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보다 언어로 압도하는 그들의 액션
2차 세계대전 후 영국 배경
정보부 내부서 펼치는 암투
총성없이 관객 몰입감 높여

의심이란 감정은 참 무섭다. 한 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을 모른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사실에 기반을 두지 않은 의심은 편집증으로 읽히기까지 한다.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영국 비밀 정보부(MI6) 국장 '컨트롤(존 허트)'의 편집증에 가까운 의심에서 비롯한다.

서커스(정보부를 지칭하는 표현) 안에 두더지(이중 첩자)가 있다는 의심. 그는 서커스 고위 간부 다섯 명 중 하나가 두더지라고 확신한다.

컨트롤은 현장 요원인 짐 프리도(마크 스트롱)를 부다페스트로 보낸다. 그에게 두더지 정체를 아는 헝가리 장군의 망명을 도우라는 임무를 맡긴다.

그리고 컨트롤은 짐에게 두더지의 암호명을 알아내라고 명령한다.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서 영국 비밀 정보부 간부 3명이 각기 다른 표정으로 앉아 있는 장면. /스틸컷

서커스 수뇌부인 퍼시 엘레라인(토비 존스)의 암호명은 '팅커', 빌 헤이든(콜린 퍼스)은 '테일러', 로이 블랜드(시아란 힌즈)는 '솔저', 토비 에스터헤이즈(다비드 덴칙)는 '푸어맨'이다.

컨트롤의 의심은 자신의 오른팔인 부국장 조지 스마일리(게리 올드먼)까지 뻗친다. 조지의 암호명은 '베거맨'이다.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속 전직 영국 비밀 정보부 간부 조지 스마일리. /스틸컷

체코에서 헝가리 장군을 만난 짐은 상황이 계획과 다르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벗어나려다 사살당한다. 컨트롤은 사건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 조지도 함께 쫓겨난다.

명확성을 의심받던 컨트롤의 의심은 시간이 지나 구체성을 확보한다. 서커스 배신자로 쫓기던 현장 요원 리키 타르(톰 하디)가 두더지에 관한 정보가 있다며 올리버 레이콘 차관에게 연락을 취하면서다.

은퇴 이후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조지에게 정부는 진상 조사를 명령하고, 조지는 다시 현장으로 복귀한다.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속 영국 비밀 정보부 간부 퍼시 엘레라인. /스틸컷

영화의 주된 흐름은 의심의 실체를 풀어가는 조지의 지난한 발자취를 따른다. 그 흔한 총성 한 번 없이 사람을 만나고, 서류를 뒤적이면서 조각을 짜맞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찾아온 냉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까닭에 어느 누리꾼의 '구강 액션'이라는 우스갯소리가 그저 농담만은 아니다.

반복되는 대화로 풀어내는 이야기는 자칫 지루할 법도 한데, 영국의 회색빛 날씨, 냉전이라는 음울한 배경에 녹아든 배우들의 진한 연기가 이를 괜한 걱정으로 만든다.

냉전 속 음울한 배경과 회색빛 날씨가 드러나는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한 장면. /스틸컷

영화는 존 르 카레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영화에 앞서 1979년 BBC에서 한 차례 드라마화한 바 있다.

존 르 카레는 드라마 이후 32년이 지나 자신의 작품으로 영화 제작에 착수하자 우려를 나타냈다. 드라마에서 조지 역할을 맡았던 알렉 기네스 연기를 능가할 배우가 있을지, 방대한 원작의 이야기를 두 시간 안에 풀어낼 수 있을 것인지 말이다.

그러나 영화는 127분을 촘촘하게 구성했다. 알프레드슨 감독의 빼어난 연출과 게리 올드먼을 비롯한 배우들의 명연기는 원작자의 걱정을 말끔하게 씻어냈다.

존 르 카레는 영화를 보고 나서 "알렉 기네스가 게리 올드먼 연기를 봤다면 가장 먼저 기립박수를 쳤을 것"이라며 "알프레드슨 감독에게 원작을 제공한 것이 자랑스럽지만 그가 만든 영화는 온전히 그 자신의 훌륭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고 극찬했다.

원작의 분량을 두 시간에 함축한 탓에 인물의 배경 같은 요소를 회상 구조로 암시하는데, 일각에서는 불친절하다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그럼에도, 일반 관객의 다양한 감상평과 분석이 쏟아져 나온다는 점은 영화가 지닌 매력을 방증한다.

영화의 또 다른 매력 요소는 촬영 방식과 음악이다. 장면의 구성은 '각'이 살아있다. 마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첩자의 삶이나 냉전 시대의 냉혹함을 닮은 듯한 인상이다.

기계에 가까운 카메라 움직임이나 관음증에 가까운 시선은 두 시간 동안 총성 없이도 긴장감을 유지하고, 나아가 이를 증폭한다.

영화 <콘스탄트 가드너> <연을 쫓는 아이>로 영국 아카데미 음악상 후보로 올랐던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가 영화 음악을 맡아 선연한 긴장감을 더한다.

두더지의 정체가 드러나고 인물들의 모습을 하나둘 비추는 쓸쓸한 결말에 경쾌한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곡 '라 메르(La Mer)'를 배치한 선택은 백미.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남긴 발자취는 한국 영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난 8월 개봉한 윤종빈 감독 영화 <공작>은 의심에 기반을 둔 공포가 지배하는 사회, 총성 없는 전쟁의 긴박함을 담았다는 점에서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와 유사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서커스의 도청 방지용 회의실은 주황색 벽으로 마감했는데, 이는 영화 <내부자들>에 등장하는 조국일보 편집회의실로 인용되기도 한다.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네이버·다음 등 포털사이트, 넷플릭스 등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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