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부장을 하던 작년의 일이다. 한 학생이 인성부실 문을 두드렸다. 한눈에 보아도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친구와 크게 다투었다고 생각한 나는 우선 흥분이 좀 가라앉도록 따뜻한 차를 내밀며 손을 꼭 잡아주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 학생은 분노와 설움에 북받친 목소리로 조금 전 매점에서 음료수를 사서 친구와 교실로 가다 복도에서 만난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한 말을 전했다. 그 학생의 말로는 "야! 너는 공부도 못하는 놈이 뭐가 그리 좋아서 맨날 웃고 다니냐? 이제 2학년이니 정신 좀 차려라"더라면서 "그 선생님의 사과를 받고 싶다"고 했다. 그러고는 "공부 못하면 사람도 아닌가요?" "공부 못한다고 웃지도 못하게 하는 게 학굡니까?"라며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통계를 봐도 성적이 낮은 학생이 학업 스트레스는 더 크다고 한다. 그 선생님의 의중이야 알겠지만, 아무리 주는 이의 마음이 담긴 따뜻한 차라 하더라도 다 깨어진 찻잔에 담아 건넬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본의 아니게 학생에게 큰 상처를 주고만 그 선생님은 평소 동료들에게 따뜻하고 살가운 분이어서 내겐 더 충격이었다.

비단 이 사건뿐이겠는가? 별 신날 일 없는 입시경쟁의 한가운데에서 학생들이 누리는 일상의 작은 즐거움마저도 온전하게 지켜줄 수 없는 학교의 현실은 20, 30년 전의 학교 문화와 근본적으로 변한 것이 있는지 묻고 싶다.

그동안 세상은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변신하였고,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을 이야기하는 자율과 창의성의 시대가 도래했다. 인재의 조건이 달라지고, 직업의 생태계가 바뀌고 있으며, 생산물은 없지만 세계 최대의 쇼핑몰인 알리바바가 있고, 은행은 아니지만 카카오뱅크가 금융기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심지어 인공지능 알파고가 이세돌과 바둑 대국을 펼치는 장면을 전 세계가 시청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아침 등교시간 정문을 지키며 학생들의 위반사항을 지적하고 있고, 두발 모양과 길이를 규제하고, 가장 왕성한 활동과 성장의 시기를 옥죄는 교복만을 고집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겨울 외투의 색상과 착용 시기까지 학교가 규제하고 있다니 기가 막힐 일이다.

신체의 기능과 건강상태가 서로 다른 학생들에게 각자의 필요에 따라 추위와 더위를 이기는 것조차 획일적인 통제대상이 되고 있다니 이것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규칙들이란 말인가?

오늘의 학교 문화는 이미 사라졌어야 할 것에 대한 집착으로 스스로 미래를 가로막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경남교육감이 '학생인권조례'의 제정을 추진하는 것은 그래서 더욱 진정성 있고 현실적인 대안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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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학생인권'을 존중하면 '교권'이 침해될 것을 우려한다. 하지만 학생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인격적으로 대하는 교사는 학생들에게 더 존중받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또한, 학교에서부터 인권의 가치를 배우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어 갈 것이고, 학교를 인권친화적인 문화로 만들어가는 원동력이 될 것임을 믿는다. 교사와 학생이, 학생과 학생이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면서 미래의 꿈을 즐겁게 키워가는 학교를 꿈꾸며 '경남 학생인권조례'를 힘껏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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