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였던가? 금속활자로 찍어낸 책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 직지심경(直指心經)이라는 것을 국사 시간에 배웠었다. 그 이후로 나는 무엇 때문인지 그 직지심경이 당연히 김천 직지사(直指寺)에 있다고 지금까지 굳게 믿어왔다.

그런데 내 믿음은 틀린 것이었다. 부끄럽지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심경과 김천 직지사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 그리고 직지심경이라는 그 이름도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번 여행에서 알게 되었다.

틀린 줄도 모르고 30년 가까이 지켜왔던 내 믿음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마도 이름 때문이었을 것이다. '직지'라는 이름이 같으니 당연히 직지심경이 직지사에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이 어느새 믿음으로 굳어져 버린 것이 아닐까? 팔만대장경 하면 해인사가 생각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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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 영동 물한계곡 전체를 뒤덮을 듯 산허리를 타고 내려오는 구름. 그 모습을 골똘히 보고 있노라면 마침내 넋을 놓고 보게 된다. 자연은 무엇으로도 흉내낼 수 없는 매력을 갖고 있다. / 조재영 기자

 

우리는 충북 영동 물한계곡에서 1박 2일 모토캠핑을 하기로 하고 오전에 출발했다. 창녕에서 출발하는 일행의 가게에서 잠시 쉰 다음 경북 김천 황악산으로 달렸다. 우리는 황악산 자락에 있는 직지사 앞에서 멈춰 섰다.

모터사이클을 주차하고 걸어서 일주문을 지나 본당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둘러 본 직지사는 매력이 넘치는 절이었다. 마당에는 나무가 많았다. 아마도 단풍철이 되면 아름다운 풍경이 드러날 듯했다. 대웅전 앞마당에 두 개의 탑이 마주 보고 있는데 그 모양이 아주 정갈하고 멋있었다. 아래쪽은 군더더기 없이 잘 정돈된 느낌이었고 윗부분은 과하지 않게 멋을 부렸다. 마당을 가로질러 흐르는 수로조차도 돌을 깎아 만들어 놓아 깨끗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을 볼 생각에 기대가 부풀었다. 그 설렘을 억누르고 천천히 걸어서 절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런데 어디에도 직지심경에 대한 안내는 없었다. 선승들이 공부하고 있는 '출입금지' 구역까지 기웃거려봤지만 직지심경의 흔적은 없었다. 나는 그때서야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했다. 함께 간 일행에게 물었더니 직지심경과 직지사는 별다른 관련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절 관계자에게 슬쩍 또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일행이 했던 말 그대로였다. 아뿔싸!

나는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내판을 찾아 꼼꼼하게 읽었다.

천년의 역사와 세월을 간직한 황악산 직지사

직지사는 신라 눌지왕 2년(418년)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 '직지(直指)'라는 명칭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旨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다. 신라 선덕여왕 14년(645년) 자장율사가 중수하였으며 경순왕 4년(930년) 천묵대사가 2차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고려 태조 19년(936년) 능여조사가 중창하여 큰스님들을 많이 배출하고 '동국제일가람'이라 일컬었다.

조선 정종 원년(1399년) 중건이 있었고, 성종 19년(1488년)에 학조대사가 중수하여 조선 8대 사찰 가운데 하나로 사레를 크게 흥성시켰다. 이곳은 많은 국사, 왕사가 수도 정진하던 곳으로,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가 출가한 곳이기도 하다. 벽계 정심선사가 조선조의 법난 때 이곳에 칩거하여 한국 선종의 대맥을 이었다.

선조 29년(1596년) 왜적의 방화로 모든 전각, 당우가 소실된 것을 선조 35년(1602년)부터 중창하기 시작하여 약 60년 만인 현종 3년(1662년)에야 완전히 복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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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보인 경북 김천 직지사 대웅전과 탑. / 조재영 기자

 

근세에 들어서는 고종 년간에 일부 중수가 있었으며, 1963년부터 30여 년 간에 걸쳐 현재의 전각와 당우를 중창, 중수하였다.

사찰 내에는 대웅전(보물 제1576호), 대웅전삼존불탱화(보물670호), 석조약사여래좌상(보물 제319호), 대웅전 앞 동·서 삼층석탑(보물 제606호), 비로전 앞 삼층석탑(보물 제607호), 청풍료 앞 삼층석탑(보물 제1186호) 등의 중요 문화재와 많은 건축물이 보존되어 있다.

안내판에 '직지'라는 이름에 대한 설명에서 '직지심경'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더 이상은 아무 연결고리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여행에서 돌아온 뒤 직지심경에 자세히 찾아봤다. 정확하게 알아야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그것조차 제대로 모르고 30년을 살아온 내가 부끄러워 그냥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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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지사 일주문에서 본당으로 오르는 길. / 조재영 기자

 

내가 찾아본 직지심경은 이런 것이었다

우리가 잘 못 알고 있는 '직지심경'의 정식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청주 흥덕사에서 1377년에 금속활자로 찍어낸 책 이름이다. 불조직지심체요절, 직지심체요절, 직지심체, 직지 등으로 부르면 틀린 이름이 아니다. 그런데 197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주최한 '책' 전시회에 '직지심경'이라고 소개되면서부터 잘못 불리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직지심체요절은 누가 쓰고 누가 찍어낸 것일까? 책 이름에 있듯이 백운화상(1298∼1374)이 1351년 5월 중국 석옥선사에게서 '불조직지심체요절' 1권을 얻어 공부해서 1353년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직지심체요절을 관통하는 주제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다. 이 말은 참선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그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후 백운화상은 1372년 석옥선사에게서 얻은 책 내용에다 인도와 중국, 우리나라에서 깨달음을 얻은 큰스님 등 145명의 법어를 선별해 넣어 직지심제요절 상·하를 새로 썼다. 백운화상은 1374년(고려 공민왕 23년·77세)에 여주 취암사에서 입적했다.

백운화상이 저술한 책은 1377년 7월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는데 현재 상권은 발견되지 않고 있고, 하권(1책 총 38장)만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보관되어 있다.

금속활자본 말고 목판으로 찍어낸 직지심체요절도 있다. 목판본은 취암사에서 간행됐고, 상·하권이 국립중앙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영광 불갑사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이 프랑스에 가 있는 경위는 1886년 한국-프랑스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초대 주한대리공사로 부임한 꼴랭 드 쁠랑시(Collin de Plancy, 1853∼1922)가 우리나라의 고서와 각종 문화재를 수집했는데 그 속에 이 책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쁠랑시는 우리나라에서 수집한 고서를 그의 모교인 동양어 학교에 기증하였고, 그 이후 경매되었는데 앙리 베베르(Henri Vever, 1854∼1943)라는 사람이 180프랑에 구입해 소장하고 있다가, 1950년 무렵에 그의 유언에 따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다고 한다.

직지심체요절은 그 후 잊혀졌다가 1972년 '세계 도서의 해(International Book Year)'를 기념하는 책 전시회에 출품돼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 전시회는 직지심체요절이 세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됐으며 한편으로는 이름이 잘못 알려지는 계기였기도 한 셈이다. 직지심체요절 금속활자본은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이 간행된 흥덕사는 1985년 청주대학교박물관이 발굴에 나서 지금의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866일대가 흥덕사가 있던 터였음을 공식 확인했다. 1992년에 흥덕사 터가 정비되고 그 옆에 청주고인쇄박물관이 개관했다.

직지심체요절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책은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찍어낸 성서였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1400∼1468)는 독일 마인츠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스트라스부르크(Strasbourg)에서 인쇄기술을 익혀 마인츠로 돌아와 인쇄소를 세웠다. 그는 금속주조기로 금속활자를 만들어 성서를 42행으로 인쇄했다. 그의 42행 성서 금속활자 인쇄는 1452년에 시작되어 1455년에 완성됐다고 한다. 이 성서는 한쪽이 42줄로 이루어져 있어 '42행성서'라고 불린다. 42행 성서는 당시 180부를 인쇄했는데, 양피지에 인쇄한 것 12부, 종이에 인쇄한 것 36부 등 총 48부가 지금까지 남아있다고 한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로마를 거쳐 유럽 전역에 전해졌고, 이후 신대륙이었던 멕시코와 페루, 동쪽으로는 인도를 거쳐 필리핀, 아랍까지 전파되어 책의 대중화를 이끌었다고 한다.

물한계곡

직지사를 나온 우리는 1박을 하기로 하고 야영장 예약을 해놓은 물한계곡으로 달렸다. 그 사이 하늘은 잔뜩 찌푸려있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했지만 그때까지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우리가 야영장에 도착했을 때는 인천에 살고 있는 회원 한 분이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리는 곧바로 짐을 풀고 텐트를 쳤다. 그리고 짐을 텐트에 넣고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곧 저녁이 시작되었고 비도 시작되었다. 함께 간 일행 중 한 명은 땀을 뻘뻘 흘리며 꽁치찌개를 끓였다. 또 한 명은 숙성쇠고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인천에 살고 계신 형님이 쇠고기에 올리브유를 발라 맛있게 구워냈다. 버섯에는 버터를 넣어 고소한 맛을 냈다. 허리가 아파 차를 타고 온 일행이 사 온 수박으로 디저트를 하고 내가 준비한 드립커피로 마무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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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행이 숙성쇠고기를 맛잇게 구워내고 있다. 캠핑을 즐기다 보면 요리에 관심이 없던 이들도 어느새 요리사가 된다. / 조재영 기자

 

술과 음식을 먹는 동안에 웃음과 비 내림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됐다. 자정 무렵 각자 텐트에 들어갔다. 가로 1m, 세로 2m쯤 되는 좁은 공간에 누워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이 든다는 건 어쩌면 허허롭고, 어쩌면 행복한 일이다.

아침, 비가 그친 틈에 화장실을 다녀오며 주위를 둘러보니 산허리에 구름이 걸렸다. 이곳은 올해 봄에도 한 번 다녀갔었던 곳이다. 그때는 이곳 보다 약간 하류에서 야영을 했었다.

물한계곡은 충북 영동군 상촌면 물한리 일대를 말한다. 물한계곡은 입구에서부터 최상류 한천마을까지 약 20km에 이를 정도로 깊고 깊은 계곡이다. 각호산(1176m), 민주지산(1242m), 삼도봉(1176m), 황악산(1111m)으로 이어지는 산맥 아래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중에서도 삼도봉은 경북 김천시 부항면, 전북 무주군 설천면, 충북 영동군 상촌면에 접해 있다고 해서 삼도봉이라고 하는데 매년 10월10일 충북, 경북, 전북 3도 만남의 날 행사가 열린다. 이 행사는 3도 사람들이 1년 한번 만나서 우의를 돈독하게 하고자 하는 뜻으로 1989년부터 시작되어 해마다 열린다고 한다. 작년 10월에 열린 행사에는 1000여 명의 주민이 참석해 대화합 기원제와 기념식, 음악회 등이 열렸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매년 열리는 행사는 세 지역 문화원들이 주관한다.

아마도 정치적인 대립 때문에 지역 간 반목과 갈등이 있었던 1980년대.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뜻있는 분들이 지역감정을 없애고 서로 상생하는 길을 찾고자 이런 문화교류 행사를 열기로 했던 모양이다. 1990년에서는 영동군, 무주군, 김천시가 공동으로 삼도봉 정상에 거북이와 용 세 마리가 여의주를 받치고 있는 모양의 대화합기념탑을 세웠다고 한다.

찾아보니 이와 비슷한 행사가 이웃에서도 열리고 있었다.

백두대간 대덕산을 끼고 있는 경남 거창군 고제면과 경북 김천시 대덕면, 전북 무주군 무풍면이 해마다 이런 행사를 열고 있다. 이웃 간 교류를 활성화하고자 1998년 거창군 고제면과 무주군 무풍면 이장 대표가 만나서 첫 교류를 시작한 데서 시작했다고 한다. 작년에는 11월 16일 거창군 고제면 체육관에서 3도3면 주민 200여 명이 참석해 19회째 행사를 열었다. 아마도 올해 11월에 행사가 열리면 20회째가 될 것이다.

"캠핑 아침은 라면이지!"

라면으로 아침을 먹고 나서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혹시라도 비가 그칠까 커피를 마시며 좀 더 기다려봤지만 비가 그칠 모양새는 아니었다. 결국 짐을 싸기로 하고 움직였다. 물이 줄줄 흐르는 텐트를 접어 넣고 나머지 물건들도 가방에 집어넣었다. 출발 준비가 끝났다. 벌써 점심 무렵이었다. 마지막 단계로 우비를 꺼내 입었다. 우비는 모터사이클 라이더들의 필수품이다. 우비는 비 올 때뿐만 아니라 봄, 가을 환절기에 얇은 옷을 입고 라이딩 나갔다가 한기를 느끼게 될 때 꺼내 입으면 최고다. 또 한겨울 라이딩 때도 찬바람이 너무 많이 들어온다 싶을 때 꺼내 입으면 훌륭한 바람막이가 된다.

무주 쪽으로 돌아서 거창, 함양, 산청을 거쳐 집으로 오는 길도 있었지만, 하늘에서 비를 퍼븟고 있었기 때문에 보다 안전한 길을 택했다. 김천, 성주, 고령, 창녕으로 코스를 잡았다. 빗줄기는 가늘어졌다가 굵어졌다가 했지만 완전히 그치지는 않았다. 창녕쯤 왔을 때는 어디로 비가 스며들었는지 배부터 아래로 모두 흠뻑 젖었다. 팬티까지 젖었다. 말 그대로 비 맞은 생쥐 꼴이 됐다. 겨울이었다면 냉기 때문에 운행을 할 수 없을 뻔했지만 한여름이어서 그런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전날 그랬던 것처럼 창녕에서 뜨거운 커피를 한 잔 마신 뒤 집으로 출발했다. 집에 도착할 무렵 빗발이 약해졌고 산과 들, 골짜기 군데군데 안개처럼 피어오른 구름이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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