 새로운 환경이 한 번도 겪지 못한 일이 아니라 이미 한 번 겪어본, 그래서 한 발 더 도약할 수 있도록 심어진 씨앗일 것이다.

※이 기획은 LH 한국토지주택공사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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