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면·자존심 버려야 자유로울 수 있어
작은 일에도 소중함 느끼는 자세 필요

시인에게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써지지 않았다. 탐험가에게 아직 가보지 못한 미답의 대륙과 바다가 남아 있다. 천문가에게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들이 있고 과학자에게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진리가 있다. 그리스 출신 터키 국적의 혁명가이자 서정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나짐 히크메트의 '진정한 여행'이라는 시를 읽고서 되뇌는 나의 독백이다. 무엇인가를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다. 더 이상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어 앞이 깜깜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여행 새로운 세상을 여행할 수 있다. 신명이 난다. 아직도 이 나이에 가슴이 꽁닥꽁닥 뛰다니. 산다는 게 신비다. 경이롭다고 할 수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길 없는 길> 소설가 최인호의 문학적 귀결점으로 평가받는 이 소설은 구한말 고승 경허(鏡虛)의 구도의 삶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깨달음의 세계에는 들어가는 문이 없다. 없는 길을 가는 것이 구도다. 알 수 없는 길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갈 수 없는 길을 우리는 어떻게 갈 수 있을까? 우왕좌왕 좌충우돌 세상과 갈등하던 경허는 바보천치가 돼 마침내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을 탈출함으로써 자신만의 세계를 열었다. 내 눈에 경허는 진정한 승리자다. 진정한 여행자였다. 신라의 승려 원효는 강산을 주유하면서 머무르는 토굴마다 부사의방(不思議房)이라고 이름하였다. 강산을 떠돌던 원효가 진정으로 가고자 하는 곳은 알 수 없고 갈 수 없는 어떤 이상(理想)이었다. 생각으로 이르지 못하는 곳. 불가사의한 땅. 말이 끊어지고 글로 쓸 수 없고 그림으로 그릴 수 없는 미지(未知)의 세계를 어느 날 문득 열었다. 천 년을 훌쩍 지나도 원효의 이름이 있는 이유다.

진정한 여행을 원하거든 형상 있는 세상의 것들에서 멀어져야 할 것만 같다. 시간이라고 하는 것, 공간이라고 하는 것의 막바지에서 오직 이 여행만을 위하여 심장이 몇 배나 뛰고 호기심이 천 배나 더 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삶과 죽음은 과연 무엇인가? 내가 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생사로부터 훌훌 벗어날 때 내가 만나는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놀랍고 신기하고 신명나는 일일 것 같다.

석가는 '이 땅에서 저 땅으로 건너려거든 떼배를 타고 가서 그 떼배를 버리라'고 당부한다. 그래야 새로운 세상을 갈 수 있다고. 나는 지금 내가 가진 것들, 예를 들면 나를 편안하게 하는 것들과 나를 지켜줄 것만 같은 자존심과 체면과 아는 식견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벗어날 수 있다면 과연 어디까지 벗어날 수 있을까? 중년의 나이를 넘어서면 세상의 형상있는 것들은 적어도 그다지 큰 것이 아니다. 자운산에 늙고 병든 농아 비구가 살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들 혀를 차며 그 인생을 가엾게 여겼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다만 작은 일이라도 생기면 그 일을 소중하게 알아 합당하게 응하고, 일이 없으면 유무고락(有無苦樂)이 없는 무위(無爲)의 진경에서 '진정한 여행'을 즐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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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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