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북 이유로 연좌제 적용
남은건 가족 사진 1장뿐
체계적 수집 사업 절실해

1947년 해방된 조국에서 그 남자는 울었다. 삼 일을 울고, 먹지 못하고, 눈을 감아도 잠을 자지 못했다.

먼저 세상을 떠난 그의 동지를 생각하며 울고 또 울었다. 꿈이라 생각하면 현실이고 현실에서 꿈을 바랐다.

아내와 아이들은 그의 방 앞에서 속울음을 울었다. 감히 문을 열 수도 없는 '통곡', 지하에서도 들리는 '통곡'소리에 그 누구도 그를 위로할 수도 없었다.

의열단 단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 외 역임한 직위만도 10개가 넘는,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님보다 더 많은 현상금이 걸린 독립운동가 약산(若山) 김원봉은 해방된 조국에서 왜 그토록 눈물을 흘렸을까?

지난 3월 밀양에 개관한 의열기념관 내부 모습. /경남도민일보 DB

◇광복 후 친일경찰에 체포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쓴 <약산 김원봉 평전>에 따르면 약산은 1898년 8월 경남 밀양군 부북면 감천리 57번지에서 출생했다. 서당을 다니다 11세에 밀양공립보통학교에 편입했고, 1911년 일왕생일 축하행사를 위해 준비한 일장기를 학교 화장실에 처박는 사건으로 약산은 자퇴한다.

그러나 그 후 밀양 동화중학교 2학년에 편입했고 민족혼을 일깨워 준 일생의 은인인 전홍표 교장과 평생 동지인 윤세주와 우애를 다진다.

1919년 6월 22세의 나이로 서간도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고 9월 신흥무관학교 퇴교, 11월 의열(義烈)단을 창단했다. 의열단은 1920년부터 부산밀양경찰서·종로경찰서·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등 독립운동의 굵직한 사건들을 수행한다.

항일독립운동사의 의열투쟁 전반을 살펴볼 수 있는 의열기념관 개관식 장면. /경남도민일보 DB

그 후 의열단은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 1938년 조선의용대 결성 후 1941년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로 결정, 1942년 조선의용대 광복군 편입하고 약산은 1944년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취임한다. 1945년 광복으로 귀국하여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공동의장에 취임한다.

그러나 대구 총파업 발생 배후자로 지목돼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체포되어 굴욕을 당한다. 이때 약산은 "내가 조국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일본놈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소" 라며 분노를 쏟았다고 한다. 심리적,육체적으로 압박을 받다 월북하게 되고 1958년 숙청 등의 이유로 역사에서 사라진다. 향년 61세다.

◇생존을 위한 월북

약산은 왜 월북을 했을까? 일제강점기 왜경에게도 잡히지 않았던 신출귀몰의 사나이가 친일파들이 활개치는 기막힌 해방조국에서 왜놈의 앞잡이가 임정의 요인을 모욕적으로 다룬 것 외, 해방정국의 주역인 여운형 암살사건, 테러위협으로 인한 긴장된 생활 등 월북은 선택보다는 생존이 아니었는지 감히 짐작해 본다.

중경 시절 김원봉의 비서였던 사마로의 자서전에 의하면 "북한으로 가지마라"고 자신이 상해에서 보낸 서한에 대해 김원봉은 "북한은 그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남한의 정세가 매우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여 살 수가 없어 시골로 거처를 옮겼다"고 답신했다고 밝혔다고 한다.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의 막내 여동생 김학봉 씨. /경남도민일보 DB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도 '신변위협'이 가장 큰 이유다. 그렇다면 월북이후 그의 퇴장은 어떠했을까? 숙청설, 은퇴설, 자살설이 있다. 그 어떤 설로 보아도 퇴장이 쓸쓸했음을 짐작해본다.

또한 약산의 월북 후 그의 가족, 형제는 풍비박산이 났다. 9남 2녀의 형제 중 친동생 4명과 사촌동생 5명이 보도연맹 사건으로 죽음을 당했고 아버지 김주익은 외딴 곳에 유폐되었다가 굶어 죽었다. 가족과 함께 월북해 두 아들과 아내의 생사도 알 수 없다. 여동생 학봉(1932~ ) 씨만이 밀양에 생존해 있다.

◇약산을 낳은 밀양과 경남

그렇다면 밀양은 어떤 곳인가?

평전에 따르면 밀양은 독립운동사에 고딕체로 기록되는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이 많은 곳이다. 1920년 밀양경찰서 투탄사건 등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사건의 주역들 그리고 의열단·민족혁명당·조선의용대로 이어지는 의열투쟁의 주역 대부분이 밀양 출신이며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는 윤세복, 윤세용, 강인수, 김대지, 김명규, 박지원 등이다. 또한 1919년 3월 13일 밀양에서는 영남 최초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고 지역유지, 여성 등 모든 주민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렇다면 우리 경남은 약산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하고 있는가?

의열기념관에서 일하고 있는 분에게 현재 약산 관련 기록이 있는지?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 문의하였다. 그분 말에 따르면 현재 밀양에 생존해 계신 막내여동생이 준 가족사진 하나 외에는 없다고 하시며 월북인사라는 이유로 연좌제 때문에 일부 남아있었던 것도 모두 없어졌다고 하였다.

또한 약산의 흔적을 찾는 것도 군사독재시절 등의 시기에 오해받을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에 일부러 찾지 않았다고 한다. 국립대만도서관에 약산의 활동사항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지만 체계적인 수집 사업은 진행되고 있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월북인사라는 이유로 독립운동가 명단에도 들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아직 체제의 자양분을 먹고사는 사람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그분의 진정한 가치를 알리는 것은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독립운동가 김원봉 생전 모습./경남도민일보 DB

◇경남이 기억해야 할 인물

시대의 평가, 나라에서 주는 공훈은 뒤로하고, 경남에서 태어나 지역에서 주는 문화를 흡수하고 성장해 민족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싸우다 쓸쓸하게 사라진 그분을 우리 경남은 기억해야 한다. 월북으로 인한 연좌제로 가족과 친인척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굶어죽었다. 그분이 왜 월북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한번쯤 눈을 감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길 희망한다.

우리는 그분의 흔적을 찾아야 한다. 또한 찾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기록을 찾아 그분을 기억하고 독립운동가로서 역사 앞에 당당히 그분을 세워야 한다.

영화 <밀정>을 통해 국민들은 약산을 체험했다. 또한 2019년 약산을 주제로 한 드라마 <이몽>이 방영될 예정이라고 한다.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금 약산은 독립운동가로서의 '국민적 공감대'가 필요하다. 드라마가 그것을 얼마나 소화시켜줄지는 모르겠지만 계기는 되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그 외 밀양의 독립기념관과 경상남도기록원 등은 약산의 정신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여러 곳에서 하나하나 얽힌 실타래를 풀다 보면 길이 보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친일경찰에서 친미·반공경찰로 변신한 노덕술의 모욕을 넘어 해방조국의 비참한 현실에 분노한 약산의 눈물은 온 국민의 위로로 그칠 것이다. 그 위로의 출발점은 우리 경남이어야 한다. 경남의 땅을 밟고 자란 사람, 밀양사람 김원봉 선생님을 기록하고 기억하자. 지하에서도 눈물을 그치지 못했을 것 같은 그분이 이제 그 눈물을 그치고 평안해지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시민기자 전가희(기록연구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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