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덕이 더해져야 진정한 명당
왕·비는 '능'세자·세자빈은 '원'
폐위된 왕·서민 무덤의 경우 '묘'
사대부 단단한 회곽형 주로 사용
'풍수·명당 = 후손 복'인식 팽배
실학자들 "혹세무민"거센 비판
나눔·덕 실천해야 명문가 평판

풍수는 누구나 알고 있다 생각하고 내심 관심이 있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도 드문 사고체계이다. 이번 회는 잠시 불교미술에서 벗어나 최근 개봉한 영화 <명당>을 소재로 우리나라 무덤과 풍수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다.

영화 〈명당〉 스틸컷.

◇영화의 역사적 배경

-장동 김씨

영화 <명당>은 1800년 정조 사후 순조, 헌종, 철종으로 이어지는 3대 60여 년간의 세도정치기가 절정에 달했던 헌종대(1834∼1849)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순조의 비는 안동 김조순의 딸(순원왕후)이었으며 이 결혼이 세도정치의 시작이 된다. 세도정치기의 안동 김씨는 장동 김씨라고도 부른다. 안동 김씨는 시조가 태어난 장소가 안동이라는 말이지 후손들이 계속 거기에 산다는 의미는 아니다. 조선시대 후기 안동은 주류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세도정치기의 안동 김씨는 인조대 척화파의 선두주자 김상헌 이후 본격적으로 정계에 두각을 나타냈다. 이들은 주로 창의문(자하문이라고도 한다) 인근 장의동에 살아서 장동 김씨라고 불렀다.

-흥선대원군

김조순은 반남 박씨, 풍양 조씨 등과 권력을 나눠 가지며 주도권을 잡아나간 반면, 그의 아들 김좌근은 안동 김씨만의 권력을 독점적으로 구축했다. 안동 김씨 세력이 불편했던 순조는 아들 효명세자의 빈으로 안동 김씨가 아닌 풍양 조씨를 선택했다. 그러나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중 요절해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이후 아들인 헌종이 효명세자를 왕으로 추존했고 자연스레 세자빈은 신정왕후가 되었다. 이 신정왕후가 흥선군의 둘째 아들을 고종으로 옹위했다. 안동 김씨로 둘러싸인 궁궐에서 상대적으로 비주류 세력이었던 흥선군과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일 것이다.

흥선군은 젊은 시절 파락호 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실제 그랬는지는 의문이다. 동양 군주제하에서 왕이 되지 못한 형제들의 목숨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역모 사건이라도 발생하고 그들의 입에서 왕친인 아무개를 옹위하려 했다는 말만 나와도 그 아무개는 당연히 사약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 왕의 형제들(君)은 당연히 행동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없다면 일반적인 왕친들의 생활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흥선군이나 아버지 남연군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삶을 살지는 않았으며 야사에 나오듯 불량배의 가랑이 사이를 걸어갈 필요는 더더욱 없었다. 다만 철종이 후사가 없고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자(사전에 신정왕후와 교감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분이 미천한 자와 사귀는 척하거나 돈을 빌리는 일탈적인 행동을 했다. 자신이 야심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무덤

조선시대 무덤은 능(陵), 원(園), 묘(墓)로 뚜렷하게 구분되었다.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은 세자나 세자빈, 왕을 낳은 후궁의 무덤이다. 묘는 그 외 사람들의 무덤을 말한다. 총(塚)이라는 용어도 있다. 총은 주로 규모 등이 왕릉급일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치 않은 무덤에 사용된다. 그래서 경주에는 천마총, 황남대총 등이 가득하고 이 무덤들의 주인공은 대부분 왕일 것으로 생각되어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을 대릉원이라 한다. 고구려 장군총도 어떤 학자들은 장수왕릉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있느냐 마느냐의 문제이다. 왕에서 폐위되어 서민이 된 연산군이나 광해군의 무덤은 묘이다. 드라마 <동이>로 유명한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무덤은 소령원이다.

▲ 조선시대 회곽. / 최형균

- 무덤의 구조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주로 회곽묘를 이용했다. 관을 쓰고 그걸 덮는 곽을 만든 다음 그 밖을 두꺼운 회로 덮어 버리는 방식이다. 조선 전기에는 하도 두껍게 회를 치다 보니 관 내부가 완전히 밀봉되고 회가 마르면서 그나마 있던 산소도 다 흡수해버리고 나니 종종 미생물도 살지 못하는 환경이 만들어진다(사진 1). 이러면 시신이 썩지 않고 미라가 된다. 뉴스에 미라가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나오면 열에 아홉은 조선시대 전기 양반무덤일 것이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는 회의 두께가 아주 얇아지면서 이런 현상은 거의 나타나지 않게 된다.

왕릉은 좀 달랐다. 고려 후기부터 지하에 돌로 방을 만든 구조의 왕릉이 만들어졌는데(사진 2) 조선시대에 들어와 무덤시설 주변을 회로 두껍게 둘러싼 석실형 능이 주류를 이루다가 죽어서 빨리 썩어야 하니 번거로운 돌방을 만들지 말라는 세조의 유언으로 자신의 무덤인 광릉에서 처음으로 회곽형 능이 등장한다. 재궁(왕의 관) 밖을 두꺼운 회로 완전히 덮어버린 시설이다. 석실형이든 회곽형이든 회의 강도가 엄청나게 단단해서 굴착기 같은 특별한 도구 없이 사람의 힘만으로 조선시대 왕릉이나 사대부 묘의 석회를 뜯어내는 일은 몹시 어렵다. 그래서 남연군묘도 오페르트 무리가 5시간 동안 이 회를 뜯어내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던 것이다.

▲ 강화도에 있는 고려왕릉, 지하에 돌로 방을 만든 구조가 있다. /문화재청

그리고 이 도굴꾼들이 회곽까지 닿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풍수에서는 최소 6자 이상 파야 지기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왕릉의 경우는 10자를 팠다. 한 자가 30㎝ 정도이니 안릉의 깊이는 거의 3m에 달한다. 조선왕실은 엄격하게 왕릉만 10자를 팔 수 있도록 했다. 사대부나 일반인은 5자를 넘지 못했다. 이를 어기면 역모로 처벌했다. 오페르트 일당은 150∼180㎝ 정도 파 내려가야 겨우 회곽에 닿을 수 있었을 것이다.

◇풍수와 명당

-동기감응론

풍수는 땅을 고르기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한 이론이다. 삶의 공간을 선택하는 것은 양택, 죽은 자리를 선택하는 것은 음택이다. 사람들의 생활에 더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양택이지만 일반인들은 음택에 더 많은 관심이 있고 이 음택의 사상적 기반은 동기감응(同氣感應)론에서 시작한다. 사람이 죽은 후 남은 뼈가 다시 생기를 받아들임으로써 그 자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좋은 곳에 장사를 지내면 후손이 복을 받고, 좋지 못한 곳에 모시면 화를 입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영화에서는 안동 김씨들이 무덤을 잘 써서 지금의 복을 받는다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혹세무민하는 이런 발복풍수는 실학자들에 의해 엄청난 비판을 받는다. 정약용은 "살아있는 부모님이 자식과 마주앉아 이야기해도 어긋나기 쉬운데 죽은 사람이 어찌 살아있는 자식들에게 복을 줄 수 있겠는가?"라 하였고, 홍대용은 "중형을 당한 죄수가 옥에 있을 때 겪는 고통이 견딜 수 없다 하여 옥 밖에 있는 그 죄수의 아들이 몸에 병이 생겼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면서 하물며 죽은 부모가 살아있는 자식에게 무슨 영향을 줄 수 있느냐고 동기감응론을 일축했다.

▲ 남연군묘와 이 묘 앞 석불상. /최형균

▲ 남연군묘와 이 묘 앞 석불상. /최형균
-남연군묘(사진 3)

하지만 남연군묘는 정말 독특한 장소이다. 실전풍수에 문외한인 필자가 가서 봐도 세상에 명당이란 게 있다면 바로 이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말 지기라는 게 있는 것인지 갈 때마다 나를 흔들어 깨우는 말 못할 무언가가 있다. 흥선군은 이 묫자리를 얻기 위해서 절을 불태우고 강제로 승려들을 몰아냈다. 이런 악업에 원한이 쌓인 돌부처가 지금도 남연군묘를 등지고 있다고 말할 정도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나라 풍수의 시조 도선이 어머니의 산소를 모시고 남긴 "길지를 얻는 데는, 아는 것도 쓸데없고 하늘의 뜻에 순응하고 덕을 쌓는 것 만한 게 없구나"라는 탄식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도선은 덕을 쌓는 것이 명당을 얻는 최고의 방책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그 예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전국에 남아 있는 명문가들이 바로 이 적덕(積德)의 산물이다. 전란이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 대부분의 목조건물들은 살아남지 못한다. 신라를 상징하는 황룡사도 고려말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버렸다. 한국전쟁 때 지주라고 뭉뚱그려진 양반집들도 반동으로 몰려 대부분 불타버렸다. 그럼에도 살아남는 몇몇 집안들의 비결은 덕을 쌓은 결과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경주 최부자댁은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을 실천했고, 호남의 최고 명당 구례 운조루에는 어려울 때 누구나 가져가라(타인능해·他人能解)는 말이 쓰여 있는 뒤주(사진 4)가 있다. 자리 잡은 땅이 명당일 수도 있지만 그 땅을 쓰는 사람들의 덕이 더해져야 진정한 명당이 된다 할 것이다.

▲ 호남의 최고 명당 구례 운조루에 있는 뒤주, 어려울 때 누구나 가져가라(타인능해)는 말이 쓰여 있다. /최형균

다시 생각해보자. 남연군묘가 정말로 2대에 걸쳐 황제를 배출할 땅이라고 하자. 그런데 그 땅을 수많은 악업을 쌓아가면서 뺏고 난 결과는 어떠했던가? 황제라고는 하지만 그들의 삶이 선업을 쌓고 산 사람들보다 나았을까?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었던가? 남연군묘에서 얻는 또 하나의 준엄한 교훈이라 할 것이다.

※이 기획은 LH 한국토지주택공사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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