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가을하늘은 자꾸만 바람을 따라 떠나라고 말을 건다. 바람과 흰 천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계절이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건만 책은 잠시 접고 생의 공책을 펼쳐 경험으로 '직접 책을 써'라며 속삭인다. 많은 사람이 여행을 떠나기 딱 좋은 날들. 가장 책을 못 읽는 계절이기에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란 슬로건을 출판사가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작정하고 집어든 여행에세이가 다시 내게 말을 걸어온다. '너는 양의 눈을 본 적이 있는가' 이 한마디가 나를 끌어당긴 적이 있었다. 그리고 무작정 강원도행 버스표를 끊고 대관령 양떼 목장을 찾아갔던 일이 떠올랐다.

긴긴 시간을 돌아 양 떼를 마주쳤을 때의 그 느낌. 그리고 단 한 문장의 이끌림을 확인하는 순간 찾아오는 파도. 가을바람을 타고 다시 찾아왔다면 어쩌면 가을이 내게 주는 '경계'란 단어가 아닐지 생각한다.

경남에서 양 떼를 체험하기 위해선 더는 대관령까지 가지 않아도 되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경남 남해에도 아이들과 함께 양들과 교감하며 자연을 느낄 수 있는 목장들을 소셜커머스를 통해 알게 되었다.

세상은 정말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10년 전의 나의 정보를 검색하는 방법도 버튼 하나로 가능하게 바뀌었다. 그때의 나는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빛바랜 수첩을 펼쳐 그날의 내가 적은 문장을 읽는다. 보이지 않던 것을 보려고 용쓴 흔적들이 지천이다.

수첩 속 그곳엔 커다란 울타리가 하나 있어 안과 밖의 경계가 있다. 울타리가 그어놓은 이쪽과 저쪽은 서로 편을 나누어 싸우기 시작한다.

전쟁이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양 네 마리…. 서로의 양들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은 끝내 울타리를 넘지 못하고 분단되어 있다.

경계를 낮추자 울타리 너머 풍경이 보인다. 혼자일 때는 몰랐던 것들이 가족이란 이름으로 점점 더 선명해진다.

그날의 커다란 울타리는 어디로 간 것일까. 높게만 느껴졌던 울타리가 오늘따라 낮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순간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이 내게 달려온다. 남해의 푸른 가을바람이 시원하게 나를 훑고 지나간다. 나도 모르게 넘어버린 울타리. 그곳에 노란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는 양 떼가 서 있었다.

울타리를 끝내 넘지 못한 그날의 나는 어쩌면 양의 눈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작은 사료 한 움큼 쥐고 손바닥을 펼쳐본다. 달려들어 커다란 몸집으로 밀어내는 양의 힘에 울음 터트리는 아이들도 몇 보인다. 양들의 몰랐던 모습에 당황하지만, 호기심은 울음을 이겨내고 서로 춤추게 만든다.

이제 울타리가 필요 없는 이곳은 자연의 한복판이다. 서로의 체온이 맞닿는 손끝과 얼굴에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 순식간 사라지는 경계는 너무도 쉽게 울타리를 잊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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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는 봄을 지나 뜨거운 여름을 견뎌낸 양털을 만진다. 전혀 보드랍지 않은 털을 만지는 순간 새로운 경험이 생의 공책에 적힌다.

낯선 시선. 미처 몰랐던 것들의 이해. 찬란한 가을 너머 있을 또 다른 계절을 기다리며 이제야 양의 눈을 바라본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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