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성자들)의 뼈에서 모든 창조물에게로 도움이 흘러들어온다 / 무법이 활개를 치는 문명 세계는 그들의 기도로 지탱된다 / 그리고 죄악의 굴레를 짊어진 세상은 그들의 중재에 의해 보존된다 / 논란으로 가득 찬 세상은 그들에 의해 지켜진다 / 사념으로 괴로움을 겪는 세상에 그들은 철야 기도로 평온함을 가득 채운다

동로마 기독교 세계를 수놓았던 성자들이 세상을 어떻게 보듬었는지를 노래한 옛 시다. 그들은 교회 성직자들이 주지 못하는 연대감과 영적 가르침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충족시켰다.

그런 성자가 제도권에 재림한 것일까? 사제 성추행이나 바티칸 내부 갈등 때문에 잠시 주춤한 듯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여전히 전 세계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인기인이다. '2천 년 만에 권좌에서 내려온 교황'이라는 수식어가 말해주듯 항상 낮은 데로 임하는 그는 지금도 걷고 행동하며 고통이 있는 곳에 얼굴을 내민다. 2014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세월호 참사 유족들을 따뜻하게 보듬던 모습은 한국인들에게 강력한 '영적(靈的) 풍속화'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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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선출된 가톨릭의 수장 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이 과거 성자들을 뛰어넘는 것은 영적 메시지와 서민 행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내재된 구조적 문제점들을 통렬하게 지적하고, 명시적 교시를 통해 이를 개선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원래 대다수 가톨릭 사제들은 영성이나 평화, 화해와 같은 공허한 단어를 남발하며 지금까지 그 사회가 지닌 문제점을 외면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좌우대립이 심각했던 시절 브라질 빈민의 대부 카마라 대주교가 했던 말은 이런 상황을 잘 대변한다. "내가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 성자라고 불리지만, 그들이 왜 가난한지 이유를 캐물으면 공산주의자로 불린다."

세속 권력과 마찰을 빚을까봐 수많은 종교지도자들이 꺼렸던 이 부분을 프란치스코 교황은 대놓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가 하면 교회와 성직자들에게 교회 밖으로 나가 고통에 신음하는 이들을 실질적으로 도울 것을 촉구한다.

2천 년 교황 권위를 완전히 새롭게 규정한 프란치스코 교황 덕분에 가톨릭에 대한 호감이 높아지고, 신자도 대폭 늘었다. 지난 2천 년간 로마 가톨릭이 신의 이름으로 저지른 온갖 악행을 다시 들여다보자는 이야기도 이젠 잘 들리지 않는다.

한 개인이 이처럼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온화하면서도 강단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인격적 캐릭터를 직접적 원인으로 지목할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캐릭터를 지녔다고 해서 누구나 바람직한 변화를 몰고 올 수 있는 건 아니다.

교황이 전 세계를 감동에 빠트릴 수 있는 건 바로 2천 년간 구축된 가톨릭 독재체제 덕분이다. 가톨릭에서는 교황이 전체 교회의 우두머리로서 가톨릭교회와 신도들에 대해 가지는 권한을 일컬어 '교황수위권(敎皇首位權·Primatus Romani Pontificis)'이라고 부른다. 이 권한은 실로 막대하다.

교황은 그리스도가 사도의 우두머리로 삼은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모든 사제와 신도에 대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완전하고 보편적인 권리를 가진다. 구체적으로는 파파(Papa)라는 칭호를 독점하는 명예권과 교도(敎導), 사제(司祭), 사목(司牧), 감독(監督), 사법(司法), 행정(行政) 분야의 최고 권한인 재치권(裁治權)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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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바티칸의 산피에트로대성당 내부.

교황청 아래 각 교구 및 교회 사제들도 각각 사목과 신자 관리를 담당하는 중대한 권한을 지닌다. 요컨대 가톨릭 독재체제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사제주의(司祭主義)'를 담기에 적합한 그릇이라고 할 수 있다.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교황에게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무류성(無謬性)이 교의로 채택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이 교리는 수많은 교황들이 저지른 도덕적, 신학적, 정치적 오류나 타락상이 남긴 문제를 해명하는 근거가 됐다. 예를 들어 15세기 초 종교개혁가로 활동하던 존 후스는 부패한 교회를 비판하다 급기야 교황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화형 당했는데, 무류성에 따르면 이런 조치마저 정당화되는 것이다.

지금이야 이런 맹목적 권위를 떠받드는 이가 없지만 교황을 향하는 눈길은 아직도 '신의 대리인'을 대하는 경외로 가득하다. 그리고 이같은 교황권은 전 세계에 분포하고 있는 가톨릭교회와 이 둘을 잇는 교회시스템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운용된다. 결국 교황에게 집중된 권위,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교회 시스템 덕분에 교황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세계 구석구석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오랜 시절 많은 이들을 절망케 했던 가톨릭 독재체제가 프란치스코 교황의 등장으로 긍정적인 면모를 띠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교황의 자비로운 얼굴이 굴곡으로 점철된 독재체제에 의해 지탱된다는 것, 이는 아이러니란 단어를 동원하지 않고선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가톨릭의 타락에 대항해 종교개혁을 부르짖었던 개혁가들이 남긴 유산과 비교하면 이 아이러니는 더 커진다. 한국 사회를 예로 들면 지금 개신교회는 물신주의에 매몰돼 중세 가톨릭에 버금가는 지탄을 받고 있다. 반면 그토록 욕을 들었던 가톨릭 독재체제는 프란치스코 교황 덕분에 오히려 위아래가 일치된 바람직한 시스템으로 여겨지고 있다.

독재(獨裁)는 개인이나 어떤 집단이 전권을 행사하는 시스템을 일컫는다. 그런고로 종종 민주주의와 직접 비교되면서 '그냥 나쁜 시스템'으로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실제 독재는 경우와 사례가 매우 복잡하다.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맥락을 동원해 살펴보지 않고서는 그 성격과 역기능을 제대로 짐작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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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사르 동상.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런 말은 로마 황제정을 창시한 것으로 알려진 '대중독재의 효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남긴 말이다. 그 자신은 황제가 된 적이 없지만 그는 유럽 세계에서 독재자, 곧 황제를 나타내는 상징이다.

갈리아에서 군단 지도자로 성장한 카이사르는 기원전 49년 원로원 명령을 어기고 로마로 들어와 정권을 장악하곤 공화정(共和政)-사실은 귀족들이 통치하는 과두정(寡頭政)-을 좌지우지하는 독재자가 된다. 그러다 독재자로 막 꽃을 피우려는 순간 공화정 수호자들에 의해 암살당하고 만다. 혼란에 빠진 정국은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수습했으며, 그는 카이사르를 계승해 초대 황제 자리에 오른다. 이른바 로마 제정(帝政)은 이렇게 시작된다. 공식 황제는 옥타비아누스가 처음이지만 카이사르의 가문, 이름, 명성과 그 재산이 고스란히 옥타비아누스에게 전해졌기에 사실상 로마제정은 카이사르가 시작했다고 보는 게 옳다.

그렇다면 카이사르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공화정을 수호하려는 신념파들이 비난한 대로 로마 민중에게 영합해 인기만 추구한 대중독재자였을까? 탐욕으로 가득한 권력자였을까? 카이사르와 그 시대 로마에 대해서는 수많은 연구물이 있기에 딱 부러지게 그를 묘사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그를 '탐욕과 대중독재'란 말 그물에 가두는데 반대하는 논리는 주목할 만하다.

카이사르를 암살한 공화정 수호파들은 귀족들이었다. 그것도 엄청난 토지와 노예를 소유한 기득권층이었다. 카이사르가 등장할 즈음 로마 사회는 계속되는 전쟁으로 중간계층은 몰락한 반면 귀족들인 원로원 의원들이 전리품과 토지를 독차지하면서, 점증하는 사회모순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권력을 잡자 토지 개혁을 시발로 곡물 통제정책, 의료 복지정책, 속주민 융화정책 등 다양한 개혁과제들을 완수하면서 로마 사회를 재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빈민, 해방 노예, 속주민들을 구제하고 원로원으로 대표되는 기득권을 억제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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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수도 로마에 남아 있는 고대 로마의 흔적들. 고대 로마의 독재자 카이사르는 명장으로 유명했지만 토지 개혁, 의료 복지정책, 도로 건설 등의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출발부터 '민중파'에 속했던 그는 따라서 권력을 한 손에 쥔 독재자이기는 했어도 자신이 가진 권력을 개인이 아닌 로마를 위해 사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항상 로마 민중들의 기분(?)을 살피며 강력한 위민(爲民) 정책을 폈기에 현대에 수립된 대중독재자 개념으로 매도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카이사르를 암살한 귀족들이야말로 '공화정 수호'라는 명분 아래 기득권 유지에 몰두하던 이들이었다.

카이사르는 또한 관용이란 정치적 태도로도 유명했다. 통상 독재자들이 정치적 반대자들을 무자비하게 다룬 것과는 달리 카이사르는 정적들을 관대하게 대했다. 이를 두고 정치 술수였다는 평가도 있지만 그 때문에 목숨까지 잃었던 걸 보면 관용은 그가 지닌 정치철학이었다고 보는 게 옳다. 독재자가 이런 태도를 지니는 건 적어도 목숨을 놓고 자웅을 겨루던 시절에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개명된 세기라는 20세기에 정적인 트로츠키를 멕시코에서 도끼로 암살하지 않았던가.

대중독재의 원천으로 지목받는 카이사르는 이렇게 볼 때 상당히 억울한 독재자다. 카이사르의 일대기는 그가 독재를 목표로 진군한 사람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독재자란 타이틀을 획득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물론 카이사르는 생전에 이룬 성취 때문에 후대에 이르러 전제군주이건, 대중독재자이건 완벽한 독재를 꿈꾸는 이들에게 본보기가 된다. 이름 자체가 시저, 짜르, 카이저처럼 황제를 뜻하는 보통명사가 되었기에 로마제국 영광을 되살리자는 이탈리안들-대표적으로는 무솔리니-은 물론 수많은 추종자를 양산한다.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이들에게 카이사르가 부정적으로 비쳐지는 건 아마 파시스트들이 특히 그를 자주 호출했기 때문일 성싶다.

"천하가 다스려지고 다스려지지 않고는 나 하나의 책임(原以一人治天下), 이 한 몸을 위해 천하를 고생시키는 일은 하지 않으리(不以天下奉一人)."

카이사르가 서양에서 대중독재를 처음으로 일반화했다면, 동양에서 전제군주 독재를 정점에서 완성한 이는 청나라 옹정제다. '爲君難(군주가 되기란 지극히 어려운 것)'이란 이 시가 말해주듯 그는 군주가 갖춰야 할 성실이 어떤 것이라는 걸 온 몸으로 증명한 독재자다.

"천자로부터 명령받은 일은 열심히 실행하지 않으면서 쓸데없는 일에 참견할 틈이 어디 있는가? 또다시 옛날 버릇이 나와서 자기 문집을 장식할 욕심에 한마디 멋들어진 말을 해보겠다고 우쭐거리는 것이 분명하다."

"너는 이런 상주문을 올린 뒤 이 문장을 문집에 실어 세상 사람들에게 갈채를 받으려는 심산일 것이다. 그럴 테면 어디 그렇게 해봐라. 단 짐으로부터 심하게 질책당한 이 답장도 문집에 함께 실어 출판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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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나라 제5대 황제 옹정제.

옹정제가 유명한 문인 정치가 진세관(陳世)에게 보낸 답장이다. 황제가 보낸 편지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폐부를 찌르는, 직설적인 글이 인상적이다. 옹정제는 신하들과 지방 현장정치의 득실에 대해 주고받은 글을 <옹정주비유지(雍正批諭旨)>라는 이름으로 당대에 출판한 바 있는데, 이는 지금도 후학들에게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애민(愛民)'과 '성실(誠實)'로 가득하다. 출판된 분량은 112책인데, 사실 이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옹정제는 지방관들이 상주문을 올리면 낱낱이 잃어보고, 일일이 답변을 보냈는데 황제의 거실에는 이런 과정을 거쳐 되돌아온 문서가 가득했다고 한다.

한 마디로 만기친람(萬機親覽)을 실천했다는 말이다. 중국 역대 황제 중에서도 위민을 표방하고 실천한 이들이 제법 있지만 이토록 철저하고 집요하게 관료들을 닦달하며 백성들을 살핀 이는 찾기 힘들다. 역사가 미야자키 이치사다 선생은 "아주 사소한 일도 그냥 넘어가는 일 없이 그리고 한 가지 일도 허투루 처리하는 적 없이 온 힘을 다해 빈틈없이 정무에 몰두한 옹정제의 진지함에는 참으로 머리가 숙여진다. 아마 이만큼 양심적인 제왕은 중국 역사는 물론 다른 어느 나라 역사에서도 견줄만한 예를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청(大淸) 왕조와 만주 민족이라는 두 개의 운명을 걸머진 상태에서 자신이 천명을 받은 황제임을 깊게 자각한 사람이다. 그래서 애민을 바탕에 두되 청 왕조나 황제권에 맞서는 움직임은 추호도 용서하지 않았다.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형제들을 개 돼지로 몰아 끝없이 탄압하고, 사상 모반사건이 일어나면 대상자가 진정으로 승복할 때까지 논쟁을 벌였다. 황제권에 충심으로 귀의하지 않는 권신(權臣)들은 모조리 숙청했으며, 직분에 소홀한 이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갈궜다.

부친인 강희제가 후계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것을 보고는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이란 전무후무한 방법으로 후사를 안정시켰다. 태자밀건법이란 차기 황제 이름을 비단에 써서 정전(正殿) 액자 뒤에 넣어놓았다가 황제가 죽은 뒤에 개봉하는 방식인데, 이렇게 되니 다들 그 향방을 알 수 없어 분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황제권의 향방은 황제만이 알 수 있다'는 지극히 독재적인 시각이 아니고서는 생각해내기 어려운 방법이다.

치밀하고 엄혹한 독재정이었지만 옹정제가 지향한 스타일은 눈물이 날 만큼 선의로 가득했다. 미야자키 선생의 말마따나 이런 진정성 때문에 백성들은 독재제를 대체할 다른 시스템을 떠올리지 못했을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옹정제는 '선의로 무장한, 진짜 나쁜 독재자'라고 할 수 있으리라!

2018년 9월 11일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군사독재 잔재인 위수령이 폐지됐다. 군사독재라고 쓰지만, 그런 독재를 가능하게 한 것은 당시 시대상황 만이 아니었다. '역사상 존재했던 수많은 독재'가 영감을 주었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미래는 어떨까? 유발 하라리는 '21세기 디지털 독재'를 우려한다. 조지 오웰이 묘사한 '빅 브라더'는 1984년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하라리에 따르면 조만간 우리를 찾아올 가능성이 높다. 그때도 '역사상 존재했던 수많은 독재'가 이런저런 형태로 새롭게 응용되지 않을까?

참고도서

♣ 애드리언 골즈워디 지음/백석윤 옮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루비박스

♣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차혜원 옮김, <옹정제>, 이산

♣ 피터 브라운 지음/이종경 옮김, <기독교 세계의 등장>, 새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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