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의 애창곡인 ‘가고파'

나는 '가고파'라는 노래를 고등학교 시절부터 좋아했다. 부르면 부를수록 노래의 매력에 더 빠져들게 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반복되는 시조의 운율이 갖는 매력인 것 같다. 눈을 감고 노래를 부르다 보면 어릴 적 동무들과 뛰어놀던 고향 바다의 파란 물과 물새들이 눈앞에 나타난다. 특히 '가고파라 가고파, 보고파라 보고파, 돌아갈까 돌아가, 찾아가자 찾아가'에서는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아련하게 한다. 시조시인 김복근은 거듭 반복되는 종장 끝 음보의 율조는 '가고파'가 시 자체로서 이미 음악성을 획득하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가고파라 가고파'라는 식의 뛰어난 방식으로 그리움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이에 추가해서 그 파란 물, 그 잔잔한 고향, 그 동무들, 그 뛰놀던 고향동무 등과 같이 지시(指示) 관형어(冠形語) '그'를 사용하여 부르는 이로 하여금 어릴 적 고향을 구체적으로 보고 느끼게 할 뿐만 아니라 당장이라도 가고 싶게 한다. 시조시인 한춘섭(성남문화원 원장)은 그의 <한국 時調詩논총>에서 이 부분에 대하여 '가고파의 강조수법에 대한 보충작업이다. 연(聯)이 거듭될수록 그리움이 솟아올라 새로운 추억으로 온 몸을 사로잡는 듯하다'고 했다.

내가 알고 있는 노산의 노래가 의외로 많다. 한때이긴 하지만 어제 온 고깃배가 고향으로 간다는 '고향생각'은 까불면서 불렀고,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동무생각'과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소리를 들려주는 '성불사의 밤'은 매력적인 저음의 테너 가수를 흉내 내듯이 불렀다. 예쁜 여자애가 살고 있는 집 앞을 학교 등하교 때마다 지나다니면서 '그 집 앞'을 불렀고, '옛 동산에 올라'에서는 어릴 때 놀러다녔던 대구 달성공원의 언덕에 다시 선 기분이었다. 그 외에도 '사랑', '봄처녀', '금강에 살으리랐다' 등 가사를 보면 지금도 흥얼댈 수 있는 노래가 많다. 이제 와 생각하니 금수현, 이수인의 노래도 한두 곡밖에 모르는데 유달리 이은상이 작사한 노래를 많이 알고 있다.

성악가이셨던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께서 많이 가르쳐주셨다. 이 글을 쓰면서도 다시 한번 고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주 노래를 부른 당시에는 작곡자, 작사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냥 노래가 좋아서 불렀을 뿐이다. 노산의 시에 가장 많이 작곡한 분은 홍난파이다. 예를 들면 옛 동산에 올라, 성불사의 밤, 고향생각, 봄처녀, 장안사, 사랑, 금강에 살으리랏다 등이다. 그다음은 현제명이다. '그 집 앞', '산 위에 올라', '진달래' 등을 작곡하였다. 홍난파는 우리나라 근대음악사 중에서 양악사의 가장 큰 산맥이고 현제명은 근대뿐만 아니라 현대 양악계에 까지 큰 산맥이라고 한다. 두 분은 조선문예회와 수양동우회 사건을 계기로 음악보국의 길에 적극적으로 나선 친일파라는 공통점이 있다. 가고파는 한국의 슈베르트라고 불리우는 김동진이 작곡했는데 역시 친일파이다. 그러나 가고파는 한국 가곡의 최고 역작으로 평가받으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동무생각'은 창신학교에서 같이 근무했던 동료교사 박태준이 작곡하였다. 그런데 뒤늦게 이 좋은 노래들의 아름다운 가사를 지으신 분이 전두환의 대통령 당선을 경하했다는 걸 알고서 깜짝 놀랐다. 가고파를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노산의 그런 처신이 더욱 실망스러웠다. 가고파를 좋아하는 대부분의 시민들 역시 이를 몹시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 같다.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의 대통령 당선을 경하하였다

알고 보니 노산은 이승만과 박정희에 이어서 전두환 정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12·12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은 1980년 8월 27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 제7차 회의에 단독후보로 나서서 대의원이 투표하는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기적이 일어났다. 전체 대의원 2540명 중에서 참석대의원 2525명으로 투표율 100%이고 그중에서 찬성 2,524표, 무효 1표로 총투표수 대비 백분율(득표율) 100%의 찬성으로 1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9원 1일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은 곧바로 헌법 개정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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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합시사월간지 <정경문화> 1980년 9월호.

<정경문화> 1980년 9월호는 '한국의 새 지도자, 전두환 대통령'이라는 특집을 꾸몄다. 노산은 '새 대통령에게 바란다'라는 제목과 새 시대, 새 역사의 지도자상이라는 부제로 글을 썼다. 직책은 민족문화협회 회장이었다. 먼저 '11대 전두환 대통령의 당선을 경하하며 아울러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새 대통령에게 바라는 국민의 간절한 뜻을 이 자리를 빌어 드리고자 한다'고 밝혔다. 글의 곳곳에는 한국적 민주사회, 한국적 특수성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러한 생각은 결국 '10·26사태 이후 두어 차례나 위급한 고비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앞에는 안팎으로 닥쳐오는 난관이 겹겹이 가로놓여 있기 때문에, 모든 여론들이 한결같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고 있다' 식으로 강력한 지도자의 등장을 정당화시켜주는 논리가 되며 모든 여론이 그렇다는 식의 착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10·26사태 이후에 있었던 두어 차례의 고비는 12·12와 5·18을 지칭하는 것 같은데 하극상과 유혈진압을 '극복'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다행'이라고 까지 표현하는 걸로 봐서 철저히 진압군의 입장에 서 있는 걸 알 수 있다. 5·18의 가해자이며 12·12 반란의 주범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채 대통령 100% 당선을 경하한 것이다. 물론 국제적 통찰력의 소유자, 강력한 지도자는 국민의 동반자다, 인재를 사랑하고 널리 물어야 한다, 법치와 덕치의 겸행, 국민의 스승으로서의 지도자가 되라는 등의 7가지를 부탁하였다. 결론 부분에서는 새역사 창조를 위해서 같은 배를 탄 국민들은 욕하고 비웃지 말고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글 제목 옆에는 자필 서명을 남겨 놓았는데 편집자의 의도일 수도 있다. <노산 이은상 선생>을 쓴 김봉천은 '숱한 고난을 겪어온 삶의 선배로서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삶을 바라보며 충정 어린 마음으로 권고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하였다.

'가고파'를 지은 노산이 강력한 지도자라고 당선을 경하한 전두환이 일으킨 12·12가 무엇인가.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은 '12·12는 군사반란으로 5·17 비상계엄확대와 5·18 광주유혈진압은 국헌문란 목적으로 진행한 내란'로 규정했다. 대법원 판결에 따르면 전두환은 군사반란과 내란수괴죄로 처벌받았다.

이선근, 조병화, 서정주, 김춘수, 이병주, 천금성

물론 이 당시의 사회원로 중에서 노산만이 전두환에게 덕담을 한 것은 아니다. 이승만 정부에서 문교부장관을 지낸 이선근(1905~1983년)은 대통령선거 1주일 전인 서울신문 1980년 8월 20일 자에 '전두환 장군을 다음 대통령으로 선출해야 한다는 데 국민의 여망이 모여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국민의 의식 수준이 높음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라는 낯 뜨거운 말을 하였다. 시인 조병화(1921~2003년)는 1980년 8월 28일 경향신문에, 9월 7일 일요신문에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 축시를 게재하였다.

시인 서정주(1915~2000년)는 이승만 대통령의 전기 쓰고 박정희 대통령의 찬시도 쓰고 대통령에 출마한 전두환 찬조 TV연설도 하였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북한 공산당의 행위로 규탄하기도 했고 라디오와 TV에 출연해서 전두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그 대가로 5공 국보위 위원이 되었다. 1987년에는 전두환 대통령의 4·13 호헌조치에 대해 '구국의 결단'이라는 지지성명을 내었고 '전두환 대통령 각하 제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라는 시를 써서 '단군 이래 최고의 미소'를 가졌다고 전두환을 찬양하였다. 그의 나이 72세였다. 마치 노산이 1956년, 이승만 대통령 제80회 탄신일에 '송가'라는 제목의 헌수송(獻壽頌)을 써서 찬양한 것과 똑같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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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서정주가 쓴 이승만 전기 .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 ……

1986년 가을 남북을 두루 살리기 위한

평화의 댐 건설을 발의하시어서는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육천만 동포의 지지를 얻으셨나니

…… ……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대여 김춘수(1922~2004년)는 1981년 제5공화국 출범 시에 제11대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권력의 점잖은 요구에 못 이겨서 승낙한 것인지 거절하기가 부담스러웠는지는 알 수가 없다. 생전에 그는 100% 피동적인 사건이었다고 말하였다.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온 80여 세의 원로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강력한 지도자, 국민의 여망이라는 터무니없는 발언을 하였던 것이다. 원로는 원로다워야 할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자신을 존경하고 자신의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지리산>의 작가 이병주(1921~1992년)는 노골적으로 전두환 대통령을 예찬하였다. 1991년에 쓴 <대통령들의 초상-우리의 역사를 위한 변명>이 대표적이다. 연설문 작성까지 맡아서 했다. 1988년 11월, 전두환 대통령이 백담사에 갈 때에 발표했던 성명서 역시 이병주가 썼다고 신문에 보도되었다.남재희, <통 큰 사람들>, 리더스 하우스(2014년), 54쪽 천금성은 전두환의 전기인 <황강에서 북악까지>를 썼다.

노산이 강력한 지도자를 원한 것은 국난과 혼란을 염려하는 투철한 조국애에 근거한 것이며 평생 동안 가졌던 소신이기도 하다. 그 소신으로 인하여 권력자가 저지르는 불의와 부정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대하였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의 정서와 멀어져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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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은상 작사, 김동진 작곡한 영남대 교가.

불과 1년 5개월이었던 국정자문회의 위원

국정자문회의에 참여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10월 22일 국민투표에서 91.6%의 찬성으로 통과된 개정헌법은 신군부의 장기집권을 보장하는 한편 그들의 입맛대로 기존의 정당 체제를 재편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하극상으로 권력을 쥔 전두환은 1981년 2월 25일 전국에서 4명의 후보자를 대상으로 선거인단에 의해 실시된 간접선거에서 투표율 100%, 유효투표 총수의 90.2%를 얻어 6개월 만에 다시 제1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며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두 달 후인 4월 23일, 전임 대통령, 전직 삼부요인과 각계원로 25명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하고 국정자문회의를 발족시켰다. 전두환 대통령은 발족치사에서 '정의로운 민주복지국가 건설을 위해 국민 참여의 깃발이 높이 게양되었다. 국정자문회의는 이러한 국민 총참여와 화합을 촉진하는 표상'대한뉴스 제1329호이라고 했다.

국정자문회의는 법에 따라 최규하 전 대통령이 의장이 되고 위원들이 장방형으로 테이블 앞에 앉아서 매달 각 부처의 행정 현황을 보고받고 또 앞으로의 방침에 대하여 의견을 개진하는 대통령 직속 헌법기관이었다. 위원의 대부분은 전 총리, 국회의장, 대장급 군인 그리고 사회 각 분야의 원로급 인사들이었다. 허정 전 내각 수반, 민복기 전 대법원장, 윤치영 전 공화당, 박순천 전 민중당, 유진오 전 신민당 당수, 홍종인 박물관협회장, 이영복 천도교 교령, 강원룡 목사, 노산 이은상, 유달영, 백낙준, 이병도, 이재형 등도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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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산 이은상의 묘소.

위촉장은 전두환 대통령이 직접 전달하였다. 이때 노산은 지병인 방광암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1980년, 치료하기 위해 미국을 다녀오기도 했고 1981년 한방치료를 위해 대만을 다녀오기도 했다. 같은 해 12월에 경희대 의료원에서 방광을 들어내는 대수술을 했다. 위촉받은 지 불과 1년 5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1982년 9월 18일 향년 79세로 노산이 돌아가셨을 때 백낙준은 이은상 선생 사회장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장례위원회 고문 김상협, 박순천, 윤보선, 이희승, 최규하 등 27명, 지도위원 곽종원, 안호상, 이병도, 정인승, 함석헌 등 101명, 장례위원장 백낙준, 집행위원장 송지영 그 외 총무, 의전 등의 75명, 장례위원 2549명 등 장례에 관계한 인사만 해도 총 2652명임을 김복근은 밝히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체제를 반대한 경력이 있는 백낙준 국정자문위원도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제1묘역에 안치되었다. 국립묘지는 국가원수묘역, 애국지사묘역, 국가유공자묘역, 장군묘역, 장병묘역, 경찰묘역 등 6가지로 나누어져 있다. 그중 국가유공자묘역 제1묘역에는 버마외교순국사절, 이은상, 장택상, 정일형, 최선근, 백낙준 등이 안치되어 있다. <월간 말>의 신준영 기자는 국립묘지가 진정 민족의 얼이 서린 곳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10여 명은 묻혀서는 안 된다면서 이승만, 박정희, 이갑성, 이은상, 백낙준, 리선근 등을 열거하였다.노산의 묘비문은 송지영이 썼다.

…… / 한 평생 밟으신 길 마음의 길 / 나라사랑 겨레사랑 오직 한길 /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 두루 사랑으로 누비신 조국강산 / 학문의 바다 변함없이 물굽이 / 고금을 꿰뚫어 우뚝 솟아 계시니 / 해와 달 거불어 빛을 다툼이라/ 높고 깊고 넓으심 헤아린다랴 / ……

한춘섭은 그의 저서 <한국 時調詩논총>에서 '80년대 들어서 지니게 된 국정자문위원, 범독립운동자대회 고문 등의 직함은 노산의 직접적인 활동에 해당되지 않는 명예직 중에서도 타의에 의한 것이었다'고 하였다. '그는 사후에도 금관문화훈장(金冠文化勳章) 1등급을 추서 받았고 국정자문위원의 명예와 수다(數多)한 각 단체의 고문, 회장이라는 직함으로 사회장(社會葬) 예우를 받아 국립묘지 제1 국가 유공자 묘역에 잠들고 있는 것이다' 

고산 윤선도가 쓴 '무궁화'

甲日花無乙日輝 오늘 핀 꽃이 내일까지 빛나지 않는 것은

一花羞向兩朝輝 한 꽃으로 두 해님 보기가 부끄러워서다

葵傾日日如馮道 날마다 새 해님 향해 숙이는 접시꽃을 말한다면풍도(馮道): 중국 당진한주(唐晉漢周)의 네 나라, 여섯 임금을 모시고 승상을 지낸 인물

誰辨千秋似是非 세상의 옳고 그름을 그 누가 따질 것인가

윤선도는 조선시대 효종을 위해 평생 충성을 바친 선비이다. 그는 20년 가까이 귀양살이를 했다. 이 시도 귀양 가서 지은 시이다. 무궁화는 이른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 다음 날 아침에는 다른 꽃이 다시 활짝 핀다. 윤선도는 하나의 태양, 즉 한 분의 임금만을 섬기기 위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무궁화는 지조가 있는 꽃이라고 한다. 그래서 무궁화를 '일일화(一日花)'라고 불렀다. 접시꽃은 매일 매일 떠오르는 다른 태양을 향해 한결같이 고개를 숙이니 지조가 없는 것 같다. 어떤 이는 언제나 태양을 향해 고개를 숙이기 때문에 임금님을 향한 일편단심을 나타내는 꽃이라고 칭찬했으나 윤선도는 정반대로 지조 없는 간신배라고 나무라고 있다. 한문학자 정민은 해바라기라고도 국역한다. 하루하루 떠오르는 태양은 서로 다른 임금이라고 가정하는 윤선도의 사고에 근거하면 일일천하인 셈이다. 하여튼 그는 귀양살이하는 자신은 무궁화이고 조정의 벼슬아치들은 접시꽃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친권력 시비가 있는 노산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선출직, 임명직 벼슬을 한 것은 아니지만 정부 산하기관과 각종 관변단체의 대표를 오랫동안 맡으면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권력자를 향한 일관된 노산의 자세는 무궁화인가, 접시꽃인가?

각주 

김복근, <노산시조론>, 도서출판 경남(2008년), 189쪽

한춘섭, <한국시조시논총>, 을지출판공사(1990년), 399쪽

홍난파/노동은, <친일파 99인> 3권, 돌베개(1993년), 114쪽

다큐인포, <부끄러운 문화 답사기>, 북이즈(2004년), 71, 77쪽

현제명/노동은, <친일파 99인> 3권, 돌베개(1993년), 117~124쪽

이은상, 대통령에게 바란다, 정경문화 1980년 9월호, 70, 74, 81쪽

김봉천, <노산 이은상 선생>, 창신고등학교(2002년), 106쪽

정희상, 람직하지 않은 사면, 시사인 2017년 4월 29일 자, 56쪽

<이선관 시전집>, 불휘미디어(2015년), 707쪽

하성환, <진실과 거짓, 인물 한국사>, 도서출판 살림터(2017년), 143쪽

김륭, 택시운전사와 미당 서정주, 김륭, 경남도민일보 2017년 8월 29일 자

하성환, <진실과 거짓, 인물 한국사>, 도서출판 살림터(2017년), 142쪽

정해구, <전두환과 80년대 민주화운동>, 역사비평사(2011년), 88쪽

김상웅, <친일파> 2권, 학민사(1992년), 155쪽

정운현, <친일파는 살아 있다>, 책으로 보는 세상(2011년), 211쪽

김태준/소태영, <스승>, 도서출판 논형(2008년), 169, 176쪽

김상웅, <친일파> 2권, 학민사(1992년), 43, 154, 155쪽

정운현, <친일파는 살아 있다>, 책으로 보는 세상(2011년), 209쪽

김상웅, <친일파> 2권, 학민사(1992년), 66쪽

유달영, 나의 인생노트, 문화일보, 1997년 10월 9일 자

김봉천, <노산 이은상 선생>, 창신고등학교(2002년), 50쪽

박용규, <우리말 보급의 거목, 이윤재>, 역사공간(2013년), 81, 103쪽

김봉천, <노산 이은상 선생>, 창신고등학교(2002년), 81쪽

김복근, 노산문학의 본질적 가치와 사적 의의, 제50회 마산예술제 문학의 밤 특강, 2012년 10월 20일, 5쪽

다큐인포, <부끄러운 문화답사>, 북이즈(2004년), 327쪽

김상웅, <친일파> 2권, 학민사(1992년), 43, 155쪽

정운현, <친일파는 살아 있다>, 책으로 보는 세상(2011년), 210쪽

신준영, <바로 잡아야 할 우리 역사 37장면>, 역사비평사(1993년), 229쪽

이종인/김종/한춘섭, <한국문화원연합회 50년사>, 한국문화원연합회(2013년), 253, 255쪽

한춘섭, <한국시조시논총>, 을지출판공사(1990년), 389쪽

한춘섭, <한국시조시논총>, 을지출판공사(1990년), 419쪽

정민, <한시이야기>, 보림출판사(2002년),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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